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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일, 음력으로 7월 1일. 육태진선생의 타계 이후 나는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이미 많은 생각을 해 두었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작품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같이 보냈고 누구보다도 그의 작품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감히 여겨 왔는데 막상 그에 대해 글로 옮겨 보자니 마음이 오락가락하여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글을 그의 작품론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웬지 인상론으로 흐를 것만 같고 단순한 회고의 글로 그칠것 같아 혹여 이 글이 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의 소인은 아직도 그의 죽움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남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지난 그의 각 작품들에서 어찌할 수 없이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작품제작과정상의 땀내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결코 땀내를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견해는 나의 마음이 그의 작품에 투영된 것이어서 그의 작품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육선생 또한 이러한 시각에서 자신의 작품이 보여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리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왜냐하면 땀내가 결코 예술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므로... 예술에 관한한 육태진선생은 그 지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행한다)


1. 내가 그를 처음 만났고 그의 작품을 최초로 목격한 것은 1984년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3으로 대학입학시험준비중이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육선생은 대학졸업작품준비로 바쁠 때였다. 나는 홍명섭선생과 백준기선생 아래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홍명섭선생은 육선생이 고3때 그림을 지도하셨던 스승이기도 했다. 당시에 그는 졸업작품준비 과정에 대해 조언을 듣기위해 빈번하게 옛스승을 찾았었다. 이때 보았던 것은 희고 길쭉한 형태의 매쓰가 강조된 작은 인체모형이었는데 이것은 추후에 크게 제작되어 졸업작품의 일부로 출품되었다. 나는 이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의 포트폴리오의 사진이미지를 통하여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학부 2학년 쯤일 무렵, 당시 윤갤러리에서 매년 여름철에 열렸던 <향방전>(<87향방전>)을 통해서였는데, 기억하기로 그것은 커다랗고 투명한 용기들이 주를 이루며 몇개의 기성 오브제를 바닥에 죽 늘어놓은 것이었는며, 그것은 그가 작가로서 데뷰하며 발표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러고는 육선생을 통 볼 수 없다가 한참 후, 정확히 1990년초에 그는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줄곧 해왔던 기념조형물제작일을 그만 두고 대전에 내려오고서야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그간에 그는 특별히 주문되어 제작된 고가구에 주로 인쇄물을 콜라쥬하거나 오브제를 결합시킨 독특한 작품을 행해왔는데 나는 그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고가구를 맞추기 위해 서울의 웬만한 곳을 다 뒤졌고 그 결과 그것들은 홍익대 근처의 어느 고가구제작공방에서 맞춘것이라고 들려 주었다. 이후 그의 주된 작품들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고가구들은 내가 알기에 모두 그곳에서 제작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버스로, 택시로, 기차로 그것들을 보자기에 싸서 서울에서 대전으로 직접 실어 날랐다. 그러한 불편함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만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가구를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믿었으며, 화물로 배달을 부탁해도 될법한데 그는 자신의 몸 외에 다른 수단은 신뢰하질 않았다.


이때 나는 그에게서 ‘리바이스 501’과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 <폭주기관차>, <성난 황소>를 배웠으며, 또한 시인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와 유하의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간다>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틈나는 대로 자신의 세대가 우리나라 최초의 영상세대임을 힘주어 강조하며 90년대 초의 신세대문화와 소비산업사회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견해에 대해 피력했다. 길을 가노라면 그는 늘 길거리의 모든 볼거리를 탐하듯이 훑고 다녔다. 풍경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게에 진열된 상품과 이것들로 철저히 치장된 젊은이들의 몸과 패션, 광고물들에서 그의 두 눈은 결코 떨어진 적이 없었다. 


