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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ion 정정주展 / JEONGJEONGJU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7. 1. 16:30



정정주 작가의 전시 소식입니다. 설치와 미디어를 이용한 독특한 작업을 하는 정정주씨의 개인전.
영상으로는 다 느낄 수 없는 정정주 작가의 작업들은 직접 봤을때의 감동이 남다릅니다. 꼭 늦지않게 관람해 보시길..^_^

2010년 오늘의 작가 정정주展

관람시간 / 10:00am~05:00pm

김종영미술관/  서울 종로구 평창동 453-2번지 2,3,4전시실
Tel. +82.2.3217.6484 www.kimchongyung.com

Illusion을 지각하는 또 다른 방법 ● 대개 미술은 특정한 대상이나 이슈를 가시화한다. 그러므로 미술작품은 장르를 막론하고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을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의 관계는 변화하고, 이 변화는 때론 매우 역동적이다. 그러므로 시각의 관계는 다양하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다양성을 생산해 내고 있으며, 이것은 주로 일상 혹은 보편화된 시각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작가 정정주는 이러한 시각관계의 역동성을 아주 조심스럽고 심도 있게 파고드는 작업을 수행해 왔다. 표면상 단순히 설치와 영상을 결합한 실험 정도로 보이지만, 그가 펼쳐놓는 '재현된 상황'은 시각의 주, 개체 간의 모순성과 양립불가능성을 극한의 양태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정정주는 도시와 집 등 인간이 조성하는 건축적 환경을 미니어처로 만든다. 아주 정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익숙했던 생활환경을 낯설게 보기 시작한다. 건축모형들은 우리가 그 안과 주위에서 몸으로 경험했던 환경을 조망하는 이미지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일종의 스펙터클을 형성한다. 즉 현실적 체험이 가상적인 양태가 되는 것이다. 이 가상(Illusion)은 현실을 비판적 거리에 두고 바라보게 만들면서, 때론 매우 불온한 비판적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그것이 지닌 축적의 비례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소유될 대상이라는 점을 명시함과 동시에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을 동시에 인식시켜준다. 이로서 앎과 소유이라는 일차원적 등치가 소멸된다. 또한 응시하는 시선은 건축 미니어처를 파고들지 못하고 궁금해 하다가, 그 속에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가 보는 외부로의 시선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을 인지하게 된다. 여기서 인지된 자신과 내부 그리고 육안으로는 막혀진 응시 간의 불일치가 파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관객에게 시선에 대한 보편적 신뢰를 의심하게 함으로서 심각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각의 주체를 보편자쯤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정당성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건축 모형들은 도시나 우리의 일상적 주거환경에 대한 다른 인식을 야기한다. 신체로 경험했던 공간이 시각적인 감각으로만 인지되는 것도 정정주가 설정한 카테고리다. 이 틀 안에서 일상적이었던 공간은 응시의 대상으로 축소 인식되고, 이 순간부터 응시는 건축모형 내부를 향한 호기심을 탑재하게 된다. 호기심이 바라보는 것은 인적이 사라진 노출된 도시성과 은밀한 내부다. 그러나 이 응시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정정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관객의 기대감과는 다른 것을 보게 한다. 건물이나 공간을 애써 들여다보는 시각주체인 관람자는 결국 자신을 보게 되고, 응시의 호기심은 거기서 멈추게 된다. 관객은 건축모형을 응시하는 자신을 벽에 비추어진 영상을 통해 확인하게 되며, 응시자인 자신이 오히려 응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 시각의 관계가 상대적이며 순환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즉, 주체와 대상이 뒤바뀌거나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각관계가 거울로 투영한 정체성의 확인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응시가 자신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건축모형 속에 숨겨진 카메라가 유도하는 시선의 방향이다. 즉, 작가는 그런 시각의 이동을 조작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이동이 끝나는 지점은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응시자가 우연히(작가에게는 계획적으로) 자신을 만났을 때이며, 이를 통해 정체성은 응시의 소요(逍遙)를 거쳐 만나는 매우 독특한 현상으로 부각된다. ■ 김정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