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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뷰] Lig 아트홀 "사운드 디자이너" 공연에 대한 단상들 I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9. 21. 18:22


지난 7월 14, 17, 20일 LIG아트홀에서 "사운드 디자이너" 공연이 열렸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사운드 아트 뮤지션 권병준, 최수환, 류한길이 사운드 아트의 세계 그리고 시간 이라는 주제로 각 뮤지션 마다 특색있는 공연을 우리에게 선사했주었습니다.  이번 기획취재에서는 앨리스온 에디터들이 바라본 "사운드 디자이너" 공연에 대한 리뷰와 각 뮤지션들이 말하는 이번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첫번째 / 최수환_Sonic Carousel

‘사운드 아트’라는 명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운드 아트는 모호한 영역에 걸쳐있는 일종의 동적(動的) 장르이다. 두 거대영역에 걸쳐있는 이 장르는 방점을 어느 쪽에 찍느냐에 따라 작업의 성격이 결정되는 높은 자유도의 산물이다. 작가들은 작가 개개인의 사운드와 아트에 대한 분석에 따라 자신들의 작업을 결정하는데, 분명한 것은 공통적으로 ‘사운드아트’ 작업은 기존의 음악, 기존의 미술 영역과는 다른 포지션을 취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운드 아트의 결과물들에서 보이는 형태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결과적으로는 사운드와 시각이미지의 교집합에 대한 철저히 컨트롤된 의도적 결과물과 전혀 의도하지 않게 생성되는 결과물이라는 양극단 하에 존재한다. 우리가 보는 대개의 작업들은 작가의 태도에 의해 선별 된 이 두 중간의 혼합체인 것이다.


최수환 작가의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조율된 결과들의 집합에 가까웠다. 영상과 사운드는 계산된 결과물로서의 사운드아트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사운드는 악보에 그려진 음처럼 그 순간에 충실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작되는 복잡한 시계부속과 같이 움직였다. 그의 작업을 통해 느껴지는 긴장감은 오히려 공연장의 세팅이나 기계적 오류로 인해 그 정확한 의도가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더 자극적으로 전가되었다. 기계적 장치들이 가진 현실적인 오류 가능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철저히 계산된 그의 작업이 그러한 외적요소로 인해 불안정한 결과를 낼까봐 오히려 더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클래식 공연과 유사한 감정 상태이다. 알려진 텍스트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텍스트를 정확하게 구현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에 대해 긴장된 기대감을 갖는 것처럼 최수환 작가의 공연은 그 잘 짜여진 조합들을 완벽하게 구현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이번 공연에서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로 자신이 정해놓은 하나의 시청각적 텍스트를 정확히 구현하고자 하였다
. 작가가 이야기하는 ‘소리로 만드는 이미지’란 사운드와 이미지가 정확하게 의도한대로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의 작업의 완성된 결과물은 하나의 악보처럼 읽히는 동시에 들리는 시청각적 인지의 대상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 중심을 두었다고 봤을 때 최수환의 작업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철저히 계산된 작업은 거의 오차 없이 공연으로 옮겨졌으며 동시에 관객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에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최수환 작가의 예전 미디어 작업들에서는 이러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결합력이 약했던 것에 비해 이번 퍼포먼스에서 그 결합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그는 현재와 같은 사운드와 이미지의 결합을 더 정교한 형태로 극한까지 몰고 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결합으로의 선회도 가능할 것인가, 그의 다음 대답을 기대해본다.



+ 이번 공연에 관한 인터뷰




사운드 디자이너 두번째 / 권병준_모든 것을 가진 하나 

 

우리는 같은 필드에 있습니다. 개별적인 값은 다르지만 열과 행으로 늘어놓는 등 범위를 지정했을 때 같은 ‘장’으로 묶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무대 한가운데 모여 있습니다. 무대를 둘러보니 기계들로 가득합니다. 기계들; 입력된 데이터를 계산하고 출력하는 기계들. 무대공간에 대한 첫인상은 말 그대로 한 배에 타고 있다는 느낌으로 기억합니다. 무대 가운에 앉아 들었던 공연의 수미(首尾)에는 바닷가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고, 무대 한가운데에는 돛대의 미니어처를 연상시키는 깃발 달린 장대 조형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일에는 종일 비가 내리기도 했죠.무대 바깥으로 늘어선 스피커들은 함포의 외경을 형성합니다. 다만 포구는 안쪽을 향하여, 사람들에게 소리를 출력하게 됩니다. 무대 측면으로는 하얀 스크린 두 폭이 돛처럼 걸려있습니다.


