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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의 시대, 그리고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 _aliceview

yoo8965 2009. 3. 20. 22:53


1. 융합의 시대, 그리고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

“융합(Fusion, Convergence or Consilience)”이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의 가장 주된 키워드 중 하나일 것이다. 융합의 흐름은 모든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특히 “두 문화 1)” 사이에서 벌어지는 활발한 교류는 주목할 만하다. 과학 기술과 예술은 서로 만나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만들었고, HCI(Human-Computer Interaction)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는 이제 미디어 아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전자 공학, 자연과학, 재료 공학 등 과거에는 서로 구분이 분명했던 학과들도 이제는 그 교집합이 점점 커지며 서로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있다. 또한 생물학자인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연구 기관인 통섭원을 만들기도 했다. 융합의 예를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테지만, 과학 기술이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과 만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까지 창조하는 것을 보면(가비오따스 마을과 월드체인징을 보라!) “융합”이라는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융합의 흐름에 대해 MIT 미디어랩에서 했던 활동과 연구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미 66년 전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시도했던 바 있다. 이와 같이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는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고,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가 공유했던 융합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초와 말에 세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본 칼럼에서는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 사이의 공통점과 그 성과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돌아보고자 한다.


2. 융합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바우하우스의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1919년 첫 비공식 전시회 연설을 들어 보자.

“우리는 지금 세계사의 거대한 격변기에 놓여 있으며 삶의 모든 형태와 더불어 온전한 내적 존재까지도 변화되고 있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중략)…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낡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낡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는 둘 다 시대적 격변기 속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아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디어랩은 창설되던 당시 1980~90년대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인터넷의 등장 등으로 시대와 세계의 흐름이 급격히 변하는 시대에 속해 있었으며, 바우하우스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경제 상황과 기계적인 대량생산에 의해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던 과도기적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와 발터 그로피우스는 각자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를 세우면서 다양한 분야의 융합을 시도하였다.2) 1985년에 MIT에 세워진 미디어랩은 “inventing a better future”라는 모토와 함께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분야의 융합을 시도하였다. 네그로폰테 교수는 미디어랩은 “자연 과학을 하는 곳도 아니고, 단순히 기술 연구만 하는 곳도 아니며, 인문 과학을 하는 곳도 아니며 그 세 개가 뒤섞인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3) 바우하우스 또한 예술을 중심으로 과학, 기술, 공예 등 다양한 분야를 융합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이러한 특징은 1924년 <바이마리셰 차이퉁> 지에 실린 ‘투링기아 독일문화 수호협회’의 발표문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학교의 교장에 따르면 바우하우스 주는 ‘근래에 함께 발전되어온 예술(무엇보다도 건축과 회화, 조각)과 과학(수학, 물리학, 화학, 심리학 등), 그리고 테크놀러지 분야를 통합하는’ 교육 기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와 같은 융합에 대한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의 관심은 공연 예술 분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디어랩에는 토드 맥코버가 이끄는 "Opera of the future"라는 연구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은 미래의 음악 작곡, 공연, 학습, 표현의 진보를 위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4) 이들은 Hyperinstruments 프로젝트를 통해, 첨단 기술의 도움으로 기존 악기의 물리적 한계와 연주자의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시도한 바 있다. 또한 2009년 가을 몬테 카를로에서 초연 예정인 “Death and the Powers” 오페라는 첨단의 하이테크와 예술이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반면 바우하우스의 융합 시도는 1923년 8월 15일에서 19일까지의 “바우하우스의 주(週)”에서 단적으로 들어난다. 4일 동안 바우하우스 연극 공방 담당인 오스카 슐레머의 "Triadic Ballet"와 "Mechanical Ballet"가 공연되어 미디어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모색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논의가 시도되었으며(Triadic Ballet에 곡을 붙여준 파울 힌데미트도 기계 음악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것인 슬로우 모션 기법을 사용한 과학 영화가 상영되었다. 또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주제로 한 그로피우스의 강연은 융합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5)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가 프로토타입 제작을 중요시한다는 사실도 중요한 공통점 중 하나이다. 미디어랩에는 결과 시연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데모(Demonstration)의 문화) 6)”가 있다. 이는 연구소 재정의 많은 부분을 기업의 스폰서에 의지하고 있어서 개발한 기술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과정이 실제 제품이나 서비스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바우하우스에서도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 보다는 제품의 기능과 시대적 맥락에 의해서 디자인이 결정된다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대량 생산을 위한 원형과 시대적인 전형 제작에 크게 가치를 두었다.7) 이러한 프로토타입 제작은 과학 기술이 연구소 안에만 머무는 것과 예술이 화가의 아틀리에 안에만 머무는 것을 막고 과학과 예술이 적극적으로 타분야와 융합할 수 있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의 유산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단지 그들이 여러 분야의 융합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세계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미디어랩은 가상현실, 유비쿼터스 기술, World Wide Web과 같은 혁신적 기술을 개발하고 시대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단적인 예로 “네그로폰테 스위치”라는 것이 있다. 1980년대에 TV는 무선인 반면 전화는 유선이었다. 하지만 당시 네그로폰테 교수는 곧 TV가 유선으로 전화는 무선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는 오늘날 현실이 되었다. 이와 같이 미디어랩은 변화의 최전선에서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다. 반면 바우하우스는 대량생산 시대에 맞는 디자인의 역할을 보여주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제작품의 원칙이라는 글에서 대량 생산 시대의 디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견하였다.