2. 1993년 봄쯤에 그가 처음으로 개인 작업실을 가졌다. 3평 남직한 작고 허름한 곳이었지만 그는 꼼꼼히 페인트를 칠하고 그곳에 작품, 수집해온 인쇄물과 오브제, 자그마한 용구와 집기들을 배치했다. 그곳은 마치 상품이 가지런히 진열된 가게이상으로 치밀하고 간결하게 구성되어져서 뭐 하나라도 옮겨질 경우라면 순식간에 나머지 모두가 어색해질 정도로 완벽하게 짜여졌다. 어지간한 개인사에 대해서는 침묵하던 그였기에 내가 이때 그의 작업실 공간을 목격한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감각과 감수성에 대해 묘한 확신을 갖게 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후에 내가 그의 작업실 건너 방을 빌려 몇 년간 함께 작업실을 쓰던 시절, 어쩌다 그의 도구를 사용하게 될 일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도구가 있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사용 후에 정확하게 되돌려 놓아야만 했었는데, 이처럼 그의 공간에서는 나도 똑같이 강박적으로 되어 버리곤 했다. 빈틈없이 고려되어 선택된 나머지 숨을 조여 오는 어마어마한 고의성으로 똘똘 뭉쳐진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의 감각 앞에서 나는 너무나 헐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에게 한번 표적의 대상이 되면 웬만한 이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한번 물면 놓지를 않는다. 1996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을 앞두고 그는 전시 서문을 이광훈兄에게 부탁했는데, 몇 차례의 장시간 전화통화에도 쓰기 힘들다고 거절하는 그를 집에까지 찾아가 설득하여 결국 승낙을 받아 냈다. 아마도 부들부들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육선생에게 질린 나머지 광훈兄은 굴복한 것이다. 그 승전의 결과를 안고 작업실로 돌아와 안도해 하며 회심의 담배를 물던 육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이즈음 사진 찍기에 재미들이고 있던 나에게 육선생이 카탈록인쇄를 위한 작품촬영을 부탁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커지기만 하는 그의 두 눈 앞에 맞서서 나는 피로를 과도한 미소와 웃음으로 가장하며 그와 팽팽히 견뎌야만 했다. 나는 그날 죽을 고생을 했다. 또한 이때의 전시카탈록에 들어갈 인물사진을 위하여 사진가 김선철씨를 작업실로 불러 흑백인물사진 몇 점을 촬영토록 한 일도 있었다(그중의 사진 한 점은 육선생의 영정사진이 되어 버렸다).


3. 내가 가끔 육선생에 대해 생각에 빠질 때면, 이상하리만치 엉성하게 습관들여져 굳어진 조금 우스꽝스러운 그의 펜을 잡은 손모양이 떠오른다. 수전증을 동반하며 종이에 간신히 써낸 작품명제, 재료, 크기 등을 알려 주는, 손모양만큼이나 우습기도 하지만 또박또박하여 우습지 않은 그의 글씨체가 떠오른다. 또한 그의 손이 어떤 사물로 향할 때 스멀스멀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이 떠오른다. 나는 거의 그의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그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세련되 있다고 보여지기 보다는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지탱하여 버티고 있는 오브제로서 특이한 불안함을 느껴왔다. 왜 나는 엉뚱하게도 매번 그의 작품으로부터 그의 수전증을 느끼고야 마는 것일까?

그의 아슬아슬한 강박적인 감각은 그를 작품에로 이끌었던 힘이었던 동시에 매 작품을 언제나 힘겹게 만들어 내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작가가 작품을 행함에 있어서 목표하는 바에 완결성이 담보되도록 자신의 나태함을 허용하지 않고 철저해야 함은 작가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제일의 덕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육선생의 경우에 작가로서의 태도도 태도이지만, 굳이 그의 ‘감각’에 방점을 찍게 된다. 그의 촉수는 철저히, 언제나 오브제로 향해 왔다. 그래서 홍명섭선생은 이런 그를 두고 1991년 동숭동 토탈갤러리에서의 그의 첫번째 개인전 카타록 서문 말미에 그를 가리켜 마누라의 빤스끈이 작품에 필요하다면 이를 능히 쓰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그가 비디오작가로서의 명성을 더해 갈 때에도 손때로 베어있는 나무박스나 고가구들로 제작된 초기 작업들을 더 좋아했음을 고백해야 겠다. 그가 <파리애마(1991)>에서의 네온빛에서 <롯데월드(1992)>에서의 감속모터동력을 이용한 프로젝션을 통하여 비디오영상작업으로 점점 매체를 확장해 나가고 그에 따라 작업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더해 가면 갈수록 나는 오히려 그의 초기 작업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키워 갔다. 당연하겠지만 그가 비디오 작업에 몰입하면 할수록 그의 매력있는 손떨림은 점점 증발해 가는 듯 했고 그는 점점 자신의 작품에서 관객처럼 되어 버리는 듯 했다. 나는 한곳에 뿌리내려진 식물처럼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코를 박은 채 풀칠하고 어눌한 글씨를 새기는 그의 뒷모습이 웬지 더욱 그립다.


