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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_진중권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5. 14:47

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엮음/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로 잘 알려져 있는 진중권이 8명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을 만났다. 로이 애스콧, 도널드 마리넬리, 히로세 미치타카, 제프리 쇼, 후지하타 마사키, 사이먼 페니, 가와구치 요이치로, 최우람이 그들이다. 이 작가들은 미디어 아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들이지만, 유명한 작가들을 소개한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대중을 위한 미디어 아트 개론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디어 아트에서 논의되는 이슈들에 대해 고민해온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시원한 답을 주는 책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두려워하지는 말자. 이 책을 통해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에서만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개념과 사고들을 만나는 신선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로이 애스콧은 매우 높은 철학적 추상의 수준에서 디지털의 존재론과 인간론을 개진한다. 디지털 기술은 하나의 세계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살아가던 인간을 해방시켜, 다수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수의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가게 해준다. 그는 쉽게 변화하고 이동하는 오늘날의 인간을 나비에 비유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나비 정신이 모든 창조적 탐구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1세기의 자아는 생성적이고 창발적이어서 사람들은 세컨드 라이프라는 개념을 좋아하고 이처럼 변형적 인격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미디어 아트가 추구하는 목표와도 일치한다고 말한다. 통일된 자아를 부정적으로 보고 다중자아를 주장하는 것이 매우 혁신적이다.

도널드 마리넬리는 앞으로의 인생은 게임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컴퓨터 게임은 살아서 움직이며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대표적인 예다. 19세기까지 시각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회화였고, 20세기에는 영화였다면, 21세기에는 컴퓨터 게임이 모든 시각 매체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이미 경제, 문화, 군사,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진지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리넬리는 이미지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란 디지털 부족의 세대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대체했다고 단언한다.

히로세 미치타카는 공학자의 입장에서 가상현실과 혼합현실, 라이프로깅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등장한 새로운 영상기술들을 소개한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개발된 이 기술들은 동시에 예술가들의 손에서 표현의 매체로도 사용될 수 있다. 히로세는 자신이 참여한 디지털 공공예술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이 새로운 영상기술들이 어떻게 대중을 위한 예술적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히로세는 가상현실에만 존재하던 아바타가 앞으로는 홀로그램과 같은 형태로 공간으로 튀어나온 리얼 아바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로봇까지도 리얼 아바타로,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이해하는 시각이 독특하고 흥미롭다.

제프리 쇼는 이미 아날로그 시절부터 가상과 현실의 관계, 그 둘 사이를 넘나들 때 나타나는 신체 체험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요란한 기술적 현시에 그쳐 더 이상 미학적 새로움이나 예술적 감동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미디어 아트를 구제할 전략으로 ‘은밀한 구현’을 제시한다. 그는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대중매체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비판한 마리오 페르니올라를 인용하며, 미디어 아트가 화려한 대중적 엔터테인먼트나 대중매체가 주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암시한다. 미디어 아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최근 답보 상태에 빠진 미디어아트가 새로이 지향해야 할 미학을 보여준다.

후지하타 마사키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 맺는 방식의 불완전성을 말하며, 자신이 그 동안 해온 미디어 아트의 목적은 바로 그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밝힌다. 미디어란 원래 인간과 세계 사이를 조정하고 중재하는 도구이다. 후지하타는 자신의 예술적 실험이 세계와 인간의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적응을 돕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사이먼 페니는 미디어 아트를 실천하는 예술가이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경험에 기초하여, 기술과 예술의 융합에 따르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C.P. 스노는 ‘두 문화’ 사이의 융합을 말하지만, 두 문화의 융합을 위해서라도 먼저 그 둘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는 원래 개발될 때의 목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가령 컴퓨터 게임의 다수가 전쟁 게임인 것도, 원래 그 기술이 갖고 있었던 군사적 목적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기술과 예술 사이의 극복하기 힘든 간극이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비로소 둘의 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와구치 요이치로는 최초로 인공생명의 개념을 제시한 사람 중 하나로, 1970년대부터 컴퓨터로 살아 있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는 로켓 발사를 보며 외계로 나가는 상상을 했던 어린 시절이 체험이 작품의 기초가 되었으며, 언젠가 인류가 지구를 떠나야 할 때를 대비하여 생명을 존속시킬 목적으로 인공생명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성장 모델’에서 출발한 그의 생명 프로젝트는 최근 감정을 가지고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지모션’으로 진화했다. 인공생명에 일본 전통문화를 결합시키기도 했던 그는 생물학의 특수진화를 거론하며, 미디어 아트가 국제적으로 획일화되기보다는 지역적 고립을 통해 다양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최우람의 작품은 엄밀한 의미에서 ‘키네틱’에 속한다. 하지만 키네틱의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강력한 생명의 은유를 구사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로보틱 아트에 접근한다. 섬세한 기계음을 내며 정교하게 움직이는 그의 작품은 물리적 현존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친숙함으로 바꿔놓는 것이 자신의 예술적 목표라 말하는 최우람의 작품은 도시의 에너지를 먹고 자라는 기계생명이라는 허구의 서사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이 책의 구성은 8명의 미디어 아트 작가가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개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isAT 2008’에서 발표한 강의록과 인터뷰로 되어있다. (팁으로, 각 장 첫 페이지에 그려진 아티스트들의 초상화는 인터뷰가 이루어지던 현장에서 석정현 작가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즉석에서 그린 것임을 알려둔다.) 각 작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논점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배경 지식을 습득하며 찬찬히 읽어야 한다. 또한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의 특성상 도판과 짧은 언급만으로 작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작품을 입체적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책을 보는 중간 중간에 인터넷으로 작품의 동영상을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 책과 함께 미디어 아트의 신세계를 탐닉해보시기를...

글. 박하나(홍대 예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