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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복제시대의 예술작품 _column

yoo8965 2010. 7. 6. 00:48


복제기술의 민주화


15 세기 이래 인쇄술의 발전으로 문자 정보의 대량복제가 계속 되는 가운데 산업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는 소리 정보, 그리고 영상 정보의 대량복제가 가능해진다. 문화연구자인 발터 벤야민이 주목한 기계복제나 미디어연구자인 마샬 맥클루언의 전기복제는 산업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원본과 다름없는 대량의 자동 복제기술을 뜻한다. 그러나 그 복제기술과 복제과정은 아직 전문적이다. 일정한 숙련과 전문 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까지 정보·지식에 대한 불법복제 해적질은 합법적인 원본 복제자와 크게 다름없는 전문 복제 수단을 갖춰야 가능하다. 오늘날 디지털과 네트워크 기술에 힘입은 정보자본주의 체제의 복제는 문자, 소리, 영상 각각 혹은 혼합된 정보의 동시적이고 분산적인 대량복제다. 대량성, 자동성에 더해 이전에는 부분적이었던 동시성이 이제 전면화되고, 중앙집중적일 뿐만 아니라 분산적인 복제과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복제 기술은 민주화된 대중 대량복제다. 숙련 노동과 전문 장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대량복제할 수 있는 것이다.

1950 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확산되기 시작한 복사기, 그 뒤를 이으며 나타난 자기 테잎, 씨디, 개인용 컴퓨터, 디스켓, 디비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복사기인 인터넷이 대중 복제기술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복제기술들과 함께 불법복제시대가 열린다. 즉, 이전까지 암흑상자였던 전문적인 복제는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이 그 행위를 유발하는 해킹의 대상이 되고, 해킹을 통해 복제기술은 민주화된다. 그래서 정보·지식의 불법복제 해적질은 전문적인 복제기술을 갖추지 않고도 원하면, 필요하면 누구나 할 수 있게 되고, 이제 복제는 불법이 된다.


저작권: 이용 통제에서 창작 통제로

15 세기 이래 대중 복제기술 발전의 궤적을 뒤쫓은 저작권은 1960 년대부터 문화예술의 향유 그리고 창조(성)의 영역에서 점차 핵심적인 위치로 부상한다. 복제에 대한 배타적 독점 권리로서 저작권(copy + right)은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사업가들이 불법복제와 맞서는 유력한 전쟁 무기가 된다. 그 양상은 보통 창작물의 유통과 배급 과정에 침입하는 전문 복제업자들과의 ‘전투’였는데, 1980 년대와 1990 년대 이후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의 확산으로 저작권 사안은 창작물의 유통과 배급을 놓고 벌어지는 사업가들과 대중 간의 ‘전쟁’으로 확산된다. 멀게는 1980 년대 초반, 가깝게는 2000 년대 초반부터, 수백이나 수천에 불과한 전문 복제업자가 아니라 거의 모든 컴퓨터와 인터넷 이용자 - 수십 억의 사람들이 또래 사이(p2p) 파일공유의 해킹기술로 죄다 불법복제 해적질을 하고 있으니 정보·지식 영역의 세계대전이 따로없다. 유통·배급 과정의 대량 불법복제를 막기 위한 정보·지식의 이용에 대한 통제로서 저작권체제의 강화는 더 나아가 낡은 창작 방식과 새로운 그것 간의 격렬한 ‘내전’으로 확대된다. 창작물의 소비와 공유의 이용(자)에 대한 통제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기존의 창작물을 참조하고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창작(자)에 대한 통제의 문제로까지 번진 것이다. 물론, 전문 교육과 그럴듯한 조건의 혜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도 손쉽게 베끼고 만들어 전파할 수 있도록 돕는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이 있기 훨씬 전에도 이용에 대한 통제와 창작에 대한 통제는 같은 문제다. 창작물의 가장 적극적인 이용자는 곧이어 뭔가를 만들어내려는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의 문화정치

기계복제, 전기복제에서 디지털복제로 진화한 복제기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이용된다. 그러다보니 주로 소프트웨어, 음악, 영화 산업으로 구성된 ‘저작권산업’의 거대한 ‘지적 재산’ 소유자들은 ‘불법복제’ 혹은 ‘해적질’을 “저작권 보호를 받는 재료에 대한 모든 비허가 복제, 배포, 이용”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모든 복제는 불법이다. 그리고 디지털 복제기술이, 수많이 많고 다양하게 존재하는 정보·지식의 이용 방식들과 함께, 허가받지 않은 복제도 가능하게 한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이용자가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미국으로 들어가는 길목(공항, 항구)에서 불법복제물과 함께 “전자 기기에는 테러·마약밀매·아동 포르노 등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담겨 있을 가능성" 만으로 내 디지털 음악 재생기나 노트북 따위를 불시에 열어보여야 하는 일을 당할 수 있다(“ 노트북 속 정보도 공개” 미 공항 과잉수색 논란, 한겨레, 2008.2.13). 그러다 종종 테러범이 될 수도 있다(Hollywood-Funded Study Concludes Piracy Fosters Terrorism, wired.com, 2009.3.3).

