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유석재의 다리놓기

[유석재의 다리놓기] 새로운 세계의 문을 두드리기 - 과학기술이 만드는 새로운 예술적 대상

aliceon 2010. 3. 5. 03:38
 
미디어 문화예술 채널 앨리스온(AliceOn)은 2009년 10월부터 다양한 매체 예술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두 번째 외부
연재기사는
[두 문화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젊은 과학도 유석재님의 과학과 예술 사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코너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좌) 클로드 모네 - 생 라자르 역 유럽 다리, (우) 생 라자르 역>

낭만주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는 유별난 기차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드보르작은 기차를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모든 열차 시간표를 외우고,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되면 기차역에 가서 기차가 오는 것을 지켜봤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심지어 그는 증기 기관차를 인간 정신 최고의 소산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기차에 대한 그의 동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의 <8번 교향곡>이나 <신세계 교향곡>에 기차를 연상시키는 많은 장치를 해놓았다.
 그러나 기차에 매료된 것은 드보르작 뿐만이 아니었다. 드보르작과 동시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기차나 기차 역, 철도 등은 최고의 표현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 주자 격인 클로드 모네는 <생 라자르 역>이나 <생 라자르 역 유럽 다리>와 같이 기차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19세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기차에 매료되었던 것은 기차가 예술가들이 파리 근교나 시골 지역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기차가 새로운 시대의 상징, 즉, 모더니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차를 그리며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시대정신을 그린 것이다. 이처럼 과학 기술은 예술에 새로운 표현 대상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각주:1] 이 글에서는 20세기와 21세기에 이루어졌던 과학의 발전이 예술적 대상을 어떻게 개척해왔는지 살펴볼 것이다.



<파울 클레 - 우주적 구상(Cosmic Composition)>


<(좌) 신의 눈 성운(NGC7293), (우) 1 달러 지폐의 신의 눈>

먼저, 시간대를 인상주의의 시대인 19세기에서 20세기로 옮겨 보자. 20세기에서는 파울 클레의 작품이 우리를 맞이한다. 위 작품은 파울 클레의 <우주적 구상>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그림 중앙에 밝게 빛나는 구체가 온 마을을 비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적 구상>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먼저 봤기 때문인지, 이 구체는 초신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체 바로 위로 시선을 옮기면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작품의 맥락에 맞게 생각을 해보면, 이 눈은 유명한 “신의 눈(Eye of god)” 성운일 것이다. “신의 눈” 성운이라는 별명은 성운의 모양이 눈과 매우 닮았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NGC7293이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성운은 1824년 이전에 독일의 천문학자 칼 루드비히 하딩(Karl Ludwig Harding)에 의해 관측된 것으로, 파울 클레가 그림의 소재로 이용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다. 만약 파울 클레가 신의 눈 성운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는 정말로 달과 별과 초신성과 성운으로 구성된 진짜 “우주적” 구상을 그린 것이다.(하지만 사실 더 합리적으로 보이는 해석은 빛나는 구체와 눈은 “섭리의 눈(Eye of Providence)”이라는 것이다. 섭리의 눈은 보통 퍼져나가는 빛과 함께 등장한다는 도상학적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추측은 굉장히 신빙성 있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재미있는 상상을 한 가지 더 해볼 수 있다. 파울 클레가 태어난 해인 1879년부터 그가 <우주적 구상>을 그린 1919년 사이에 관측된 초신성이 있는지 찾아보면, 운이 좋게도 하나의 초신성 관측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1885년에 관측된 S Andromedae(SN 1885A) 초신성이다. 운이 좋게도 파울 클레가 7살 때 밤하늘에서SN 1885A를 봤고, 그로부터 34년 뒤 유년기의 어렴풋한 기억이 무의식 중에 남아 <우주적 구상>에 스며들어 나왔던 것일까? 물론 실제로 이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이런 상상이 감상자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지적 유희임은 분명하다.

파울 클레가 실제로 “우주적”인 구상을 한 것인지 “섭리의 눈” 도상을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인지, 또는 그가 실제로 초신성을 본 것인지는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것은 파울 클레가 별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우주적 구상>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각주:2]



<NASA - “창조의 기둥(Pillars of Creation)”, 독수리 성운 사진>


우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술적 대상의 예를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이 사진은 독수리 성운을 찍은 것으로, “창조의 기둥”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창조의 기둥”이라는 이름은 이 곳에서 새로운 별들이 탄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각주:3]
그러나 이 사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상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독수리 성운은 2010년 현재 이미 파괴되고 없기 때문이다. 스피처(Spitzer) 우주 망원경의 2007년 초 관측에 따르면, “창조의 기둥”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정도 이전에 주변에서 일어난 초신성 폭발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창조의 기둥이 파괴된 뒤의 모습을 담은 빛은 2000년 후에나 지구에 도착할 것이다. 이러한 시간 차이는 우주적 크기의 모든 사건은 동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각주:4] 광속의 유한함은 우리에게 동시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른 지점에서 관측하기 위해서는 빛이 사건 현장에서 관측자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조의 기둥>을 보며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파괴된 성운의 잔상,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창조의 기둥>을 다시 보면 폼페이 유적이 떠오른다. 화산 폭발로 인해 순간적으로 박재된 옛 로마의 대도시의 모습에서 우리는 로마 문명의 위대함만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희생자들의 비극적인 표정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로마 문명의 위대함만이 아닌 대도시에 한순간에 몰아닥친 죽음과 몰락의 비극을 함께 보게 된다.

