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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_TAG 6. 미디어아트와 문학 | 미디어와 텍스트의 교차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0. 02:42

미디어는 모든 형태를 연결한다

미디어는 메시지

맥루한의 유명한 경구는 기술과 매체를 미학적으로 다룰 때 발생하는 예술적 효과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말이다. 미디어아트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기술이 인간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와 함께, 메시지의 유통 수단으로 생각했던 매체에서 오히려 내재적인 메시지가 발견되는 현상을 탐구해왔다. 시각예술에서 20세기의 모더니즘이 고전적인 모방론을 거부했던 결과처럼 미디어아트는 예술의 매체적인 속성을 드러내면서 표현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미디어아트 작품은 고정된 장소나 한 폭의 캔버스가 아닌, 비디오 파일이나 스크린 및 개인화된 디바이스까지 표현 매체로 삼는다. 매체의 확장을 단순히 기술과 매체의 발달을 뒤쫒는 양적 팽창으로만 볼 수는 없다. 미디어아트에는 기술과 매체를 다루는 인간의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비단 미디어아트 작품을 경험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각종 디바이스나 대중적인 미디어를 경험할 때도 발현된다. 그 의식에서 작품과 수용자가 놓인 맥락과 상호작용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은 미디어아트 영역의 다른 확장을 낳기도 했다. 그처럼 의식이 하나의 틀로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틀을 미디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미디어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개인의 소소한 취향도 미적 흐름과 연관시킬 수 있고, 일상적인 행위도 정치적인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듯, 재사용 가능한 ‘의식틀’ 역시 도구로 볼 수 있다. 그 정신적인 도구 중 하나가 문학이다. 각종 기술을 만드는 과학이나 시대정신을 만들 수 있는 역사와 동일한 부분이다.

문학과 문학적인 것

무엇이 문학인가.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미디어아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함만큼 문학도 그렇다. 다만 미디어아트로 문학을 바라볼 때 다음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미디어아트가 사람들의 실생활에 깊게 연관된 각종 기술과 미디어를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처럼, 문학 역시 실생활과 더 깊이 관련되고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새로 세우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읽고 쓰는 능력(Literacy)이 권력이나 지식인 계급에 밀착해 있었다. 지금도 문학적인 텍스트는 존재한다. 문학 작가들이 쓴 작품을 독자는 읽는다. 문학적으로 쓰는 경험에 뒤따르는 문학적인 읽기 경험을 통해 문학이 긍정된다. 그 긍정이 객관화되고 체계화되어 '문학' 장르로 정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쇄술로 인쇄 매체가 양적으로 증가했으며, 텍스트를 검증할 수 있었던 능력을 갖춘 비평가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비평과 아카이브가 없었다면 문학이라는 장르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는 그 양상이 변하고 있다. 읽고 쓰는 능력이 대중화되었고, 블로그 등의 표현 창구가 늘어났으며, 문학으로 인정받지 않은 서브컬처의 텍스트도 애호받는다. 우리가 아는 고전들은 과거로부터 엄선된 텍스트이지만, 현재는 그 기준 외의 텍스트도 아카이브된다. 또한 문학 자체의 위상이 변화했다. 시각 매체에 익숙한 흐름에서 굳이 문학이라는 형태로 남아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고답적이거나 실험적 시도 혹은 고전적 흐름도 지속되지만, 비단 서브컬처가 아니더라도 다른 매체로 전환이 용이한 팝 성향의 문학도 주류문학의 일부로 자리를 잡은지 오래이다. 그러나 과연 그 정도까지가 '문학적'인 텍스트일까? 

이 글은 미디어(아트)를 통해 문학을 바라본다. 여기서 보는 문학은 '책'은 아니다. 문학이 재매개된 미디어(아트), 혹은 미디어(아트)에서 문학적인 것과 유사한 지점이나 효과를 살핀다. 물론, 섣불리 이것들이 문학을 에뮬레이터한 미디어(아트)라거나, 문학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예술에서 표현의 폭을 넓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술에서 표현의 확장은 작가의 역할만은 아니다. 그 표현을 발견해내는 수용자의 역할, 특히 수많은 텍스트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선별 능력은 이 시대에 더욱 중요하다. 그 능력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경험이나 신문 기사 등 여타의 텍스트를 읽는 경험에서도 요구되는 것이다. 아울러 미디어아트는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긴장을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수단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텍스트로 읽거나 텍스트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즐거움과 유용함을 알고 있다.  이는 도해법(Iconography)이고 프레젠테이션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그리트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텍스트는 마그리트의 이미지가 가진 맥락을 살피는 것 외에는 명확한 답변을 내리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병치가 아직 효과적이라는 반증이다.