저런 일들은 다소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친다면, 일상의 대중문화에서 저작권의 전횡은 검열이 따로 없게 한다. 정치적 검열은 경제적 검열을 동반한지 오래고 저작권은 어느새 ‘통제사회’의 중앙탑에 자리잡고 있다. 단적으로, 그 제목도 절묘한 ‘미쳤어’라는 대중가요를 어린 아이가 따라 부르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가 인터넷에서 강제로 사라져야 한다. 이미 구글닷컴의 텔레비전(‘구글TV’)인 ‘당신의수상기닷컴’(youtube.com)에서 저작권 침해 가능성만으로 그 소유자들로부터 삭제 요청을 받아 즉시 삭제된 비디오들이 메사추세츠공대 자유문화 연구 프로젝트 웹사이트인 '당신의무덤'(youtomb.mit.edu)에 수북이 묻혀있다. 하지만 2005 년 전후에 ‘당신의수상기닷컴’(youtube.com)이 수많은 경쟁 웹사이트들 중에서 단연 두드러지면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하게 된 것은 저작권법 위반 비디오가 자유롭게 집결할 수 있도록 허용한 탓이다.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희소성과는 거리가 먼 정보·지식 생산을 위한 복제기술에조차 우리가 저작권법을 적용하는 것은 곧, 복제할수록 넘쳐나는 정보를 인위적으로 희소한 것처럼 만들면서 문화 생산, 유통, 소비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제기술의 결을 거스르고 풀뿌리 문화를 통제하는 저작권체제는 검열의 기능을 내재하는 제도적 장치다. 디지털 복제기술이 보편화된 오늘날 저작권은 더더욱 표현의 자유도를 줄였다 늘였다 조절하는 정치경제적 검열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함께 이용자들의 자유를 제약하고 통제하는 것에 맞서 이미 1980 년대 중반부터 ‘카피레프트’로 잘 알려진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 운동이 전개되어왔다. 만약 이 나라의 정부가, 마이크로소프트(M$)사에 윈도 운영체계와 사무용(office) 프로그램의 이용허락(license)을 받는 댓가로 매년 엄청난 돈을 지불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보가 몰래 숨겨진 뒷문(backdoor)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므로, 자유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적어도 공공기관에서는 필히 사용하도록
정책을 세운다고 해보자. 거의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브라질이나 인도나 인도네시아처럼 국제지적재산연합(IIPA)이 2010 년 2월 18 일 미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연례 보고서(2010 Special 301 Report)에서 외쳐대듯이 ‘악의 축’으로 내몰릴 수 있다. “소프트웨어 산업을 약화시키고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만 먹는 게 아니고 미국 종합무역법의 스페셜 301 조에 따른 무역보복 감시대상에 ‘등업’하게 된다. M$의 윈도와 같은 사유 소프트웨어의 대안을 모색하거나 대체재를 찾아 이용하는 일조차 통제하려는 이와 같은 일은 올해(2010년) 처음 벌어진 일이지만, 미국이 불법복제 해적질을 무역 협상과 연결시켜 압박하고 보복하는 것은 한국을 그 첫 시범타로 해서 1986 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때부터 음반협회, 영화협회, 소프트웨어산업협회 등에서 조사 연구해 제출하는 각국의 불법복제 해적질에 의한 어마어마한 손실액은 미국이 이들 나라에 곧바로 무역 보복을 가할지 아니면 일단 감시한다고 위협만 할지를 결정되는 기준이다. 그러나 1980 년대 후반부터 빠짐없이 발표하며 전세계를 위협했던 불법복제 손실액은 사기다. 미국 정부(정부책임처[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에서조차 그 손실액을 믿을 수 없다고 연구보고 한다(" 미 정부 , 해적질 ( 불법복제 ) 에 대한 연구가 엉터리임을 인정 ," 다섯병 안의 들레꽃, 2010.4.17). 미국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국내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발표하는 불법복제 손실액은 애초에 불법복제 해적질이 정확하게 얼마의 손해를 끼쳤는가가 중요해서라기보다 정보·지식·문화 상품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기 위한 핑계거리인 셈이다.


