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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저항’의 결합-아방가르드, 노명우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8. 6. 12:32


아방가르드는 ‘새로움’과 ‘저항’의 결합이다  

요즘은 아니 나 자신을 ‘어른’이라고 생각한 뒤부터 줄곧, 나는 뭔가 답답하고 ‘이건 아니잖은가’라고 회의에 빠져있었다. 이력이 난 건지, 그 회의조차도 물린 탓인지, 나는 결국 먼지 쌓인 책들을 펼쳐들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노명우의 <아방가르드>는 그 같은 여정의 물꼬를 터준 몇 몇의 책 중 하나이다. 처음엔 그저 패션지의 상투적인 수식어가 되어버린, 본래의 궤도를 이탈한(혹은 그 위치를 박탈당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사회적 운명이 궁금할 따름이였다. 저명한 학자가 쉬운 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 글을 통해 이 복잡한 개념을 간단히 소화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효율적인 일인가. 이 얕은 발상을 뒤집어 버린 것은 ‘척후병, 전쟁의 전위부대’ - 아방가르드의 실체를 폭로하는 이 표현에 있었다.  

척후병! 전쟁 중 본대에 앞서 적의 동향을 파악하는 전위부대인 이들은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뛰어든다. 용감할 뿐만 아니라 본대와 홀로 떨어져 있는 상황까지도 감내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적의 동태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향까지 예측하고 예견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춰야 한다. 까닭에 승리로 끝난 전쟁의 영웅이며, 그 영토의 새로운 권력자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칭하는 ‘아방가르드’ 속에는 세련된 상품미학, 혹은 새로움이라는 낭만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위부대’였다는 기막힌 반전을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일상 어딘가로 억눌러버렸던 그 무엇인가를 꿈꿀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무언가 나의 무기가 되어줄 정신 하나를 찾은 듯한 흥분을 느꼈다. 비록 그 정신이 지금 모순에 봉착해 괴멸해가는 듯 보이더라도 말이다.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운동은 기존의 미학적 기준을 모두 거부하고, 이를 뒷받쳐주고 있던 예술 제도의 관습과 허점을 무작위로 뒤틀어버리는 작품으로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활동했다. 미래파, 표현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 데 스테일De Stijl 등 각각 유파의 경향은 상이했지만 이들은 모두, 보헤미안 같은 예술가들이 실상 평단과 기성 작가집단으로의 편입을 위해 치열한 ‘인정 투쟁’을 벌이고,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느라 사회의 변화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예술이 삶의 고통을 잊게해주는 ‘위안’을 주는 장식품으로 한정지워지는 것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창작의 주체를 고독한 개인에서 집단으로, 삶과 예술이라는 이분법에서 통섭으로, 화이트 큐브 밖 일상으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어떤 활동은 우스웠고, 또 어떤 작품은 너무나 적나라하여 무서웠다. 저자의 표현처럼, 이들의 작품은 냉철한 사회과학자들의 그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삶이 얽혀들어있는 맥락을 치밀하게 파헤쳐 재맥락화함으로써 불편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미 화가도 없고, 문학가도 없고, 음악가도 없고, 종교가 조각가 평화주의자 왕당파 제국주의자 무정부주의자도 없고, 사회주의자도 없고, 볼셰비키도 없고, 정치가도 없고, 프롤레타리아나 민주주의자도 없고, 시인도 귀족도 군대도 경찰도 정당도 없다. 요컨대 모든 어리석은 것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한다. 새로움, 그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만, 그 새로움이 더 썩지 않고 더 직접적으로 괴이하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본문 p85 재인용)

어느 한 구절도 생략해버리고 싶지 않은, 아라공Louis Aragon의 초현실주의 선언문의 일부이다. 없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한다! 직접적인 ‘새로움’을! 이들은 회의(skepticism) 속에서 패배가 아니라 실천을 끌어내고 있다. 어쩌면 이들의 실천은 기술과 인간/일상/문화의 충돌이 빚어낸 긴장의 순간에 일어난 - 여러 기회구조 속에서의 전략적인 선택이였다고 할 수 있다. 급변하는 사회, 특히 사진과 같은 복제기술의 등장으로 회화의 전통적 전유물이던 ‘재현’이 위기에 봉착하고, 기존 예술품의 유일무이한 ‘아우라’마저 이로 인해 붕괴되는 아노미 속에서 - 가진 것 없는 젊은 예술가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였겠는가. 하지만 이 ‘무서운 아이들 enfants terribles’ 의 저력은 자신의 선택을 믿고 주저없이 실천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자칫 자신이 속했던 틀 밖으로 영원히 추방되어질 수 있는 무모한 것이였다. 급진적 실천에 대한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파시즘의 탄압 속에서도, 유럽 정치의 보수화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다는 폭탄이었다. 우리는 메스꺼움, 분노와 소동을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다 속에서, 그렇게 명명하는게 가능하다면, 예술사의 하나의 단계만을 보려고 한다.”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모든 구성원들은 ‘현대 예술의 거장’으로 신화화되었으며 이들의 과거 활동은 미술관 안으로 진격하여, 다른 예술 작품들처럼 ‘작품’으로 거듭났다.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성공이 과연 아방가르드 운동의 목표였던가? 성공을 향한 도전이라기보다 도발이고 저항이였던 이 운동이 공식 문화의 일부로, 예술사의 한 단계로 전시실 한 켠을 장식하게 되었다면 - 그것은 진정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전장의 선두에서 아방가드르가 대척했던 적은 제도화된 예술이였다. 그러나 저자의 지적처럼 이들의 가장 강력한 적은 예술 외부의 시장경제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 예술시장은 순진한 예술가들을 시장의 파이를 키워주는 수급처로 삼았다. 제도보다 더 직접적이면서도 교묘한 자본주의의 전략은 기존의 제도, 기관들마저도 자신의 메커니즘 속에 포섭했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기구라던 박물관과 미술관은 이제 전세계에 체인을 내고 사업 중이며, 미술품은 주식처럼 투자의 수단으로 거듭나고 있다. 예술계의 이 같은 변화에 무방비했던 아방가르드는 그저 ‘새로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도발과 저항이 탈색되고 현대 미술의 걸작으로 거듭난 뒤샹Marcel Duchamp의 변기는 이제 소더비에서의 경매가로 뉴스거리가 될 뿐이다.

저자 노명우는 아방가르드가 ‘새로움이라는 범주와 저항이라는 범주가 겹쳐지는 유일한 장소’라고 말한다. 그는 이같은 주장을 통해 성공과 실패의 역설 속에서 척후병 아방가르드가 잃어버린 저항성이라는 무기를 되찾아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들의 새로움/ 특별함은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법이 아니라 전장터에서 투박하고 무모한 싸움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이다. 그들에 대한 개념사를 읽는다는 것은 그 같은 전쟁을 되짚어 보는 것은 물론, 오늘 우리(무서운 아이들^^)가 이어가야할 전쟁의 진정한 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전통의 무게에 눌리지 않았다. 회의를 힘으로 삼던 그들은 ‘긍정성’으로 회귀한 오늘의 예술에 맞서서도 저항했을 것이다. 그들은 민첩하고 용감하고 대범하게 적진에 스며들어 동향을 탐지하고 적의 약한 고리를 찾아 후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했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그런 꿈을 꾸게 만든다는 점이다.

글. 옥미애(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