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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뷰] Lig 아트홀 "사운드 디자이너" 공연에 대한 단상 II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9. 21. 18:23


이번 글은 Lig 아트홀 "사운드 디자이너" 공연을 관람한 분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운드 아트와 이번 공연에 대한 글 입니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아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사운드 아트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을 들어보았습니다. 

※ 위의 사진은 Lig 아트홀에서 제공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내가 생각한 사운드아트와 이번 공연

 


2008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는 LIG 아트홀의 작곡가 시리즈의 일환인 이번 사운드 디자이너 공연 중 첫 번째 공연, 수환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공연에 앞서 찾아보았던 그의 이력, 그리 유명하지 않았지만 밴드 활동을 하며 낸 몇 장의 음반, 대부분 부러워 하는 대기업 직장 경력을 뒤로 하고 홀연히 음악계로 복귀한 그의 행보가 다소 흥미로웠다.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음악에서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프로그래밍 언어란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사용되는 사람과 컴퓨터 사이의 언어로, 내부적으로 기계가 이해할 수 있게 바뀌게 된다. 

 

무대를 접하게 된 첫 느낌은 생각보다 단촐하다는 것이었다.  컴퓨터를 활용한 이런 형태의 공연은 대체적으로 많은 공간과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악기는 컴퓨터에 구현된 가상악기와 합성음을 이용하여 소프트웨어 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인 것 같다.  클럽에서DJ들이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잇는 바로 그 맥북이 한대 놓여있었고, 마스터 키보드와 영상 제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큰 모니터가 보였다.  무대에서 그는 컴퓨터 한대와 노트북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영상을 제어하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입력한다.  오늘의 이 공연은 작은 주제들을 하나씩 스크린에 보여주며 관련된 소리들을 짧은 루프(Loop) 속에 섞어가며 시작 되었다.  다양한 음색의 합성음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귀를 채워준다.  낡은 타이핑 소리와 전자회로에서 나는 고주파음이 섞여서 들리고,  하나 둘 다른 음들이 더해졌다 빠지면서 난해한 느낌을 주지만, 희한하게 어울려서 리듬감을 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스크린에 연주자의 컴퓨터를 비추었고, 거기에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문자열로 채워진 창이 하나 있었다.  그는 거기에 한줄 한줄 입력하며 때로는 인자(Parameter) 숫자 값을 조정하며, 때로는 미리 짜놓은 코드를 복사해오며 하나 둘 소리를 나열하고 있었다.  필자에게 그러한 코드들은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생소할 수도 있겠다.  주파수의 높낮이, 길이 등을 짐작하며 연주자의 타이핑을 보는 것은 흡사 여느 컴퓨터 개발자 세미나에서 보던 풍경과 같았다.  코드들이 더해지면서 어떤 음은 빠르게 어떤 것은 그보다 느리게 동작하며 하나의 패턴을 이루어 묘한 느낌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언젠가 한번 봤을 법한 오래된 애니메이션과 영화 장면의 부분 부분을 편집하여 보여주는데, 그 장면에서의 느껴지는 긴박감, 쾌감 등의 감정이 콜라주 되어 귀에 들려지고 있었다.  낯선 전자음 만의 조합으로 이런 형태의 음악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명의 출연자가 더 나와서 장비를 만지며 소리의 방향, 강도 등을 노브(Knob)를 조절하였고, 이들이 섞여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1시간 남짓한 공연은 어느덧 끝나게 되었고, 사람들의 박수 속에 무대를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평소 전자음악이라고 하면 클럽에서 나오는 일렉트로닉 음악만을 떠올렸던 것은 필자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물론 그러한 음악에 전자음들이 효과적인 양념이 되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자음악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었다.  이번 공연은 그것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개념을 가져다 주고 새로운 가능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공연이었던 것 같다.  물론 대중적이고 쉬운 음악은 아니었지만, 공연을 주도하는 연주자가 이렇게 패턴들을 조정해가며 들려주는 이러한 형태의 라이브는 꽤 매력적이었다.

 앞으로 전자 음악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성장하여 장차 문화적인 발전의 한 축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전자음악이 이번 공연과 같은 기회로 좀더 가깝고 흥미있게 다가갔으면 좋겠고, 세계 속에서 빛을 내며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가까운 미래를 기대해 본다.