불법복제를 통한 이윤창출

지구적 사기를 통해 어떻게든 독점적 이윤창출의 지위를 지켜내려는 안간힘이 처절할수록 뉴미디어 신규 자본까지 저작권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띤다.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자본이 (아직) 아닌 어떤 신규 사업가들에게, 복제할 때마다 허가를 맡거나 수수료를 내야하는 저작권 보호가 생산(창작)의 비용을 상승시키고 새로운 사상과 상상의 확산 속도를 늦추고, 꼭 상관할 바는 아니더라도 저작권의 법적 보호와 집행을 위한 전체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에, 즉 자본의 보다 빠르고 유연한 순환을 위해서 경직된 저작권의 규제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가만보면, 저작권 같은 것 없이 산업이 형성·발전하는 경우들이 더 많다. 문화산업(창조산업)의 한 종목인 패션산업은 아예 저작권이나 특허의 보호가 없고, 해적질은 이 산업이 발전하고 혁신하는 방식 그 자체다. 미국의 얘기지만 문화산업 각 분야별 매출액을 비교해봐도 영화나 음반 보다 패션 디자인의 수익 규모가 월등히 높다(“Johanna Blakley: Lessons from fashion's free culture,” TED.com, 2010.4: 11:10 ~ 12:40).

뿐만 아니라, 불법복제 해적질은 시장 독점과 확대의 전략이기도 하다. 이전비용이나 검색비용이 큰 산업들의 경우, 잠금효과 때문에 불법복제 해적질로부터 더 큰 이득을 얻게 된다. 예전에 M$의 최고경영자가 중국에 갔을 때,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를 할 때 이왕이면 M$ 것으로 해달라고 말한 이유도 그것이겠다. 그리고 개별자본에는 손실이지만, 총자본에는 이득인 경우가 많다. 하나의 사업 영역 - 영화 - 에서는 손실이지만, 연관 산업이나 보조적 사업(캐릭터)에서, 혹은 전혀 다른 산업(초고속 인터넷 장비 업체)은 수익의 증가가 이루어진다(“What’s the effect of piracy to the economy? Nobody knows!,” TechnoLlama, 2010.4.16.). 또, 해적질은 그 사업가들에게 공짜 마케팅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참여하는 불법복제 해적질이 거개가 지배적 주류 상업 문화 콘텐츠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상업적 성공을 위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발적 마케팅 도우미가 되고 있는 셈이다.


공짜의 비용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지불하는 공짜의 비용은 막대하다. 불법복제는 문화산업 일반의 ‘근본독점’(radical monopoly)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복제 영화, 음악, 게임, 소프트웨어의 공짜 유통과 소비는 저작권 법제의 강화를 통한 자본의 독점, 검열, 통제에 맞서는 저항운동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반면, 문화산업(오락산업, 소프트웨어산업) 전체에는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근본독점’은 곧 예술다양성, 문화다양성을 죽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법복제 해적질로 얻는 공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불법복제는 지배적 주류문화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않으며, 자유 소프트웨어와 같은 대안적 생산 방식과 그 창착물을 더욱 주변화시킨다. 예술의 고향은 늘 중심이 아니라 변방인만큼 예의 예술은 대중의 불법복제 해적질의 혜택(?)을 받기보다 그에서조차 소외되기 일쑤다. 아예 없지는 않더라도 또래사이(p2p)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독립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다 가뭄에 콩 나듯 ‘대박’난 <워낭소리>가 영광스럽게도(!) 상업적 파일공유 사이트에 뜬 것이 반갑다 했더니,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그 귀한 손님들을 “디지털 악마”라 부르며 내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좋게 보아, 공짜가 대안과 독립의 예술을 위협한다는 취지의 액막이를 위한 몸부림이
었으리라.


창작의 제 1원리, 불법복제의 정치화

불법복제 해적질이 근본독점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디지털 파일공유, 아니 불법복제를 저지르는 우리, 그리고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대중 불법복제는 점점 정보·지식 자본의 축적 전술로 기능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보자본주의 혹은 지식기반 경제에서 그 상품화를 교란하고 위협하기도 한다. 복제는 이제 생산의 문제다. 사실 복제가 불법이 되는 것도 복제 자체가 생산이기 때문이다. 생산이 사회화되고 생산의 정치가 부상할 수 있기 때문에 불법화하는 것이다.

