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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think piece #1_ 영화에 관한 여섯가지 잡설_alic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3. 21:18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가 자신들을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매체는 텔레비전입니다. 영화도 그렇죠. 영화에는 백 년 전에 소설이 가졌던 역할이 보입니다. 빠르게 전파 가능하고, 유행에 민감합니다. 또 영화관은 사적으로 몰입이 허용된 장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그 감각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아름다운 추억처럼 간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마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매체는 바뀌겠지만 <시네마천국>의 감수성은 남아 있겠죠.

앨리스온 멤버들에게 있어서도 영화는 새로운 미디어 문화 예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소중한 리소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여 앨리스온에서는 각자가 흥미롭게 본 영화들을 독자들에게 추천해보는 코너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각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있겠지요. 앨리스온 에디터들의 추천작과 함께 과거 기억에 남는 영화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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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think piece' 는 앨리스온 에디터들이 다양한 미디어 문화 예술의 현장에서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내용들을 공유하는 코너입니다.


스피드레이서 (Speed Racer, 2008), 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 Warner Bros. Ent. All rights reserved.

분명 편집실에서 워쇼스키 형제가 '죽인다 죽여'를 연발하며 만들었음이 분명한 영화. 작년 영화계의 최대 기대작(여러가지 의미로)이었으나 3부작 시리즈화 자체가 무산될만큼 흥행에 참패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각을 마비시킬만큼 쏟아지는 형형색색의 색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
스피드' 레이서나 '' 레이서를 기대하고 있다가 실망하셨던 분들이라면 긴장을 풀고 '컬러 레이싱'에 몸을 실어보시길. 중력이 무시되며 움직임의 '논리적 서사' 자체가 무의미할만큼 창의적인 동선 설계는 마치 활동사진을 처음 봤을때 만큼의 흥분을 전해 줄것이다(라고 예상한다). 새로운 새대의 영상문법을 너무나 빨리, 그리고 치기 어리게 도입한 '새로운 영상문법' 영화.



나쁜 피 (Mauvais Sang, 1986), Leos Car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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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근본적인 자신을 발견했을 때 감동 받는다. 감격한다기 보다는 빠져든다. "나 자신이 저기에 있다." 현실이라면 감히 해내지 못할 것? 그런 카타르시스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무관하다. 이야기, 영상, 음악 등 내가 아닌 타인이 창조한 이미지는 내 신체에 달라붙어야만 실감이 난다. 잘못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중간자를 무시하는 태도다. 나는 그가 되거나, 그는 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나는 중간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언가를 전달하는 매질 입장의 나는 텅 비어있다.

영화는 그 간극을 발견할 수 있어 재미있다. 그래서 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김화백의 대사를 보는 느낌이랄까...)
형식으로서는 최저로 생각할 거다. 영화는 모든 예술형식을 담고 있지만, 또한 모든 세계를 담을 것처럼 묘사되지만, 거기에는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무한한 표현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내가 덧붙일 것은 너무나 적다.
그런 패턴을 제대로 알아 보지는 못하고 내가 아직 순진했을 때, 레오 까락스의 나쁜 피는, 내가 처음으로 강렬하게 맛봤던 미디어적 경험이었다.

분신들 ; 감독의 분신, 나의 분신, 내가 좋아하던 문화와 사랑하던 사람의 분신, 내가 꿈꿨던 것과 미워했던 것들의 분신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또한 그 모습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던 작중인물들의 분신이기도 했다.
그 분신들을 통해 영화는 피사체의 입장에서 조작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그런 이미지의 조작만으로 인간의 욕망이 매혹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 그때가 내가 스스로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관찰자를 의식하는 피관찰자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인지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그런 의식은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Wall-E (WALL-E, 2008), Andrew Stanton

© DISNEY/PIXAR. All rights reserved.


기술과 기계의 발전은 폭주기관차처럼 고삐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사람을 그러한 기계에 맞춰가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기계를 사람에게 맞춰가는 시기. UI UX등의 대두와 발전이 그 예일 것이다. Wall-E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배경인 엑시엄의 모습은 그 극단적 미래의 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사람에 맞춰진 기계들의 모습을 너머 이제 기계들 없이는 설 수 조차 없게 된 사람들. 인간의 쾌적한 삶을 위해 완전하게 컨트롤되는 환경 등. 그리고... 너무나 인간적인 기계 Wall-E, EVE, Mo와 기타 관리로봇들. 가장 기계적일 수 있는 캐릭터인 메인컴퓨터 오토마저도! 비인간적 기계의 모습이라기보다 딱 융통성없고 고지식한 관리자라는 인간적 냄새가 풀풀 풍긴다. 인간에게 편향된 융합. 그런 기계와 인간의 융합에서 발현되는 것은 기존의 차갑고 두려운, 기계적이고 냉철한 사이보그적 미래관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발현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시각. 세상에, 이야기의 결론은 무려 '돌봐주기 위해' 지구로 돌아가는 거랜다.