매체 안의 텍스트

글에 깊이가 있다는 말은 책이라는 물리적인 매체가 두께를 갖고 있는 데서 기인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실 책에는 한 장의 종이를 초과하는 깊이는 없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종이들의 묶음이지만, 그 종이들은 커다란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것들이다. 용지의 크기나 페이지의 순서는 텍스트의 흐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제책 기술의 규칙이나 읽는 경험을 위한 디자인적인 배려는 있겠지만, 특정 내용이 특정 페이지에 꼭 자리잡을 이유는 없다. 텍스트에는 텍스트 고유의 내재적인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에 쓴 글을 인쇄하거나 웹에 타이핑한다고 해서 의미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텍스트는 사념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발화되는 시점과 텍스트가 특정 공간에 위치할 때의 '환경'과 관계하면서 의미망을 구축한다. 그 과정은 순차적인 연결이 아니라 이미지로도 진행될 수 있다. 켈리그래피나 서예는 기록되는 필획을 통해서 메시지와 표현 행위의 일치라는 - 육체적 표현이 시각화된 - 가치를 지닌다. 텍스트의 의미와 텍스트를 담은 매체를 조화시키는 예는 옛 서양의 성경 필사본이나 우리나라의 활판인쇄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물들은 단순히 역사적 무게 때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중시했던 신앙심이나 미적 기준을 반영하고 있기에 더욱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과 발맞추어 제책 기술도 함께 발전했다. 과거의 물리적인 조판에서 현재의 전자조판까지 책을 디자인하는 일은 디자이너의 감각이 필요한 일로 인정받는다. 통상적인 북디자인은 표지의 일러스트나 내지의 레이아웃 정도를 고려한다. 이 정도로도 작품이라고 느낄만한 책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책을 경험하는 만족감은 더해주겠지만, 텍스트의 경험을 증대시키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텍스트라는 내용과 책이라는 매체를 결속시키려는 시도는 아트북이나 독립적인 매거진에서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을 텍스트의 의미를 고려한 디자인이라고, 즉 시각적인 맥락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다. 텍스트는 언어의 규칙이고, 그렇기에 그 규칙을 통하여 사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텍스트는 발화되고 들려야만, 기록되고 읽혀야만 의미가 전달된다. 문학에서 문자 텍스트만을 표현 수단으로 제한하는 경우라고 해도, 과거의 초현실주의나 미래파 그리고 다다이즘 작가들의 실천을 통해서, 텍스트의 의미와 폰트 혹은 레이아웃 같은 디자인적 요소를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의 작품을 영문 타이포그래피로 표현한 Peter Manson의 <ENGLISH IN MALLARMÉ>나 우리나라 시인 고원의 구체시를 미디어아트로 표현한 변지훈의 <정신병>을 보자. 아울러 Lionel Kearns의 작업에서도 매체 안에 놓인 텍스트라는 조건을 표현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때 파생되는 여러 효과를 볼 수 있다.