                                                                                                                                                           글. 조태훈 



사운드아트에 대한 나의 생각

소리라는 것.

그것은 익숙하고도 때로는 낯설게 다가오는 우리의 삶에 동반자 같은 존재이다. 그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형식으로 재창조 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표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 방법의 하나가 사운드 아트이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다. 자연과 일상의 소리,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소리들. 그 방대하고 많은 소리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실험적인 사운드 아트는 충분히 흥미를 가지게 만든 예술 장르이다.사운드와 영상은 '사운드+영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이중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더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영상'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사운드 아트 공연에서는 생각이 뒤집혔다. 사운드도 충분히 중심에 서서 영상을 부재료로 쓸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또 나아가서 생각하면 사운드라는 것은 영상(시각적인 것)이 하나의 이야기만 들려줄 수 있는 것에 비해 서로 다른 사운드가 만나더라도 놀라운 조화를 가지고 와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즉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음악에서 생각하면 ‘즉흥잼’이랄까? 아무것도 약속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갑작스러운 호흡에서도 재미있는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처음 내가 생각하는 사운드아트는 설치된 작품이거나 인터렉티브한 요소가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 사운드아트가 전시장이 아닌 공연장에서 관객을 모아놓고 퍼포머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사운드 아트를 전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포퍼머가 격정인 몸짓을 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그들만의 도구들만으로도 주목받고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표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패션에서 ‘오띠 꾸드르’에 나오는 의상들이 기괴하고 실험적인 옷들이 많은데 그 옷을 보고 사람들은 ‘이런 옷들을 누가 입어?’ 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옷들이 있기에 패션에 발전이 있고 새로운 영감을 주며 또한 재미를 준다.

사운드 아트 공연 또한 아직까지는 대중적이지 못하지만 많은 실험적인 작품들로 인해 발전되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영감을 받고 재미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김은솔


사운드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고민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 사운드 아트라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게다가 공연명이 '사운드 디자이너'라니. 사운드가 어떻게 디자인 된다는 것일까? 디자인이라면 조형하는 작업일텐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할 있다는 말인가? 이런 조그만 의문을 가지고 공연장에 앉았다. 주로 이동(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나 걸을 음악을 듣는 것을 즐겨왔다.) 위해 음악을 소비했던 나로서는 착석해서, 공연을 관람한다는 자체가 어떠한 새로운 현상의 시연장에 참여한 기분이 들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했을 때처럼. 최초의 영화관의 관람객이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작은 의미의 음악에 비교해서 했던 생각들이 매우 협소한 관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공연은 공간의 소리들이었다. 그가 사티의 가구음악을 언급한 것처럼, 장소에 들어앉아, 촉각에 의한 명령을 내리고, 그것은 소리의 형상을 빚어내게 된다. 그리고 소리들은 그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텍스트와 기호들은 소리로 재탄생한다. 그가 부여한 의미의 심박동, 그와 더불어 그의 키보드 연주는 부모가 되기도 하고, 조물주가 되기도 하며, 연인이 되기도 하는 어떤 손길의 어루만짐과도 닮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운드 아트의 주연은 소리이다.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지만육체를 가지고 나타난다.

트북, 이펙터, 스피커 등의 전기줄들은 소리의 혈관들을 이루고, 혈관들은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어 형체를 갖는다. 소리는 말을 건네기도 하고, 숨을 쉬기도 하며, 또한 움직이기도 한다. 이미지들이 말하는 시간들은 일반적인 시간관과는 거리가 있다. 최수환은 그의 경험들을 콜라주한다. 시간은 단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직선적인 것들이 아니다. 흘러가는 것들을 세우고, 붙들어매는 . 그리고 이것이 반복적으로 현재에 다가오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모습을 영사기를 통해 영화를 직접 상영하는 영화감독과도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러티브를 가진 영화 감독의 느낌이라기보다는, '있음' 대해 말하는 .라는 느낌이 든다. 소리는 있다. 그는 발견했고 마주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마이닝하고 구체화한다. 오히려 마술사, 연금술사, 또는 조물주의 태도에 가깝지 않은가?

콜라주는 이질적인 충돌의 뒤섞음 같기도 하지만, 이는 유기성을 가질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운드 아트는 전방위적이고, 전체 또는 총체를 아우른다. 그는 소리의 육체를 형상화한다.