4. 그의 비디오 설치 영상들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선택된 흑백영상과 느리면서도 일정 구간의 계속된 반복운동으로 인해 그것은 지극히 물질화되어 있으며 모티브 또한 자신 이미지의 반복된 사용으로 인해 그러한 특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의 흑백의 이미지들은 단순히 과거에의 아련한 기억과 관련한 노스탤지어의 미감을 돋구는 촉매요소로서가 아니라 마치 오랜 시간을 통하여 균일하면서도 겹겹이 쌓여진 먼지의 층에서 느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의 누적으로 인해 고착화되는 물질화된 이미지로서 보여 진다. 느리게 반복되는 그의 이미지들은 환영으로 떠있거나 흘러가버리기보다는 구체화되어 결국 그의 시간은 물질화, 육질화 되어 버린다. 베르그송이 ‘물질은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총합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지금 그의 작품만큼이나 이를 여실하게 드러내어 증명하고 있는 예를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의 이미지들은 언제나 어떤 장치에 갇혀져 있다. 상자 안에, 고가구의 서랍 안에, 단종 된 흑백 티비 모니터 안에, 턴널 안에... 또한 그가 프로젝터에 의해 투사를 하여 개방된 형식을 취했던 몇몇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의 경우에서 조차 회전운동을 통한 투사를 함으로써 이미지는 환경의 내부벽면을 더듬으면서 그 공간의 폐쇄된 구조를 오히려 두드러 지게 한다. 그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닮아 있는 듯하다.

그에게 최종적으로 따라붙은 이름은 ‘비디오아티스트 육태진’이었지만 비디오아트라는 장르의 명칭이 육선생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질을 가리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은 편의상 비디오아트로 분류될 수 있겠고 영상이 그의 작품에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여타의 비디오아트와 비교해 볼 때 그의 작품들에서는 유독 간(間)장르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키네틱한 요소가 영상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영상을 얹거나 담아내는 오브제들의 제작과 선택의 문제, 극적인 효과를 강화하는 인스탈레이션적인 요소 등은 그의 작품의 간장르적 성격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전문비평가들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특징들을 한마디로 정언명제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쯤에서 내가 이 글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바, 그의 전 작품에 흐르는 특질을 ‘과잉된 시촉각을 통한 오브제에의 철저한 탐미’였다는 정도로 요약하면 무리가 될런가?


5. 처음의 우려대로 이글이 어쩔 수 없이 육태진선생에 대한 인상평과 개인적인 소회로 마감되는 듯하다. 구체적으로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추후에 찬찬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수년간을 대전의 비디오영상미술의 저변을 넓히고 이를 공고히 하는데 헌신해 온 것을 알고 있다. 대전 지역의 젊은 작가들과 후학들을 모아 DMAC(daejeon media art center)란 영상미디어연구단체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연구모임을 갖고 연례적으로 그 결과물들을 온, 오프 상에서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다. 그렇지만 나는 최근 2, 3년간을 제하고는 아쉽게도 이 단체 활동의 전 과정에 대해 직접 목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금 그의 희망과 목적대로라면 어느 정도 거두었을 그 성과에 대해 그를 알고 그리워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글. 허구영(작가) / ondalondal@hanaf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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