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유석재의 다리놓기

[유석재의 다리놓기] High+Low

aliceon 2010. 7. 28. 10:50


미디어 문화예술 채널 앨리스온(AliceOn)은 2009년 10월부터 다양한 매체 예술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High+Low

 디지털 기술은 근본적으로 낯선 것이다. 아무리 현대인들이 삶의 많은 부분을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낯선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태어나서 어느 시기가 되면 디지털에 입문해야 하며, 디지털에 입문하고 그것에 숙달되어 그것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는 단계에 이르러서도 디지털 기술이 끊임없이 배움을 요구하는 것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pc 통신에 익숙해지니, 인터넷에 익숙해져야 하고, 인터넷에 익숙해져야 하니 스마트폰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는 디지털이 완성된 것이 아닌, 끊임없는 자기 혁신(self-innovation) 과정 속에 존재하는 진행형의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질은 디지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에게 디지털이 우리에게 낯선 것이 되도록 하고, 디지털 기술에 소외된 사람을 만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시골 사람보다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제 3 세계 국가의 사람들보다는 서구와 그 반주변부 국가들 사람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디지털의 사용에 대해서 우위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현상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예술 교육만을 받아 온 예술가들도 이러한 디지털 디바이드에서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디바이드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늘날 사용자가 디지털 기술을 배우고 사용하는 방법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낯선 공간 속에 다소 뜬금없이 홀로 떨어져서 불친절한 매뉴얼을 손에 들고 하나 하나 익혀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디지털을 배우는 데에 있어서 기존의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디지털을 삶의 맥락 속에서 구현하고, 이를 통해서 디지털을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려는 시도가 디지털과 만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낯선 디지털”을 “익숙한 디지털”로 만드는 시도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보다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도입하거나 조금 더 친절한 튜토리얼을 제공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방법이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디지털 환경을 구성하는 재료를 금속이나 실리콘과 같은 일반적인 전자 재료에서 직물, 종이, 염료 등과 같이 전통적인 재료로 바꾸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 디지털 기술을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른 문화 속에서 구현할 수도 있다. 현대인이 아무리 디지털 친화적(digital-friendly)인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디지털 기기를 접하는 시간은 천이나 종이나 펜과 같은 전통적인 비디지털 재료들을 만지는 시간에 비할 수가 없다. 또한 성장 과정에서 핵심적인 시기인 유아기에 우리는 디지털 기기를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디지털 재료를 다루는 것보다 전통적인 재료를 다루는 데에 더 익숙하고, 더 빠르게 배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익숙한 비디지털적인 방법 속에 디지털 기술을 융화시킨다면 어떨까.


<lilypad screwed into the wall - Leah Bucheley>

 이러한 문제 의식 아래에서 전통적인 맥락 속에 디지털 기술을 융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MIT media lab의 Leah Bucheley 교수이다. 그녀는 하이-로우 테크 그룹(High-Low Tech group)을 이끌면서  IT로 대표되는 하이 테크(High tech)와 수공예, 전통 예술과 같은 로우 테크(Low tech)를 융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 그룹이 추구하는 철학은 “기술의 민주화”이다. 즉, 기술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진입 장벽을 낮춤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 그룹은 친숙한 소재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하는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즉, 직물, 종이와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를 디지털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다음 사진을 보자.


<“Tilt Sensing Quilt” - Hannah Perner-Wilson>



<전도성 실>



<전도성 직물>


 아마 이 작업이 하이-로우 테크 그룹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Tilt Sensing Quilt는 위 그림과 같은 전도성 실, 전도성 직물, 전도성 염료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와 하이 테크가 융합된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든 일종의 센서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퀼트 작품이면서, 동시에 경사를 파악할 수 있는 센서 퀼트(sensing quilt)를 통해 표면이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지도를 파악할 수 있다. 미국 전통 문화사에서 퀼트가 차지하는 역할과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하이-로우 테크 그룹에서 하고 있는 작업들이 전통 재료 및 문화와 하이 테크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lectronic Popables - Jie Qi>

 이 밖에도 이 그룹에서는 기존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작업에 자주 사용되는 아두이노(Arduino)의 직물 기반 컴퓨팅 버전인 릴리 패드 아두이노(LilyPad Arduino)를 제공하기도 하고, 팝업북에 전도성 재료를 도입한 일종의 일렉트로닉 팝업북인 Electronic Popables(이는 Columbia 대학의 학부생인 Jie Qi가 하이-로우 테크에 인턴으로 와서 만든 작품인데,  다음 링크를 따라 가면 Electronic Popables에 대한 그녀의 보고서를 볼 수 있다: http://web.mit.edu/~jieqi/Public/DREU_Site/Jie_Qi_DREU.pdf)과 같이 전통적인 재료와 디지털 컴퓨팅의 융합을 활발하게 시도하고 있다.
 MIT 미디어랩 어드미션 페이지에서 하이-로우 테크 그룹이 원하는 학생 유형을 살펴보면 이 그룹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알 수 있다.
 “기술로 다른 사람을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게 돕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스킬은 필수적이고, 지원자는 다음과 같은 경험들을 가져야 한다 : 전자 공학, 전통 공예, 산업 디자인, 재료 과학, 교육 공학, 기계 공학, 사회학/인류학, 오픈소스/DIY 개발, 직물 디자인, 패션 디자인“
 하이-테크 그룹에서 공고한 학생 유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그룹은 궁극적으로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사용자 각자의 문화에 맞는 디지털 기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 같아 보인다.



<옥토퍼스 - 이삼웅>

 이러한 시도들은 단지 하이-로우 테크 그룹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건축 분야에서는 전통 건축의 방법론과 최첨단의 현대 건축 기술의 협업이 낯선 것이 아니고, 얼마 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바젤”에서는 유리 섬유 강화 플라스틱 바디에 전통 자개로 장식된 의자인 “옥토퍼스”가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하이 테크를 사용자에게 익숙한 맥락 속에서 구현하려는 선구적인 노력일 것이다.
 1960년대 루이스 멈포드가 인간 중심성, 다원성, 생태적 복잡성을 가진 민주적 기술(democratic technics)을 정의내린 뒤로 민주적 기술에 속할 수 있는 많은 기술들이 연구되어 왔지만, 전통 문화와 하이 테크의 융합은 그것이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술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는 시도일 것이다. 특히 예술 분야가 다른 분야에 가진 파급력과 선도력을 생각한다면, 예술 분야에 있어서 하이 테크와 로우 테크의 융합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거창한 말들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하이 테크와 로우 테크의 만남은 예술에 있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의 최전선으로서 예술 분야의 역할이 기대되는 까닭이다.


* 가볼만한 사이트
 [1] MIT media lab High-Low Tech group : http://hlt.media.mit.edu/
 [2] HOW TO GET WHAT YOU WANT : http://www.kobakant.at/DIY/
 [3] Fuller Craft Museum : http://www.fullercraft.org/
 [4] Arduino : http://www.arduino.cc/
 [5] LilyPad Arduino Flickr group : http://www.flickr.com/groups/lilypad_ardu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