육체는 어쩌면 완전하지 않은, 완성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육체가 그러한 것처럼.

이번 공연을 보며 소리들이 미완성의 아픔,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연주의 손길은 창조인 동시에 위로의 손길인 것이다. 그가 어떠한 시선들에 요구했던 책임처럼.


                                                                                                                                                           글. 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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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디자이너

  

사운드 아트라는 공연이나 전시를 보았을 때 난해하다고 느끼는 건 아마도 시각예술만큼의 언어적인 요소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사운드 아트라고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나 귀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노이즈, 익숙한 서사나 화성이 없는 사운드들이 공연장을 가득 채울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불편하고 당황스러워진다. 그런 요소들이 사람들에게 사운드 아트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을 주는지도 모른다. 다른 매체들 보다 왠지 더 전위적이고 난해하고 그래서 소화하기 힘든.

 낯선 것은 당황스럽고 불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가능성인 것 같다. 류한길씨의 공연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공연시간 내내 뭔가에 대해 생각했고 컴컴한 노트에 물음들을 끄적였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 잘 알아볼 수 없는 그 글씨들을 붙들고 고민을 하는 것들이 어떤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한페이지 분량의 리뷰에 묻어나면 참 명쾌하겠지만 그러기엔 아직 소화가 덜 된 듯 하다.

 

류한길씨는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와 각각의 악기에 전자신호를 내보냈고 각각의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소리들이 공간 속에서 어떤 상을 이루는지 탐구했다. 즉흥적으로 소리를 조절하면서 구성하는 모습이 마치 당시의 그 공간에서 가장 유효한 사운드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악기들은 섬세하게 조율된 상태였지만 그것이 내는 소리와 그것들이 어우러지는 모양새는 우연성에 기반했다. 사실 악기라고 하기 무색할 만큼 탁, 탁, 탁 끊어지는 건조한 소리뿐이었지만 무대에서 각각이 소리를 내는 모습과 가운데 앉아 소리들을 조절하는 류한길씨가 꼭 타악기로 구성한 악단 같다는 인상을 받아서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악보를 써내려갔다. 악보를 쓰는 행위는 곧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 매개는 타자기. 강한 불빛을 받으며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는 모습이 연극 같았지만 분명 그가 쓰는 글은 연출된 내용이 아닐 것이다. 공연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공연의 악보를 쓰고 있었다. 그 당시 공간을 울리는 소리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악보. 조심스럽게 플라스틱반구에 쇠구슬을 굴리던 것처럼, 무대 가운데 앉아 소리들이 내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것처럼 공연 내내 공연을 탐구하고 공연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그래서 보는 나도 끝날 때까지 팽팽한 긴장 상태였던 것 같다.

 

 적극적인 청취라는 행위는 모든 소리음악으로 들을 수 있다고 존케이지가 말했다.

보는 내내 물음들을 낳게 한 공연은 적극적인 청취를 하게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그 계기들이 앞서 말한 가능성을 이루는 것 같다. 


                                                                                                                                                            글. 박현정

 




내가 느낀 사운드아트

내가 생각하는 사운드아트는 '자유로운 소리의 부유'이다. 그것은 공간을 창출하기도 하며 잃어버린 기억도 되찾아주며 심지어는 특정한 냄새도 떠올리게 한다.

일반적인 음악(?)과의 차이점이라면, 소리의 재료에 대한 자유로움이다. LuigI Russolo에 의한 소음의 해방에서부터, 케이지까지... 모든 소리가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운드아트의 초기 개념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동시에 더 넓은 상상력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모든 현대 예술이 그렇듯 사운드아트 또한 한 가지의 사조가 있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작곡가들이 폭 넓게 각자의 영역에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때로는 영감과 상상력에 의존하며, 때로는 소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때로는 기술적인 테크닉에 초점을 맞춰가면서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 힘든 길을 선택한 사운드아트 작가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작업을 계속 하면서 영역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작업을 통해, 그리고 수많은 실험을 통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들은 또 다른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그래야 지금의 과도기를 넘어 좀 더 풍성한, 상상력과 기술력이 조화롭게 이뤄진 그런 세계에 도달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운드아트라는 카테고리에 참으로 다양한 작가들이 들어온다. 재밌는 현상이다. 단지 "소리"를 가지고 작업을 하면 사운드아트 작가로 분류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안에 들어있는 무수히 많은 카테고리들, 그것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우위를 가릴 수가 없다.