웹페이지 역시 무한한 면적을 가진 한 장의 종이다. 닻(Anchor)를 이용하면 웹페이지 내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그 이동은 링크를 통해 다른 주소의 웹페이지로 넘어가는 것과 차이가 없다. 각각의 웹페이지는 위계가 없다. 상위페이지는 하위페이지의 링크 목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웹상에서 하나의 웹페이지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지는 않는다. 소유라는 관념과 관리 면에서 편의성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분리된 페이지는 사용자의 선택권을 다양하게 만드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웹페이지라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점을 갖게 되어, 텍스트와 수용자의 관계가 고착될 우려가 있다. 단일 웹페이지 공간에서 수용자가 쓸 수 있는 닻은 일 대 일 대응이지, 분리된 페이지가 소유하는 링크 목록만큼 다양한 선택 가능성과 자유도를 주지는 못한다. 전자가 완결이 있는 게임북 같은 형태라면, 후자는 온라인 영영사전 안에서 헤매는 경험과 유사하다. 하이퍼텍스트가 의도하는 비선형성에 요구되는 시점의 다양성 혹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선택 가능성을 맥락으로 구성할 수 없다면, 비선형성은 해체성으로 드러날 뿐이다. 웹서핑을 끝냈을 때 사용자가 자신의 링크 기록을 되돌아보고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을까? 비선형적인 텍스트에서 읽기 경험을 선형적으로 구성할 가능성은, 비선형적인 텍스트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선형적인 텍스트만큼의 완결성을 갖는 일처럼 어려울 것이다. <도서출판 모단>이라는 작품은 인터넷 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릴레이 소설 형태를 가지고 있다. 비록 주제와는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에 진행도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관된 정서와 짧은 문장이 이어진 형태로 나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사람이 쓴 것으로, 해당 사이트가 애초에 의도한 다수의 창작은 아니다. 외국의 사례로 <A Million Penguins>은 2007년 2월 1일부터 3월 7일까지 위키와 같은 툴을 사용하여 거의 1,500명이 온라인 상에서 공동창작한 소설로, 실제로 펭귄 출판사가 출간을 했다.

텍스트는 웹 이외에도 개인화된 디바이스에 위치할 수도 있다. 모바일이나 아이폰, 혹은 킨들과 같은 전자책도 해당한다. 이들은 인터페이스나 조작성을 개선하면서 종이책의 익숙함을 능가할 정도의 편안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매체에 놓인 텍스트에서 웹 이상의 특이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물론 텍스트가 소비되는 새로운 유통과정으로 볼 수 있다. 아이폰과 같이 무선통신 기능에 휴대성과 인터페이스의 편리함을 겸비하고, 앱스토어라는 시장까지 마련되어 있는 경우는 텍스트는 물론 오디오북이나 코믹스까지 스토리텔링을 담은 다양한 형태로 작품의 유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의 텍스트는 유통방식이나 읽는 경험에 수반되는 인터페이스가 달라졌을 뿐, 문학적이라는 요소는 변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문학적으로 구조화된 텍스트가 아니더라도, 증강현실에서 지도나 촬영된 영상 곳곳에 정보와 태그가 삽입된 방식도 있다. 이 텍스트는 사용자의 선택과 행동의 패턴이 누적되면서 변화한다. 이 변화 양상을 미디어아트적인 시각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 이때의 텍스트는 인간의 행위를 신속하게 정보로 변환하여 아카이브할 수 있는, 표현과 처리과정에 간소하다는 점에서 특화된다.

정보화 & 시각화

Digital Poem from David Loscher on Vimeo.

이 작품은 제목과 동일한 'digital poem'이라는 문구를 타블렛으로 입력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컴퓨터는 텍스트를 데이터로 저장하고, 대응하는 기호의 이미지로 재생한다. 이 과정은 이미지를 처리하는 것과 같다. 다만 이미지를 구성하는 픽셀이 아닌 한 글자를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키보드를 통한 전기신호가 아니라 손글씨의 압력을 통해 필획의 이미지로 입력된 텍스트를 기호의 이미지로 재생하려면, 컴퓨터는 텍스트의 이미지를 텍스트 기호로 판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작품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출력하는 컴퓨터에게 이미지로 텍스트를 입력할 때 오차가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텍스트가 지시하는 사물과 약속된 관계인 것처럼, 컴퓨터가 사용하는 기호도 텍스트를 지시하는 관계에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하나의 행위를 통해 함께 보여주고 있다.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는 독일 작가 KH Jeron의 퍼포먼스 작품으로 프루스트가 쓴 동명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에니악 컴퓨터가 처리하는 과정을 세 사람이 시뮬레이션했다. 소설 텍스트를 펀치카드 입력으로 이진법으로 변환한 다음, 아스키 코드로 다시 변환하여 텍스트로 재생한다. 8시간 동안 250글자의 연산 과정을 끝낼 수 있었다.

tacit.perform[0] - highlights from Tacit Group on Vimeo.

