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티스토리 툴바


영화와 미디어아트는 무엇이 다른가. 배우가 나오느냐 안나오느냐, 선결된 세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최근 들어 더욱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통념적 구분기준을 미련 없이 버리고, 좀 더 그럴 듯한 차이점들을 열거해보자.

일단 극 혹은 내러티브의 유무는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극이란, 미디어아트와 연극, 소설 간의 헐렁한(따라서 영양가 없는) 차이이기도 하거니와, 넓은 의미의 극 개념을 적용해본다면, 극이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 임의의 작품 앞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한 장의 사진 안에도 극이 있으며, 극을 제거하려해도, 관람자의 극적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자주 얘기되는 테크놀로지도 그 결정적 차이는 아닌 것 같다. 미디어아트만큼이나 영화도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며, 또 그 역사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평행선을 그려왔다.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은 광학녹음기술의 개발과 동시에 수정 발전 완성되었으며, 태초를 뒤질 필요도 없이, 필름의 관용도를 극복하기 위한 비디오 기술의 개발을 현재 주도하는 것도 영화 산업이다.

마찬가지로 수용자 혹은 관람자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참여 혹은 참여의 자유 또한 자격미달이다. 미디어아트가 이상형으로 꼽는 일대다 대응의 집단참여 방식은, 영화가 사진의 복제력으로부터 그 프린트 기술을 빌려왔을 때 이미 다른 예술에 대해서 성취했던 것이며, “일대다”란 용어에서 “다”의 상대성을 강조한다하더라도, 이미 영화는 이중노출, 다중화면, 무엇보다도 시점샷(최근에는 초월자의 시점까지 포괄하는 핸드헬드 시점샷) 등의 멀티시점을 꾸준히 준비해왔다.

감각 혹은 지각의 확장? 미안하지만 영화가 카메라에게 요구했던 자격, “시간의 현미경”은 이미 미디어아트가 확장하려던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다. 벤야민이 몽타주와 슬로우모션에 대해서 예찬한 이유, 발라즈가 클로즈업에 대해서 예찬한 이유는,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컴퓨터의 소형화(경량화)를 예찬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더 김새는 얘기겠지만, 영화에서 이른바 “샷shot" 개념은 이미 지각의 수준과 단위를 측정하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극, 지각의 형식 혹은 제작이나 관람의 방식과 같은 ‘결과물’들로는 미디어 아트와 영화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들을 결과물로 삼는, 즉 극과 지각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 제작자나 관람자에게 위상과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같은 ‘원인’으로 구분된다. 그 원인이란 바로 신체(혹은 신체성)이다.

미디어 아트는 송신자의 신체와 수신자의 신체를 결합하고 연결하는 신체를 가진다. 그것을 우린 흔히들 “매체媒體”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러한 “잇는 신체”를 위한, 정말이지 위대한 풀이말이다. 이 때문에 미디어 아트에서 인간-기계 간의 바이오메카닉 결합을 주된 관심사로 다룬다. 인간신체들 간의 결합은 언제나 그와는 이종적인 기계의 매개작용을 요구하는 혈행이다. 반면 영화는 신체를 갖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니다. 여기서 배우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송신자의 신체는, 흥행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경험 자체를 위해서라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 대응하여 그의 현존을 입증할, 수신자의 신체가 영화 자신의 신체에 결정적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배우의 탈-현존화에 대해선 바쟁의 연극-영화 비교 연구를 참조하라). “추상”과 “감정이입”의 대비를 적용해본다면, 영화의 상대적 특성인 “감정이입”도 여기서 성립한다. 영화에는 추상충동을 불러일으킬만한 (미디어아트에서는 송신자가 보낸 신호로서 읽혀지는) “물자체”라는 것이, 최소한 스크린 너머, 카메라 렌즈 너머에 없기 때문이다.