권병준 작가는 이 공연의 키를 조종하는 선장이자 진행 방향을 그리는 항해사입니다. 그가 다루는 기계들을 통하여 우리는 소리를(때로는 영상도 함께) 경험합니다. 그가 입력한 예사로운 소리들이(혹은 동작들이), 그가 작동시킨 기계들을 통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보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경험에서는, 비단 스테레오 출력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다수 배치된 스피커를 통해 청각적으로 인지되는 공간감뿐만 아니라 소리를 변환시키는 기계들을 함께 볼 수 있기에 더욱 강력한 실재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대공간의 구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대를 헤아린다고 해서 어떤 공연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청각 위주인 사운드 공연이라면 감각의 휘발 정도가 더욱 빠릅니다. 우리가 탄 배는 어쩌면 움직이지 않은 채, 바닷가에 정박 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소 감상적인 접근이지만, 오히려 그 방법이 권병준 작가의 공연에서는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권병준 작가는 소리를 감독하는 역할 이상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는 키노트를 조작하는 선장보다는 세이렌이 더 어울립니다.

그는 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출력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고안한 기계들을 사용했기에?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해서? 공연에 퍼포먼스 요소가 많아서? 그 말들도 맞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다양한 기계들을 사용하면서도, 자신이 표현하려는 감정의 흐름에 들어맞도록 소리들을 선택했습니다. 음악을 감정의 매개체로 생각하면 몰입을 위한 고려들이야 당연하지만, 소리에 대한 반성성에 주목하는 이와 같은 공연에서 감정이란 전달하기가 더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 감정은 일종의 ‘노스탤지어’라고 말하겠습니다. 양 극단 사이의 어떤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막연한 그리움쯤 될까요. 무대구성이나 사용하는 소리(펜의 필획이나 육성, 잡음 낀 라디오)도 그렇고, 이 공연 자체가 저에게는,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혹은 바그너식의 무직드라마와 모놀로그의 대립과 합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 이번 공연에 관한 인터뷰 

 

 


사운드 디지이너 세번째 / 류한길_북 소사이어티 & 다른 것을 위한 서술법



당신에게 “사운드 아트는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럼 나의 경우는 어떨까? 솔직히 나에게 사운드 아트란 정의내리기 힘든 장르에 속할 뿐더러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도 떠오르기 쉽지 않다. 사운드 아트를 단어 상으로만 해석한다면 소리를 표현한 그림(아트)라 하겠지만 단순히 물감으로 표현된 캔버스라고 정의 내리기엔 사운드 아트가 가진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확장된 영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사운드 아트의 영역 속에서 류한길 작가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영상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믹스된 전자음악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매체의 실험은 새로운 전자 악기를 개발하는 것 아닌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그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매체를 통해 그 매체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과 공연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연주하는 작가의 역할과 관람객의 호응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즉흥성이다. 이번 <북 소사이어티의 보이지 않는 힘 & 다른 것을 위한 서술법 >공연에서도 그 양상을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번 공연은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 공연에서 올해 상수역 근처에 오픈한 북 소사어이티에서 진행했었던 저주파를 그대로 스피커로 내보낸 공연을 그대로 Lig아트홀로 옮겨 또 다른 장소에서의 사운드 아트에 대한 실험을 보여주었다. 이 공연에서는 작가와 저주파를 그대로 스피커로 내보는 형식은 북 소사이어티와 변함없었지만 연주하는 장소는 달랐다. 북 소사이어티에서의 공연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Lig아트홀, 지금 이 장소에서는 분명히 다른 여지들이 꿈틀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연극 무대와 같았던 장소와 그 속에서 울려 펴지는 사운드, 사운드의 어떤 형식을 해석하는 공연이 아닌 그 장소에 그냥 어울려 있는 사운드를 즐기는 여유 같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의 사운드의 힘은 단순히 전파의 흐름을 통한 단순한 소리의 울림이 아닌 그 소리가 나는 장소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지 알려주는 공연이었다.

두번째 공연에서는 컴퓨터의 발달로 구시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타자기를 통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그는 타자기 기계와 심벌즈를 서로 연결해 글 쓸 때 발생하는 기계의 작동이 음향을 만들어 내는 것에 주목하면서 음향에 담겨진 ‘무엇인가를 작성한다’라는 행동에 가정하는 음향의 기억 작용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서 심벌즈의 연주는 오직 작가의 타자기의 두드름에 의존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타자기를 누르는 작가 또한 자신의 좋아하는 심벌즈의 음향을 찾아 여러번의 시도릍 통해 그 음을 찾아가는 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 연주를 나도 모르게 타자기 소리와 심벌즈의 소리를 비교하면서 작가가 어떤 단어를 계속 치고 있을까, 또 타자기를 치는 책상 위에 무슨 텍스트라도 있는게 아닐까라는 궁금이 가득한 공연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다시금 공연의 기운이 머리 속에 가득차면서
이 질문이 다시금 머리 속에 떠오른다. "사운드 아트가 무엇인가요? ", 위의 대답은 '아직' 이었지만, 글을 마무리한 이 시점에서 대답을 달리 하고 싶다. "조금은 알것 같아요 !" 라고.



 + 이번 공연에 관한 인터뷰





※ 위의 공연 사진은 Lig아트홀에서 제공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