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테크놀로지를 피하려다 걸려든 개인 이데올로기의 함정-2010 미디어시티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9. 18:24

테크놀로지를 거부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2010년 가을은 비엔날레의 계절이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광주비엔날레와 아직도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부산비엔날레와 더불어 미디어 시티 서울로 지칭되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는 올 가을을 미술의 축제로 수놓고 있다. 특히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는 서울 한 복판에서 예술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들을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서 전문가와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어린이들이 즐겨 찾았던 행사이다. 어렵게 느껴지던 현대미술의 문턱을 미디어아트가 교감 가능한 영역으로 낮춰 놓았다.

 

두 번이나 찾아갔던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 전시관에서 나는 수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2년 전에는 쉽게 눈에 띄었던 어린 아이들이나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폴란드인으로 보이는 몇몇 외국인 관람객들만 도드라져 보였을 뿐 넓은 전시장이 아주 한산했다. 그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언어가 러시아어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이 생경함의 이유는 전시장 입구의 넓은 홀에 홀로 놓인 설치 작품 <부케 VII>에서 시작한다. 대규모 미디어아트 전시의 시작점에 놓인 부케 꽃다발은 이번 전시가 예년의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시위하는 상징이다. 이 핑크 빛 꽃다발로 시작해서 3층 복도에 놓인 자전거 설치작품 <레드 리믹스>에 이르기까지 낯선 인상은 계속된다.

빌렘 데 로이 <부케 VII> 분홍빛 생화와 조화

전시장을 오가며 그 낯섦의 정체는 테크놀로지의 기피에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 무료 입장에다가 무료로 나누어 주는 50페이지 가량의 두툼한 리플렛의 앞 페이지를 펼쳐서 주제에 대한 글을 잠시 읽어 보았다. ‘초대말씀다음으로 나오는 트러스트라는 제목의 글은 주제를 설명한다기 보다는 미디어에 대한 불확실한 입장을 피력한 큐레이터의 독백으로 읽힌다. 그 마지막 구절을 곱씹어 본다. ‘트러스트는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폭넓은 의미를 제안하고, 동시대의 경험을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개인적인 시각에서 공유하고자 한다.’ 이 말을 제대로 해석해 보면 개인적인 시각에서 인간적인 경험을 폭넓게 풀어 놓은 미디어 전시라는 선언이 된다. 이렇게 문장을 거꾸로 읽어야 전시 주제가 이해가 되는 경우라면 결국 문장 하나 조차도 공유가 안 된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셈이다. ‘트러스트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가 뉴미디어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유 없는 불신을 근거로 성립되었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다.



사적(私的) 내러티브 또는 개인 이데올로기의 과잉

 

 엘렌 세큐라의 사진 21점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부케를 만든 작가의 핑크 빛 영상을 보고 나서 눈에 들어오는 87분 분량의 비디오 설치 작품을 5분 동안도 집중하지 못하고 돌아서며 툭 들어서게 되는 넓은 공간,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한 21점의 사진이 나열된 곳에서는 이번 전시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사라져버렸다. 폴란드가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주장을 담은 텍스트에서는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그런 표현을 했었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캐나다 유학생이 미국의 51번째 주는 캐나다라고 강조했다. <얄읏한 공>이라는 유머러스한 제목을 붙인 노순택의 평택 사진들을 지나서 주디 라둘의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이 전시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러닝타임을 확인해보았다. 4시간. 문 앞을 그냥 지나친다. 함께 전시를 관람하던 대학원생이 수줍은 듯 내게 다가와서는 고백한다. “열심히 공부해가며 봐야 되겠어요.” 도대체 왜 대학원생 조차도 전시 관람에 부담을 느낄까?