태싯은 우리나라의 사운드 아티스트로 알고리즘 구조를 통해서 음악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의 관계를 밀착시키고,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영상은 2009년 8월의 공연 모습이다. 게임이나 키보드의 규칙을 응용하여 언어나 이미지를 사운드와 연동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표현수단이라고 여겼던 언어나 사운드 그리고 이미지를 하나의 구조로 연결시킨 점과 이를 시현하는 과정에서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보이는 점이 흥미롭다.

3D Library Data Visualization from Reza on Vimeo.

인간이 스스로 사용하는 미디어라는 개념만큼 스스로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네트워크라는 형태도 익숙해졌다. 정보시각화는 데이터가 확산되거나 연결되는 지점이나, 밀집이나 소멸 등 강조될 지점을 점-선-면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는 텍스트의 조합을 통한 의미의 생성과 그 조합 형태의 누적과 새로운 관계망을 통해서 이해의 범위를 확장하는 경험과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정보시각화의 형태들은 정보로 이해되거나, 다른 정보로 재가공되기 적합하도록 디자인된 텍스트이다. 정보시각화에서 텍스트는 증강현실에 삽입된 텍스트의 누적을 통한 가변성과 알고리즘의 구조도에서 보이는 규칙성을 함께 갖고 있다. 동시에 그 텍스트는 현실의 맥락에서 필요한 부분만 남겨진 텍스트이다. 3D로 표현된 이 정보시각화 영상은 측정 대상이 되는 데이터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측정 위치까지 함께 계산 가능한 환경을 암시한다. 그것이 가능한 환경이 프로그래밍 텍스트로 구축된 가상현실이다.

제한과 확장

텍스트를 경험하는 방식이 시각이 아닌 청각이나 촉각이 되는 경우가 있다. 먼저 점자책의 경우를 보자. 점자를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한 대안적인 텍스트로만 볼 수는 없다. 그들에게 점자로 텍스트를 읽는 방식은 자연스러운 행위다. 그 행위는 우리가 눈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과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 모습에서 점자로 표현된 텍스트 자체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점자를 읽어내는 맹인에게서 시각적인 텍스트를 읽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가 다소 감성적인 접근이었다면, 감각을 제한하는 미디어의 장점을 더 살펴보도록 하자. 오디오북의 경우에 과거의 구전문학이나 현대의 라디오와 이어지는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과거 음성언어에는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기도문이나 시구절에는 암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운율이 있다. 중요한 메시지는 상징어로 숨겨지거나, 특정 후렴으로 반복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구전문학의 전통은 주류 권력층이 기록하지 않은 민중의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풍문들에는 정치적인 유언비어가 있었고, 애초 의도와는 멀어지도록 중간에 가공되거나 첨삭되는 과정도 있었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텍스트의 리듬이라는 문학적인 속성은 옛 사람들의 기술(권력)의 제한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

초기의 전화와 라디오는 기능적 구별 외에 기술적 차이는 없었다. 특정 발화자의 목소리를 다수가 들을 수 있는 경험을 영상 송수신 이전의 제한된 기술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라디오에는 나름의 매체적인 합목적성이 있다. 가령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성우의 목소리 연기와 함께 음향 효과을 통해 극적인 몰입도를 높인다. 이는 감각을 제한하는 매체의 장점이다. 이 속성을 국가적인 통치수단으로 활용한 예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이 있다. 그러나 이 몰입을 수동적인 행위로만 볼 수는 없다. 인간은 스스로 사용하는 도구에 대해 언제나 어린애로 남아있을까? 특정 기술이나 매체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다른 감각으로도 표현 가능하다. 하나의 감각에만 호소하는 매체는 그 감각에 능숙한 사용자에게는 다른 감각을 활용 가능하다는 암시를 갖게 할 수 있다.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 이면의 맥락까지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암시가 문학에서 말하는 공감각이다. 그림으로 음악적인 것을 표현하려 했던 추상화가들이나, 음악으로 천체의 흐름이나 건축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IDM 계열의 음악도 해당한다. Aphex twin의 음악은 그래픽 엔진으로 리듬감을 가진 형태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

Aphex Twin -> 3D HD from andrew mahon on Vimeo.