작업을 하며 기술 안에서 영감을 얻는 작곡가, 아날로그 재료를 가지고 피지컬한 작업을 하면서 영감을 얻는 작곡가... 또한 누군가는 하나의 소재에 집착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컴퓨터이든 시계태엽이든지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소재를 사용하던지 그것의 끝까지 파볼 심상으로 계속 열심히 작업을 해야 한다고.. 그러면 그가 집착하는 대상이 어떤 선물을 줄지, 어떤 신세계로 인도할지 모르니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바로 이것이 과거 예술과 가장 다른 형태가 아닐까? 내가 원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작곡기법을 배우고, 악기론을 익혔던 것들이, 사운드아트의 영역에서는 물론 똑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기도하고, 피지컬한 기계들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가장 다른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는 태도에서, 이제는 그 대상 자체에서 어떠한 가능성이 나올지 연구하며 더 자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 류한길의 LIG아트홀 공연

LIG아트홀 기획공연 <사운드 디자이너>의 마지막을 장식한 2010년 7월 20일에 있었던 류한길의 공연은 마치 류한길이라는 작가의 작업실에 초대받은 듯한 느낌의 공연이었다.

작가의 작업실은 여러 가지의 악기들로 가득했고, 그 악기의 모양새로는 직관적으로 어떤 소리를 낼 것인지 추측하기 어려워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북 소사이어티의 보이지 않는 힘>이 시작하고 작가가 나와서 지시를 내리자 (sinewave를 발생시키자) 각각의 악기들에 생명력이 부여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를 낸다. "똑똑", "째깍째깍"...

또한 연주하는 공간 자체를 악기로 쓴 시도가 돋보였다. 전구를 매달고, 철로 된 봉에 구슬을 매달아서 소리를 내는 것은 참 귀여운 상상력이 아닌가..

특히 무대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 같이 보였다. 그 중 전구는 탁월한 효과였다. 어두울 때는 타악기의 리듬만이 존재한다. 그 리듬은 계속해서, 과하지 않게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처음엔 흐릿하던 전구 조명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밝아졌을 때 깨닫게 되었다. '아! 지금 악기들이 살아서 숨 쉬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 작업실은 일반적이지 않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그 공간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조정하는 신이 되고 사물들은 그의 조정에 반응한다. (나중에 작가에게 물어보니 조명조차도 최대밝기와 최소밝기만을 정해주고 즉흥적으로 진행하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관객이 중앙에 들어오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마치 서라운드 스피커 안에 관객이 들어와서 감상하는 것처럼 스피커 자리에 악기들이 놓이고 관객이 그 안에서 공간감을 느끼면서 감상한다면 작가가 의도한 것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한 <다른 것을 위한 서술법>에서 작가는 타자기에서 글을 쓰면서 현장에서 음악을 생성한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지금 어떤 것을 타이핑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통해 쓰고 있는 글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타이핑한다는 행위는 소통을 요구한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의 기본적인 기능(의사전달)을 탈피해서 작가는 단지 시간의 흔적?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악보가 남듯이, 작가만이 간직할 무언가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마지막 인터미션 후 2부에서는 이 공연을 기획하면서 위촉한 주제인 "시간"을 테마로 세 명의 작가들이 합주를 했다.

평소 replay 및 외국 작가들과 협업을 많이 해봤던 작가라 그런지 즉흥연주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던 것 같다. 나중에 작가에게 물어보니 "2분간 연주를 하고 30초간 멈춰라. 이것을 총 6번을 반복 한다."라는 지시사항 하에 세 명의 작가가 즉흥연주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위한 정확한 카운트가 제시되지 않고 각자의 감각에 의존해서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세 사람이 다르게 인지할 수 밖에 없는 '각자의 시간'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재미있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재미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공연의 전체적인 느낌은 다른 어떤 사운드 아트 작가보다 "음향" 자체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 사운드 아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보며 느낀 것이라면, 결과물 보다는 알고리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존 작곡가들이 더 좋은 소리의 퀄리티를 위해 노력하고, 새로운 음향에 집중하거나, 소리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사운드 아트 작가들은 그것보다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맥락들, 내부의 구조(알고리즘), 소리를 내는 파라미터들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되면 기존과는 다른 식의 창작, 더 나아가 감상법에서 나오는 "새로운 소리"에 대한 정의들이 생겨나게 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라든지 편견을 타파하기 위한 시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류한길 작가의 경우, "공연장이라는 조건이 음악을 보충, 대리 해주는 역할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이 생성되고 작동하는 조건으로 전환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공연에서 스피커의 사용을 자제한 까닭이, 실상 우리가 주변에서 듣는 많은 소음들 중에서 상당수가 증폭장치에 의한 소리들임을 감안할 때, 철저하게 어쿠스틱한 환경만을 구축해보는 것이 오히려 더 생경한 느낌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라고 말했다.