필름스트립 개념에 관한 도해 _김 곡

영화의 대상, 카메라의 대상도 신체이며, 관객의 망막도 신체라는 반론이 예상된다. 하지만만짐이란 피드백이며, 피드백은 상호 반사라는 의미에서, 그 둘은 서로 만지지 않는다. 또 피드백이란 상호반사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관객은 “행동”하지 않는다. 미디어 아트는 바로 이러한 상호반사의 피드백에서 성립하며, 따라서 이러한 상호반사의 중심점인 “표면”이 그 신체로 갖는다. 벨루르가 현대의 매체는 신체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체들을 출현시키고 다시 소멸”시키는, “신체들 간의 이미지image d'entre les corps”라고 말한 것은 적당한 처사이다. 미디어 아트에서 “스크린”의 역할이 비로소 대두되는 것은, 그것이 이러한 “표면”을 자신의 신체로 갖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디어아트에선 그러한 표면의 넓이가 핵심변수이다. 스크린이 커버할 수 있는 규모 혹은 빈도수, 나아가 연장강도 내지 확산속도를 측정하는 포맷전환력 혹은 접근용이성 등등이 그것이다. 반면 영화에는 그러한 상호반사도, 피드백도 일어나지 않으며, 고로 그러한 표면도 없다. 영화의 경우, 상호반사나 피드백 대신에 흡수나 증발이 일어나며, 표면 대신에 그러한 밀도집합, 점집합을 갖는다. 극장에 들어서면 영화의 1막에서 우리의 영혼을 증발시키고 흡수하는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며, 영화가 미디어아트의 표면 이전에 가지는 “필름스트립” 즉 한편에는 죽음, 정지, 폐쇄를, 다른 한편으로는 삶, 운동, 열림을 표현하는 원자-끈이 바로 그러한 입자들의 집합이다. 피드백이나 상호반사와 구분되는, 필름스트립, 정지프레임들의 연쇄, 혹은 원자들의 확산 혹은 삼투압....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거시적으로라면, 주인공이 자신의 바닥(흔히 시나리오 작가들이 “미드포인트”라 부르는 것)을 치고 비로소 탈잠재화되기 위해, 디제시스는 “폐쇄”되어있어야 하며(하나의 거대한 원자....영화는 필름스트립의 구조를 가지는 한, 본질적으로 이미지를 원자화하는 경향인, 극구조를 버리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공시적으로라면, 진정 광화학적 주인공이라 할 필름입자들은 자신들을 “정착”(흔히 테크니션들이 현상과정에서 “픽스”라 부르는 것)시키기 위해, 베이스 위로의 고정점들을 결정해야 한다(미시적 원자들.....영화는 필름스트립의 구조를 가지는 한, 대상의 부재와 죽음을 기록하는 사진을 계속 요구하게 될 것이다). 영화의 경우, 반사가 있다면, -미디어아트와는 다르게-그렇게 흡수된 유령입자들이 스스로 일으키는 대류운동, 즉 죽음 자체 혹은 순수잠재성 자체에 대해 일어나는 초시간적 피드백인 것이다(우린 이를 위해 이미지와 내러티브와의 상관관계를 더 분석해야 한다. 그레마스를 참조할 것). 베르토프는 필름스트립이 죽음과 삶, 정지와 운동, 점과 선에 대해 취하는 역설적 구조에 대해 매우 적당한 설명을 한 바 있다: 영화의 경우 “간격”이란, 그것이 운동과 지속으로 측정되는 피드백과 미디어 아트의 경우와는 달리, 운동의 분해와 변곡점을 의미한다. 미디어아트가 베르그송적이라면, 영화는 본질적으로 라이프니츠적인 셈이다.

요컨대 미디어 아트와 영화 간의 차이는, 미학적 차이에 선행하는 생물학적이거나 차라리 골상학적인 차이이다. 스크린과 필름스트립 간의 신체적 차이가 그 둘을 구분한다. 스크린이란 신체는, 목표입자를 변형시키고 돌아가는 광선들의 반사면이며(하이젠베르그의 공식을 떠올려보자), 필름스트립이란 신체는, 마치 필름스트립을 스파게티 현상할 때처럼, 정지프레임들의 대류공간이다(필름농도곡선을 떠올려보자). 극을 도입하느냐 마느냐, 참여나 테크놀러지를 행동이나 지속으로 측정할 것인가 아닌가, 지각을 반사시킬 것인가 흡수할 것인가...따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체구조 상의 문제이지, 결코 그 역이 아니다. 미디어 아트도 이미지들을, 신호체계들을 결속시키는 끈이 있고(신호변환으로서의 필름스트립, “백남준을 보라!”고 외치며), 반대로 영화도 이미지가 역투영될 반사표면이 필요하다(프레임 표면으로서의 스크린, “고다르를 보라!”고 울부짖으며)는 반론은 부질 없다. 정작 중요한 차이는, 미디어 아트는 스크린으로 필름스트립을 만드는 반면(“윈도우” 혹은 “채널” 개념은 이로부터 온다), 영화는 필름스트립으로 스크린을 만든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다시 베르토프를 인용해보면, 영화의 현대적 이상은 “스크린 위의 상대성 이론”이다).

물론 이 두 신체의 공통점 또한 잊지 말자. 스크린이나 필름스트립은, 점점 자신을 투명하게 만든다는 데에 최근 합의했다고 한다. 물론 머쓱머쓱 체면치레도 할 겸,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디어 아트는 빛에 빛을 섞어, 비디오의 경우처럼, 백색광을 만드는 방식으로. 반면 영화는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 필름플릭커의 경우처럼, 섬광을 만드는 식으로. 그리고 이러한 느리지만 강력한 결탁의 은밀한 목표는, 표면=끈, 나아가 지속=원자라는 정식의 완성이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논하지 않은 것은, “현실화”와 구분되는, “개체화”이다.


글. 김 곡(영화감독) _albertkuim@hanmail.net

신고
TAG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 2009.12.07 1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판 도해 간지가 쩌네요. 인간의 손노동과 불멸의 마우스 의지.

  2. 2010.02.05 1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로운 서브젝트인데 김곡씨의 글은 영화-필름에 너무 치우친 듯 합니다. 글에서 미디어아트와 긴밀히 짝지운 '스크린'이라는 부분에서 영화-스크린에 대한 고찰은 이미 대세인듯합니다. 스크린으로서의 영화와, 미디어아트의 스크린을 생각해볼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