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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아키텍처-현대건축과 공간 그리고 철학적 담론_박영욱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7. 21. 20:23



지극히 근대적인 교육방식의 수혜자임을 굳이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간의 개념은 지극히 근대적, 혹은 전근대적이기까지 하다. 머릿속에는 절대적이라고 배웠던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수의 개념이나 과학에서 배웠던 무수한 법칙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제약한다. 공간에 대한 사고도 마찬가지이다. 기존 교육에서 공간에 대한 굳어진 사고방식이 자유로운 발상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교육제도에서 수학이나 과학을 등한시 했을 때, 현대에서 이야기하는 공간의 문제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현대과학에 대해서는 전혀 접근할 수 없는 현재의 교과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근대)과학에서의 공간의 개념은 뉴턴의 절대공간론에 기초하기 때문에 우리가 속한 모든 공간을 ‘절대적으로 균질한 존재’로써 인식하게 하고 기하학적 좌표평면위에서의 이상적(개념적) 빈공간으로 인지하게 만들었다. 물리학에서 시작된 개념인 이러한 절대공간론은 근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모더니즘 건축의 토대가 되었고 르꼬르뷔제, 루이스 설리반, 미스 반데로헤와 같은 신적 존재를 만들어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시발이나 피터 아이젠만의 해체주의 건축, 이후 현대건축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이 이 모더니즘 건축을 발판으로 삼았다.

공간을 다루는 건축에서의 이 일련의 과정은 20세기 건축담론에서 벌어졌던 끝없는 논쟁들과 함께하며, 이러한 20세기 건축담론은 꽤나 방대하고 복잡난해하기 때문에 현대건축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은 어지간한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다손 쳐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박영욱의 저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과 건축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위해 큰 맥락을 잡아주는 길라잡이가 될 만한 책이다. <필로아키텍쳐>는 20세기 건축담론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기보다는 근대건축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가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는지, 또한 그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현대건축에서의 사건들을 건축담론의 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각장은 개별적인 논문으로도 읽힐 수 있고, 5개의 장이 합쳐져서 근대건축에서 최근의 디지털건축까지를 아우르는 건축담론을 접할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대건축이 구현하고자 했던 공간론에 대한 철학과 그에 대한 반대급부성향의, 근대건축의 한계를 지적한 포스트모던과 그 이후의 건축에 대한 고찰을 꼽을 수 있다. 본문에서도 언급되듯이, 뉴튼의 절대공간론이 야기한 근대건축의 시각중심주의는 건축공간의 기하학적 투명성(실제적 투명성이 아닌)을 강조함으로써 공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미를 제거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표면성을 강조하거나 불투명성을 강조하는 건축물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논의는 앙리 르페브르가 제기한 ‘공간’의 개념과도 연관을 지을 수 있는데, 공간이 단순히 기하학적으로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시간과 경험, 역사와 사회적 의미가 부여된 존재로써의 공간에 대한 재인식은, 근대건축이 상실한 장소성을 복원시키기 위해 시도되었던 현대 건축물들과 맞물려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공간론에 대한 개념변화를 통해 읽어낸 현대건축과 함께 현대건축담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들뢰즈 철학에 대해 저자는 현대건축담론에서 명확하지 않게 쓰이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들뢰즈 철학에서의 다이어그램에 대한 이해가 부정확한 상황에서 비정형이나 주름의 문제를 성급히 연결시키는 오류를 많은 건축디자인 관련 논문들이 쏟아내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러한 지적은 비단 국내문헌 뿐 아니라 해외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며 현대건축 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중 하나로 인식할 수 있다.

<필로아키텍처>는 현대건축에서 등장한 넘쳐나는 건축담론들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건축이라는 범주에 속한 학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시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철학적 논의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현재에 이뤄지고 있는 건축을 이해하는 데에 좀 더 객관적인 입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좀 더 세밀하게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여본다.

■ 저자: 박영욱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칸트 철학에서의 선험적 연역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래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학위 취득 후 사회철학적 관심의 지평을 문화와 예술의 영역으로도 확대하였다. 대중음악과 예술사, 특히 매체예술 분야에서 폭넓게 공부를 하였으며, 지금은 건축 디자인의 방면에서 그 사회철학적 의미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고정관념을 깨는 8가지 질문』 등 다수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이미지의 정치학―리오타르의 ‘형상’과 ‘담론’의 이분법」, 「시각 중심적 건축의 한계와 공간의 불투명성」 등을 비롯하여 매체 및 매체예술에 관한 여러 논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