불법복제 해적질은 원래부터 창작의 제1 원리다. 물론 처음부터 ‘불법복제’나 ‘해적질’로 불리지 않지만 그 법적 잣대를 상관하지 않으면 창작 방법은 똑같다. 동화, 민요, 설화, 농담과 같은 구전의 집단창작이 그렇고, 음뽑기(sampling)나 되섞기(remix)가 또한 모방, 복제, 표절이다. 문화산업의 창작 방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망타진(One Source Multi Use)이나 다시부르기(remake)가 또한 모방, 복제, 표절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상(思想)과 상상(想像) 모두에 들어가 있는 상(想)은 생각하다, 닮다, 비슷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술 창작은 불법복제 해적질의 과정이고, 모든 예술작품은 불법복제물이다. 어느 편에 서있느냐에 따라 불후의 명작이 되거나 짝퉁으로 고소당할 뿐이다.

불법복제가 원래부터 창작의 제1원리였던데 더해 오늘날, 적어도 비판적 예술 - 아직 변방에 살고 있는 예술에 있어 창작의 제 1원리는 더더욱 불법복제 해적질이다. 불법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곧 불법예술이다. 오늘날 예술 창작 조건의 초기설정이 그렇다. 정치가 심미화되는 것과 함께 예술과 미학이 불법화되는 현재 상황에 맞서 우리는 벤야민을 따라 그를 뒤집어 미학의 정치화를 꾀하게 된다. 미학의 불법화라는 현재의 예술 창작의 조건을 아예 예술 행동주의의 전술로 삼은 ‘불법예술’(illegal art)처럼 말이다(이광석, [사이방가르드], 안그라픽스, 2010 참조). 그리고, 미학의 정치화는 오늘날 복제의 정치화를 의미한다. 복제의 정치화에는 두 가지 출발점이 있다. 하나는 역사상 (합법)복제와 불법복제를 갈랐던 저작권(법)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복제를 불법복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술의 위기와 저작권 철폐

예술정치연구자인 요스트 스미르스(Joost Smiers)의 [예술의 위기](커뮤니케이션북스, 2009)를 보면, 오늘날 예술의 위기는 문화·예술 표현의 다양성이 축소되는 경향을 가리키는데 저작권(법)은 그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심화시키는 핵심 요인이다. 저작권법의 강화(보호기간의 연장 등)의 근거로 제시되는 예술가에 대한 보상과 창작의 유인(incentive)과는 반대로 저작권 제도가 예술가들이 먹고 사는데 그리고 다음 창작을 준비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여러 연구들이 인용되어 있다. 예술가들을 직접 고용하거나 그들과 외주제작 계약하는 문화복합기업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미르스는 저작권법 자체와 문화복합기업의 독점 지배를 모두 철폐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장의 제목은 “저작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인데, (예술가들의) 저작의 권리를 보호해줄 것만 같은 것은 지금의 저작권법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이 저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작권법이 강화될 것이 아니라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체제 내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일단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사회 혁신과 발전을 위해 저작권과 특허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제기한 바 있다(“특허 및 저작권 법 폐지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Economists Say Copyright and Patent Laws Are Killing Innovation; Hurting Economy],” foog, 2009.3.12.). 익히 알려진 창작공유 이용허락(creative commons license)의 첫 최고경영자였던 로렌스 레식 역시 시장 자유주의자였으니 놀랄 일도 없다. 그러고 보면 저작권 철폐가 과격하게 들리지만, 과도하게 강화되고 과잉 보호된 것을 본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일뿐 사실 그 자체로는 뭔가 더 나아지거나 할 것도 없
다.


모든 복제는 불법복제다

복제의 정치화를 위한 또 하나의 (동시적) 출발점으로, 이미 현실의 지배논리가 억지를 부리는 바 그대로, 순순히, 모든 복제를 불법복제로 받아들인다. 우리 모두는 불법복제를 일삼는 범죄자이고 우리 모두는 테러리스트다. 불법이 아닌 복제가 있음을 설득하고 저작권법 상의 예외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저작권 체제를 그대로 둔 채 복제, 미학, 예술, 문화를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한다. 반대로 모든 복제를 불법복제로 인식하고 자인하고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질문은 ‘불법복제’를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적 재산? - 정보와 지식이 왜 재산이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 공동의 창조성과 문화·예술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상품이 되어야하는가로 되던져진다. 그리고 문화예술 영역에서 생산의 정치가 부상할 수 있다.


글. 조동원 (미디어운동/문화연구, dongwon@riseu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