오디오북의 경우 낭독자의 연극적인 표현에 몰입 가능하지만, 텍스트가 함께 있을 경우 읽는 경험의 몰입도는 배가된다. 외국어 공부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청각과 시각이 함께 작용할 경우 텍스트에 대한 집중이 높아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효과를 잘 보여주는 예로 미국 시애틀 공공 도서관의 [TumbleBooks]라는 서비스가 있다. 이 서비스는 초등학교 이전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150권 이상의 텍스트와 음성, 이미지를 활용한 온라인북을 통해서 영어 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랙티브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웹사이트로 http://www.inanimatealice.comhttp://www.dreamingmethods.com 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성향에 위트를 가미한 예로, Web Yarns의 작품 <주기도문>이 있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스토리텔링은 게임에서도 볼 수 있다. 서사 구조가 잘 마련된 게임은 수용자의 몰입도를 높인다. 그러나 게임에서 수용자가 구축하는 텍스트는 게임의 창조자가 마련한 구조만을 따르지 않는다. 수용자가 조작감을 중시하는 액션 성향의 게임에서는 게임 내에서 역할의 당위성은 종종 무시된다. 하물며 역할이 중시되는 RPG에서도 클리셰로 느껴지거나 반복되는 텍스트가 나타나면 무시된다. 게임의 수용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텍스트만을 선택한다. 이 능동성은 게임을 대하는 수용자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보여진다. 덧붙여, 게임에서 수용자가 구축하는 텍스트의 특이점이라면 각자의 경험이 다르게 기록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패키지 게임의 세이브 파일이고, 온라인 게임에서 가상의 아바타에게 누적된 역사이고, 잘 만든 축구팀이고, 대전 게임의 전적 혹은 스코어 테이블 같은 것이다. 게임의 수용자는 경험이 자신만의 텍스트로 잘 구축된다고 느낄 때 게임에 몰입한다. 이미 완결된 텍스트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감각의 제한이라는 요소는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 SNS나 개인적인 아카이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구글 보이스 등 음성메시지들로 소통 가능한 기술도 매력적이다. 텍스트가 음성화(녹음)되거나 신체화(녹화)되는 콘텐츠의 변환과 인간 육체의 기록이 병행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미 전화로도 음성사서함이 가능하고 녹음 가능한 기기는 많지만, 그 기기들의 단점인 아카이브의 불편함을 웹이나 아이폰 등의 플랫폼은 극복해준다. 모바일의 SMS를 재매개한 트위터나 미투데이 등의 마이크로 블로그에서도, 신속하게 표현 가능한 '짧게 제한된 메시지'라는 점이 의사소통을 실시간으로 원활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미지 바깥의 텍스트

Copyright is for losers | The film from Ninotchka art project on Vimeo.

이 작품은 영상이나 음악에서 일정량 이상을 베끼면 표절이 되는 규칙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영상이다. 수십 개의 영화나 음악에서 표절 기준에 미치지 않을 만큼만을 모아서 만들어졌다. 의도는 둘째치고서라도, 조각난 영상과 음악을 직조하여 서사적인 흐름을 만들어낸 수공예와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각 작품들 사이의 관계는 전혀 무관하다. 사실 이 작품은 자체적인 설득력보다는 시위라는 맥락에 놓여야만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초기 비디오아트가 보였던 영상문법에 대한 탐구와 유희성이 살아있다. 설사 그것을 일종의 제스처나 아우라로 모방했어도, 먼저 당시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작업 방식 및 감수성을 현재의 맥락에 맞게 재사용한 점, 그리고 카피레프트가 아니라도 무수한 창작물 사이에서 주체적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보여준 하나의 극단적인 예시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Múm "Sing Along" from Team G on Vimeo.

뮤직비디오는 음악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있는 뮤직비디오나 어레인지된 라이브 영상 정도가 아니라, 특정 음악이 가진 전체적인 감수성과 세부적인 리듬이 영상과 조응하는 과정을 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텍스트는 표현 대상을 고착화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이미지와 음악은 서로에게 자유롭다. 그것이 비논리적이라면, 그만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쾌도 크다. 이 영상을 텍스트로 설명한다면, 몇몇 코드들을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 신비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에서, 마치 광고처럼 강도 높은 장면으로 표현되는 비약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코드들이 영상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별반 차이도 없을 뿐더러, 특정 코드만을 주목할 중요성도 없다. 각각의 소주제들이 반복되고 화성을 이루는 순간 발산했다가 점차 사그러드는 음악의 형태와 유사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영상이 어떤 감수성의 형태를 전해줄 수 있다면, 이는 영상이 보여주는 내재된 의미적 맥락에 있지 않을 것이다. 내재된 코드의 의미가 아니라 그 코드들이 다뤄지는 영상의 편집 방식이나, 코드들이 표현되는 순간적인 폭발의 연쇄를 통해 수용자에게 작용하기를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텍스트가 존재한다면, 영상의 코드들에 태깅된 단어 수준이지 이 영상 전체를 재생할 수 있는 완결된 문단은 아니다.