분명 지구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간신히 죽어있는 땅 위에 다시금 새 생명 싹 틔워놨더니 날 '돌봐주러' 귀환한다고? 제발 그냥 거기 있어!" 라고 처절히 울부짖었을 듯. 이렇듯 전반적으로 흐르는 시선은 지금까지의 미래를 주제로 했던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냉철하고 비판적인 디스토피아적 시각이 아닌 매우 이기적인,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그런 엉뚱한 시각이 미디어 아트적 시각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기술적으로 앞서나가고 신선하고 공감되며 효율을 따지는 모습이 아닌 쓸데없고 엉뚱하고 바보같은 시각을 통해 '새로움'을 생산해 내는 것이 미디어아트의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 가스 제닝스


©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Inc. All rights reserved.

 

상상력이 많으면 인생이 고달프다고 누가 그랬나요?

도를 넘는 상상력은 우리를 심히 즐겁게 하거나, 혹은 방바닥 한 구석에서 낄낄거리기라도 할 수 있게 해준단 사실을 아셔야죠.

당신에게 요즘 제일 잘나가는 아주~축적인~architectural보곤족의 우주선, ‘보곤스피어를 소개하고 싶어집니다. 우주에서 절대로 시를 낭송하지 못하게 해야 할 꾀죄죄한 목소리와 침범벅 비주얼의 완벽한 부조화의 결정체 보곤족이지만, 문서절대주의에 원칙주의자인만큼 그들이 만든 보곤스피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반듯한 큐브의 완벽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주건설업자인 그들이 사차원도로건설을 위해 지구를 해체하는 광경은 또한 절경을 지나 환상적이기까지 한걸요. 수많은 해체용 기둥들이 지구를 둘러싸더니, 순식간에아름다운 빛나는 초록별지구를 흔적도 없이 분해해버리다니, 실제로는 빛나지도 않는 초록별을 칭찬해왔던 무수한 지구인들은 이 장면에서 참으로 맘이 아팠을게 분명합니다.

기적의 무한대 운행법은 또 얼마나엣 지 있게우리를 한방에 우주공간을 뛰어넘어, 가고 싶은 곳으로 직행하게 해주는지 눈으로 확인하세요. , 이 짧은 이동운행동안에 털실이나 꽃으로 변신해서 운행종료시 입안에서 털실이나 꽃잎을 토해낼 자신이 있다면 말이죠(혹시 입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불상사를 맞이한다면 당신은 GG를 치며 우주생활을 마쳐야할지도 모르겠다는;;).

하지만 적어도 우주에선 귀에다 바벨피쉬를 꽂으면 그 어떤 언어도 들고 이해할 수 있으니, 외국어교육에 목을 매는 이 나라에서의 삶보다는 훨씬 윤택한 삶을 누릴수 있진 않을까요? 이런 연유로 전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삶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뭐 그 어느 곳이라도 이 대한민국만큼이나다이나믹한 곳은 없겠지만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 원작1979-92, 더글라스 애덤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의 개념들을 무참히 살포시 넘어가주는 센스를 보여줍니다. 분자, 시간, 공간의 개념도 어그러뜨리기 다반수죠. 이 황당하리만큼 과감한 이 텍스트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여러 층위로 나뉠 수 있고, 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단편화하는 것이 적절하진 않지만, 그 중 중요한 조각은 분명 패러다임의 변환이 가져올 수 있는 사고의 확장과 변화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현재 이용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은, 세계를 고정불변의 결정론적 세계론에 입각한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벗어나 전자기파의 불연속성을 주장한 막스플랑크의 양자론에서부터 시작된 결과물들입니다. 현대물리학은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져온 사고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더글러스 애덤스가 제시한 아이디어들은 그냥 보기에는 우스워보일지 모르지만 물리학이나 철학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해서 우리의 굳어져있는 사고를 전환하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가치가 있기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점심은 기적의 무한대 운행을 통해 은하수의 맨 저쪽 끝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우주바보 자포드 비블브록스와 성격있는 로봇 마빈, 그리고 알고보면 우주 제일 멋쟁이 휴마 카블라와 함께 하고 싶네요. 그럴려면 실타래를 토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죠?

 

 


詭絲: Silk (詭絲: Silk, 2006), 수 차오핑 

© TWNETIETH CENTURY FOX INC. TAIWAN BRANCH. All rights reserved.