사운드아트는 또한, 악보에 최대한 자세히 기보해야한다든지,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해야 하는 클래식 음악에 비해 즉흥성을 많이 추구한다는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연주와 작곡이 구분되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즉흥성 안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 가지만, 실상 그 내부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인상 깊다.


                                                                                                                                                           글. 조은희 


내가 생각하는 사운드 아트


좋은 음악은 듣다보면 그 음정 사이사이에 숭고한 이야기가 스며 들어가 있는 것만 같습니다. 또한 음들을 알맞게 배열한 그 ʻ조합ʼ이 너무나 아름다워 마음속으로 감탄할 때도 있습니다. 멜로디를 담아 부르는 노랫말은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아 시처럼 가슴에 박힌 채 떠날 줄 모르던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음악 속 멜로디며 가사로 이루어진 음악 장르 외의 것들 - 그 밖의 ʻ소리ʼ로 일컬어지는 것 - 로 제 마음을 짜란 하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소리는 만져질 수 있을까요? 음악에는 향기가 있을까요? 노이즈는 그림으로 그려질까요?현실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조합이 머릿속으로는 가능합니다. 특정한 소리를 들으면무슨 생각이 드나요? 저는 어떠한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ʻ소리ʼ는 뭘까요? 일단 음악은 소리의 일부. 그렇다면 음악을 뺀 나머지의 소리는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요? 평상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리'는 그저 들리는 '소리'일 뿐입니다. 영어로는 “hear”, 우리가 귀 기울여 특별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듣고 있는 각기 특정 주파수를 가진 파동 자체. 그렇지만 내가 이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정의를 내리고 의미를 부여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되지 않습니다.

ʻ사운드 아트ʼ는 ʻ소리ʼ를 가지고 변환/전환/조합.. 등등의 작업을 통해 독창적으로 해석하고표현한 다소 실험적인 성격의 예술작품입니다. 세상의 모든것이 소리를 만들어내는 물감이되고 화판이 됩니다. 사실 모든것은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다루는 행위는 숭고한 일이라고생각합니다. 그것이 시끄러운 노이즈가 되었건 단순히 생활 속 늘 접하는 도로 위에 지나가는 버스의 소리가 되었건 아니면 지금도 잘 듣고있는 노래든 뭐든 서로 한 곳에 모아놓고 우위를 두며 비교할 차원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저 마다 다양합니다. 생각, 취향, 행동과 외모들 모두 각양각색인 복잡한 세상 속에 얽혀 살아가는 우리는 저 마다의 관점과 생각이 다르며 같은 것이라도 자신만의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가 자기 식대로 해석해 버리기 일쑤여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다양한 해석이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생기는 것이겠지만 원래 이런것은 이 지구에선 흔한 일입니다. 저의 소견은 ʻ예술ʼ이라는 것이 어떤 하나의 절대적 기준을 세워 좋고/나쁘고를 평가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감정, 느낌, 무엇이든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니결국 자신이 접한 그것이 맘에 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세상 살기 지루할때면 현재의 내 주변에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가지고 머릿속에서 각각의 음악으로의 변환을 의식적으로 시행해 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길을 걸으며 내 딛는 발걸음은 베이스 드럼이 되고 도로 위 차가 지나가는 소리는 기타 리프, 사람들 말 소리, 그 밖의 양념과 같은 효과음들...등. 순간 세상은 이제까지와는 사뭇다른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가끔 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다양하고 새로운 접근으로 실험 해보고 싶습니다.


                                                                                                                                                             글. 스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