“대량생산된 것들은 손으로 만든 것보다 값도 싸고 품질도 더 좋다. 이러한 표준화가 개인적인 선택권을 유린할 위험은 없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모델들이 경쟁을 통해 자동적으로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뛰어난 통찰력을 통해 예견하고 창조한 것은 현실이 되어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와 같이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는 융합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고 창조했으며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


3. 바우하우스와 미디어랩 사이에서 우리를 돌아보다

바우하우스와 미디어랩이 만들어 놓은 융합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분명히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사회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패러다임을 새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우리의 교육이 융합 시대에 발맞추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랩의 창립자인 네그로폰테는 이미 1995년에 “Being Digital”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한국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바로 당신들의 교육체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중점을 두었던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당신들은 교육 분야에서 극히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 창의적이고 유연한 교육의 길 대신에 주입식 암기교육에 극단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디지털 세계가 출현해 상이한 학습 분야를 통합하고 나섰다. 예술과 과학과 공학 분야 사이의 완고한 장벽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두 문화” 사이의 벽은 높기만 해서 문과 학생은 과학 기술과 접할 기회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의 미술 교육과 음악 교육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핑계로 계속 축소되어 겨우 명맥만 잇고 있을 뿐이다. 또한 교육 방식에 있어서도,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미디어랩과 바우하우스가 그랬듯 미래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기 위해서 교육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미디어랩이 만들어진 20세기 말부터 지속된 IT 혁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제는 IT 뿐만 아니라 NT와 BT 분야에서도 뛰어난 혁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생활 방식, 사고, 문화 모두를 바꿔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한 융합의 시도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만드는 것이다.(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 -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8)

글. 유석재 (물리학) 
blog : http://joshuatree.egloos.com/  e-mail : encube@korea.ac.kr



1) 두 문화(The Two Cultures) : 1959년 C.P. 스노가 리드 대학에서 한 강의 제목으로, 지식의 전문화로 인해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사이의 교류 단절을 비판한 것이다.
2) 미디어랩의 창설자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와 바우하우스의 창설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모두 건축가라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3) 라 이치야, 상상력의 천국, MIT 미디어랩, 청어람미디어, 45p.
4) Media Lab web-site (Research group description) : “The Opera of the Future group (also known as Hyperinstruments) explores concepts and techniques to help advance the future of musical composition, performance, learning, and expression.”
5) 휘트포드, 바우하우스, 시공아트, 138p.
6) 라 이치야, 상상력의 천국, MIT 미디어랩, 청어람미디어, 31p.
7) 그로피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바우하우스 제작품의 원칙, 바우하우스 신문
8) Ethan Smith, Cool Think Tank: Media Lab, Entertainment Week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