나현 작가의 <실종 프로젝트>(2009)는 가상의 다큐멘터리를 구축하는 과정을 하나의 작품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가상으로 설정된 실종된 병사들을 추적한다는 목표가 교차하는 출발 지점을 따라서, 작가의 이야기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수용자는 읽어낸다. 수용자는 그것들을 읽지 않고 오브제로 바라보고 작가의 이야기가 완성된 한 권의 책도 마찬가지로 지나칠 수 있다. 이때의 전쟁과 실종된 사람들의 인생이라는 역사와 함께, 그것들을 묘사하고 추적한 기록 역시 이미지로 남는다. 이 작품을 미디어라는 속성 중 서사성을 강화하며 확장된 미술의 형태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만일 작품 내에 구축된 서사에 동참한다면 그 서사 경험은 각자의 삶과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다르게 보여질 것이다. 한편 이때에 수용자에게 존재할 텍스트 역시 문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작품에 쓰인 오브제들의 물성과 애초의 프로젝트가 가상의 다큐멘터리임을 상기하면 텍스트에만 의존할 필요성은 약화된다.

문학 바깥의 텍스트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처럼, 언어도 현실을 재구성한다. 미디어가 현실을 왜곡하고 능가할 수 있다고 우려되기 이전부터, 언어는 그와 같은 영향을 현실에 미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어는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이지 사물 자체는 아니다. 지금까지 이 글은 미디어가 텍스트와 관계할 때, 텍스트가 위치나 조건에 따른 '표현적 층위의 텍스트'가 변하는 양상과 그 맥락의 의미를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텍스트는 미디어에서 표면적인 이미지로 출력 가능한 표현 수단 중 하나일까? 미디어를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배후의 기술적인 텍스트일까? 두 지점을 일치시키거나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는 시도, 혹은 불일치를 오히려 강조하는 시도 등 다른 표현 방법이 앞서 살펴본 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문학적인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법론에서도 공존한다. 또한, 텍스트에 선행하는(혹은 뒤따르는) 텍스트, 즉 컨텍스트(Context)를 다루어야 하는 문학의 문제의식은 기술과 매체를 다루는 미디어아트의 출발점과 상통한다.

문학은 다른 미디어와 얽혀 있는 텍스트를 어디까지 문학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문학적인 텍스트는 종이책을 주된 매체로 삼아왔다. 현재는 텍스트가 담긴 매체가 다양화되었다. 그리고 매체는 스스로의 합목적성에 따라 사용하는 텍스트를 변조한다. 문학적 텍스트에 비해 심하게 변조된 텍스트는, 가령 통신체처럼, 방언으로 여겨진다. 그에 비해 일간신문에 연재된 소설은, 계간지나 단행본에 비해 플롯에서 국소적 리듬에 치중하는 특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으로 쉽게 엮일 수 있다. 물론 문학적인 텍스트에 기대되는 합목적성과 텍스트 자체의 수준이라는 평가 기준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미디어와 교차할 때, 알고리즘처럼 기술적 텍스트에 비해서는 비과학적이며, 시각적 표현에 비해 감각의 재현이라는 면에서는 불충분해 보인다. 이는 문학적 텍스트가 미디어에서 물화될 가능성을 얻은 동시에 받은 패널티이다. 그런데 문학적 텍스트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매체의 유통방식 변화나 서술이나 묘사적인 소재로 삼을 뿐, 문학이 텍스트를 다루는 형식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점은 한 명의 인간을 자아와 세계 사이에 있는 매체로 바라볼 경우, 자아의 타자화 및 세계의 내면화라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개인 서사의 재구축 가능성에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예술 장르 간의 통섭이 원활한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서, 텍스트의 매체적 합목적성을 점검하는 일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