폼페이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되었을 때, 폼페이 유적은 당시 굉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잠바티스타 피라네시와 같은 예술가들은 옛 유적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으며, 유럽 귀족들은 “대여행(Grand tour)”의 주요 경유지로 폼페이와 같은 고대 문명의 폐허를 방문하였다. 스탕달은 폼페이 유적을 일곱 번이나 방문했고, 빙켈만은 폼페이 유적을 연구하여 “고대 예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를 썼다. 폼페이에 대한 빙켈만의 연구는 18~19세기에 꽃핀 신고전주의의 단초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기둥”이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폼페이 유적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더 멋진 사실은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넓다는 것이다. 새로운 곳을 관측할 때마다 우리는 상대성의 역설로 가득 찬 장소들을 항상 발견할 수 있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가늠조차 힘든 크기의 별이 빛나고 있으며, 현재의 과학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천체를 발견할 수 있다.


<김진욱 - 금 나노 입자 : 예술이 아닌 실제 연구를 위해 50 nm 금 나노 입자를 원자력 현미경(AFM)으로 찍은 사진. 그러나 이 것이 연구를 위한 사진인지를 모르고 본다면, 나노 세계를 찍은 이 사진에 미적 요소가 있음은 분명하다.>

이제 시선을 다시 옮겨보자. 약간은 작위적인 구분이지만, 대상의 크기에 따라 세계를 거시, 일상, 미시로 나눠보겠다. 인상주의가 주목했던 철도는 대표적인 일상의 과학적 대상이고, 파울 클레가 주목했던 우주는 거시 세계에 속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미시 세계이다. 미시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원자와 분자의 세계를 뜻한다. 미시 세계를 다루는 과학을 나노 기술(Nano technology)라고 하는데, 나노 기술은 머리카락 굵기의 수천~수만분의 일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나노 구조물(Nanostructure)을 다루는 기술이다.[각주:5] 처음에 나노 기술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바닥엔 풍부한 공간이 있다(There i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이라는 명언과 함께 시작되었다.[각주:6] 그 이후로 80년대를 지나며 나노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이미징 기술(Imaging technology)이 발달하며 나노 아트에 대한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했다. 특히 투과형 전자 현미경(TEM; Transmission Electron Microscope)이나 주사형 전자 현미경(SEM; Scanning Electron Microscope)과 같은 전자 현미경과 원자력 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cope)의 발명은 나노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촉진시켰다.



<Zihong Liu - “Landscape”>

이와 같은 나노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이어서, 예술적 감각을 가진 몇몇 과학자들은 나노 세계에서 예술을 하는 시도를 했고 그 것이 곧 “나노 아트(Nano Art)”[각주:7]라는 장르로 발전하였다. 실제 나노 아트에 속하는 작품을 살펴보자. 위 그림은 <Landscape>라는 작품으로, 미국의 재료 연구 학회(MRS; Mateials Research Society)에서 여는 “예술로서의 과학(Science as Art)”의 2008년도 수상작[각주:8]이다. 얼핏 보면 산을 그린 풍경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유기 박막 트랜지스터(OTFT; Organic Thin-Film Transistor)를 찍은 광학 마이크로 사진(Optical microphotograph)이다.

나노 아트는 우리에게 “색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는 “색”이라는 것은 사물에 반사된 빛을 보는 것이다. 반사된 빛의 파장이 길면 빨간 색을 보게 되고 짧으면 보라색을 보게 된다. 그러나 크기가 작은 미시 세계로 가면 우리가 보는 색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미시 세계에서 반사된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시 세계를 관찰하기 위한 대부분의 도구는 우리의 눈이 이용하는 빛 알갱이(광자, photon)를 사용하지 않는다. 미시 세계를 전자 현미경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빛 대신 전자(electron)를 보는 것이고, 원자력 현미경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빛 대신 힘(force)의 분포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노 아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색”이라는 개념에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색이란 무엇이고, 색과 형태는 어떠한 관계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술가들이 과학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은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과학자들에게는 일상이어서 너무나 진부한 것들도 예술가와 대중에게는 새롭게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고 있다. 과학적 대상을 예술적, 미학적 대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1. 앞선 글에서는 과학 기술이 예술에 새로운 표현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았다. 물론 예술이 과학 기술에 일방적으로 수혜만 받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연재의 성격상 과학 기술과 예술의 관계가 가진 한 쪽 측면만 살펴보겠다. [본문으로]
  2. 또한 과학적 지식은 본문에서 다룬 것처럼 작품을 해석하는 색다른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진에서 보이는 작은 어두운 부분이 별로 진화하게 될 원시성(protostar)이다. [본문으로]
  4. 사건의 동시성과 상대성은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 아이디어이다. [본문으로]
  5. 원래 나노는 10^-9 m 크기를 뜻하는 SI prefix 단위이다. [본문으로]
  6. 리처드 파인만의 예언이 대단한 이유는, 그 당시가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 역학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고, 미시 세계에서 작업할 수 있는 실험적 방법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7. 나노 아트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는 다음 URL에서 더 찾아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 나노아트 항목(http://en.wikipedia.org/wiki/Nanoart), 뉴욕 타임즈 기사 “나노 아트는 새로운 사진인가?(Is NanoArt the New Photography?)”(http://www.nytimes.com/slideshow/2008/01/17/technology/20080117_NANOART_SLIDESHOW_index.html/) [본문으로]
  8. MRS 웹사이트(http://www.mrs.org/s_mrs/doc.asp?CID=1803&DID=171434)에서 더 많은 수상작을 볼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