아마도,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헐리웃 식의 공포물에 대한 지루함 내지는 실망감으로 공포물은 아예 선택도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모 무섭다고 소문난 영화들을 보면, 가면을 쓰고 나와 칼부림을 한다던가, 좀비가 되어 죽지않고 자꾸만 살아난다던가, 조금 더 괜찮은 경우를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인간들의 무지막지한 사건들에 기반한 소름끼치는 케이스들이 대상인 영화들이 많습니다. 괜찮은 공포물에 대한 의견들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식상한 공포물은 질색하는 편입니다. (특히, 좀비 등이 나오는 것들은... ...) 차라리 좀비물이더라도 극한까지 공포스럽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그런데, 오히려 극한까지 더럽거나 징그러운 것들이 더 많으니,,, 물론 징그러운 것도 충분히 공포스럽긴 합니다만...)

실크'라는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어쩌면 위와 같은 개인적 선호에 의해, 공포물이면서 SF장르에도 들어간다는 어색한 퓨전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만의 2006년작인 이 영화의 주요 스토리는 '영혼을 반중력 물질(멘거의 스펀지)로 포획'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전개됩니다. 이 무슨 황당한 논리인가? 라고 생각하기 전 영화는 귀신에 관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닌 탐구욕을 건드려 영화를 계속 보게 만듭니다. 물론, 영화 자체가 그리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어린 귀신 녀석의 개인사와 연결되어 식상한 스토리로 접어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만, 과학 기술을 통해 초인간적 존재, 혹은 정신적 존재와의 접촉을 시도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는 너무 좋았습니다.

미디어아트 작업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의 작업들이 더러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물론 경우는 좀 다릅니다만, 빌 비올라의 《교차 The Crossing(1996), 《의식 Observance(2002) 같은 작업은 작가가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신비주의 등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초월적인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더군요.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전 유희성이나 기술적 놀라움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러한 초월적 느낌 내지는 기존의 인간의 시지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업들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

여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영화를 보면서 제발이지 그러한 탐구정신만을 계속 유지하여라'하고 되내이며 봤는데, 결국 전설의 고향 구미호 수준의 클리셰로 귀결되는 듯 하여 마음이 매우 아팠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詭絲 을 왜 굳이 silk로 번역하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굳이 해석하자면, 기이한 선? 정도일텐데, 비단 실과의 유사성 때문인지(그렇다면, 의미는 어쩌라고..)

여하튼, 신기한 공포영화가 보고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미남배우 장췐?도 나온답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 2006), 호소다 마모루 

© 쓰쓰이 야스타카. 가도카와 영화 주식회사「시간을 달리는 소녀」제작위원회. All rights reserved.


우연히 과학실에서 타임리프를 얻게 되어 구르기 한판으로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로 이리저리 여행하던 소녀 마코토가 나온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다들 기억하실런지요. 시간을 여행한다라는 공상과학에서 나올 법한 소재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즐거움으로 가득찬 애니메이션이였죠. 저에게는 구르기를 쉬없이 하던 마코토와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의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가 가슴 설러게 했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2006년 나온 이 애니메이션을 몇번이나 반복해 보면서 입가에 웃음 지곤 했었죠.

이 영화 전체에는 타임리프라는 중요한 소재가 등장하는데요. 타임리프...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보기도 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나는 물건입니다. 이것만 있다면 시간을 자유 자재로 여행할 수 있는...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또 다른 나로 살 수 있는 거죠.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라는 생각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절대적 고정불변의 변칙 같았던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여지는 우리의 상상력에 깊숙히 파고 들어 예술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미디어아트 작가들은 시간속의 흐름을 작품 속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종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무수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죠. 그리고 영화에서도 시간이란 개념은 아주 잘 인용되는 소재겸 주제이기도 합니다. 타임머신 같은 영화에서도 기계를 타고 과거와 미래를 숑숑~ 다니며.... 하지만 지금까지 발달된 테크놀로지로는 이 시간대 밖에 머물지만 예술에서는 가능한 꿈을 꿀 수 있어 좋습니다. 내가 마코토가 되어 보는....ㅋㅋㅋ 웃긴 상상도 해봅니다.

이 영화에서의 명대사가 떠오르네요. 미래로 다시 돌아가는 치아키가 마코토에게 "미래에서 기다릴께~" 먼 미래에서 온 치아키 처럼, 미래에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날이 올꺼라 생각하며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_____^






* 본 리뷰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Warner Bros. Ent., DISNEY/PIXAR.,

www.theauteurs.com,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Inc., TWNETIETH CENTURY FOX INC. TAIWAN BRANCH.,

쓰쓰이 야스타카. 가도카와 영화 주식회사「시간을 달리는 소녀」제작위원회.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