 

그 부담스러움은 개인적 시각으로 역사와 사회관을 재구성한 작품들이 많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런 시각을 담기에는 사진 또는 비디오라는 매체가 적당하다. 그래서 과거 1980년대에 비디오 행동주의에 입각한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많이 소개되었다. 인터넷과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사진과 비디오가 사회 현장을 고발하고, 개인적인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전시주제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은 미디어를 폭넓게 해석하는 방법으로 80년대 방식으로의 회귀를 선택했다. 단 한 점의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도 없고, 네트워크에 기반한 실시간 소통의 작품도 없다. 국내에서 웹아트 작가로 유명했던 양아치 조차도 70년대의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을 연상시키는 비디오 설치 작품을 출품했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런 태도를 반동(反動)’이라고 한다.

 


시징맨의 설치 작품

붉은 코트를 입고 마르크스의 동상 앞에 서서 나는 마르크스가 싫다고 중국어로 울부짖는 서양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국작가 라이너 가날은 이 작품을 위해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2층 전시장 밖에 울려 퍼지는 미국인의 중국어를 뒤로 하고, 3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난데없는 잡동사니들에 놀라게 된다. 첸 샤오시옹, 김홍석, 오자와 츠요시 등 동아시아 3개국 작가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시징맨의 설치 작품이다. 물그릇 옆에는 다이빙이라고 써있고, 수박으로는 축구공과 골대 장면을 꾸며 놓았다. 이들의 작품은 장난과 환유(換喩)의 경계에 서 있다. 놀라움은 이어진다 3층의 마지막 방을 독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회화 작품 때문이다. 잡지나 전단 같은 것을 스텐실 기법으로 꼴라주 작품화한 80년대 미국의 회화 작품을 보는 듯하다. 미디어 시티 서울 전시에서 복고풍의 회화작품을 보는 것이 낯설어, 다시 리플렛을 찾아보니 그렇다고 써있다. ‘(중략) 콜라주 작품으로 구성하는데, 이는 마치 20세기 추상회화를 연상시킨다…’ 설치작품으로 시작해서 회화작품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것을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 배웠다. 시립미술관을 나와서 경희궁분관으로 향한다. 덕수궁의 돌담 길 뒤편을 지나가면서 어슬렁거리는 경찰관 무리를 보았다. 80년대의 데자뷰와 함께 폴란드처럼 우리나라도 미국의 51번째 주인지 궁금해진다.

마크 브래드포트, 빵과 서커스

 

이제는 미디어아트 전문가에게 맡기자


 가건물 상태의 경희궁분관 앞에는 컨테이너 박스 같은 작은 가건물이 서 있는데, 그 안에서 에릭 판 리스하우트의 비디오 작품을 보았다. 유튜브나 네이버에도 오르지 못할 것 같은 홈비디오 형식의 작품인데, 오지 않는 여자친구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진지하면서도 코믹하게 묘사했다.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의 주제를 가장 적합하게 구현한 작품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를 개인적 이야기 서술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과 함께 더글라스 고든의 묵시록적인 영상 설치 작품을 직접 본 것은 다행이었으나, 2층의 넓은 공간을 잡동사니들로 늘어 놓은 이주요의 작품이 안타까웠다. 시징맨처럼 뻔뻔하지 못해서인지 개인적인 낙서와 오브제들로 공간을 채우다가 포기한 흔적만 나약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것은 개인적 시각의 개인적인 표현이 개인적 공간 밖으로 나오게 되면 빠지는 함정이다.

 

이주요의 설치 작품

그렇다.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 전시는 함정에 빠졌다. 텍스트와 그림이 가장 근본적인 미디어이고, 사진도 미디어이므로 하이 테크놀로지가 빠진 미디어 전시도 보아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은, 지난 10년간의 미디어 시티 서울이 치열하게 고민해온 연속성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도 공허한 보복이다. 현대미술 비엔날레를 기획하고 싶으면 광주나 부산으로 가는 것이 옳다. 뜬금없이 미디어의 정체성을 논하기에는 미디어 시티 서울을 비롯한 국내외의 미디어 아트 분야가 이미 성숙했고, 관람객과 전공 학생, 전문 교육프로그램, 전문가들도 많아졌다. 이제 미디어 시티 서울과 같은 행사는 미디어 아트 전문가에게 맡기자.



글. 오창근 (미디어아티스트,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