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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뷰]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알바노토(alva noto)" 공연 I : 강렬한 노이즈 사운드 속으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2. 22. 15:50

지난 11월, LIG아트홀에서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알바노토"의 공연이 열였는데요. 그는 사인파를 사용한 스토익한 작품으로 수학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단지 음악의 소리를 채취하고 구성하는 것이 아닌 비주얼(영상)과의 접목을 통한 진장한 노이즈 사운드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공연은 한국에서 경험하기 힘든 사운드 아트 공연이였던지라 공연의 열기가 아직까지 전해져 오는것 같네요. 아쉽게 공연을 보지 못한 앨리스온 독자분들에게 그 공연의 열기를 앨리스온 에디터들의 리뷰를 통해 느껴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_^ 


언젠가 노이즈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문학의 반-조력자쯤 된다고 생각했었다. 음악적 변증법이랄까, 한 작품의 범위 내에서 미적 부분를 부각시키는 추악의 역할로, 그것은 주제가락에 대비되는 가락을 통해 구성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서사를 그려낼 수 있는 음악이라면 일정시간 흐름을 장악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말한 노이즈 음악이 ‘전체 음악 혹은 한 곡의 음악’에서 시련이나 악당 역할을 하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노이즈는 지금까지의 음악이 극복할 수 없었던 부분으로, 음악보다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세상의 모든 소리’이기 때문이다. 존케이지가 4분 33초로 연주자의 침묵과 관객의 웅성거림을 함께 연주한 것처럼 노이즈로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음악에 대한 시각은 비슷했다. 서양에서 음악은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천체가 운행하는 화음이자 중세에는 종교적인 영향 아래에서 체계화된 학문 중 하나로 기능했다. 동양에서도 역시 음악은 윤리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술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어떤 이상적 세계를 재현하는데 사용되었다. 혹은 음악에서 인간의 영혼이나 감정의 모방을 말할 수도 있다. 이쯤 돼야 음악에서 ‘노이즈’가 사용된다. 인간의 비합리성을 표현하기 위해, 동시에 세상의 비합리성을 느끼는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한편 현재 생산되는 대부분의 음악은 이러한 재현의 두 방향을 함께 사용한다. 음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이 현실과 개인에게 가깝든 멀든 소비될 매력은 충분하다. 멀다면 그립게, 가까우면 이입. 삶의 위안으로서의 기능은 충분하지 않은가.

소리라는 대륙에서 노이즈는 아직 음악으로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처럼 존재한다. 음악은 소리를 길들이고, 체계화시키고, 의미를 부여하여 역할을 맡긴다. 기존 세계에 답답해하고, 새로움을 보여줘야 하는 음악가들은 소리를 다루는 '방법'을 바꾸거나(쇤베르크), 사용 가능한 소리의 '개념'을 확장(케이지)시켰다. 그들은 제국사에 저항하는 쪽일까, 아니면 새로운 영토(소리)를 원하는 제국의 쪽일까. 여기가 매체에 대하여 짚고 넘어갈 시점인 것 같다. 사실 애호가 입장에서야 음악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노이즈’의 사용 여부를 떠나 청자의 취향이나 상황에 따라 어떠한 음악도 소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작자 입장에서는 취향이나 사용하는 매체에 따라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
현재와 같이 음악의 다양성이 가능해진 이유는 녹음 기술을 시작으로, 소리를 ‘데이터’로 변환-전송할 수 있는 매체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매체는 음악을 만드는 행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녹음 기술 이전에는 겨우 악보로 전수되어 악기 연주나 목소리를 통해 ‘재연’되었다면, 이후에는 재연 이상의 다른 효과를 부과할 수도 있다. 이미지에 있어 디지털카메라나 각종 편집프로그램처럼, 소리도 마찬가지로 데이터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신검합일 경지로 피아노에 달라붙어 있던 글렌굴드는 녹음실에서 하는 연주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콘서트로 생각했다. 반면 백남준처럼 피아노에 흉기를 들고 달려드는 방법도 있었다. 백남준은 알바노토처럼 매체에 몰입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날 공연의 이름은 <Xerrox>. 미국에서 ‘복사’의 대명사로 쓰이는 모 브랜드와 한 글자만 다르다. 의도적인 에러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 기업은 역사상 최초로 GUI 컴퓨터를 만든 기업이었다(상업적 용도는 아니었지만). 무대에서 그가 사용한 악기는 노트북. 빔프로젝터 영상이 비치는 화이트 스크린 아래에서 알바노토는 노트북만 조작하고 있었다. 그가 무대 위에 올라오지 않아도 상관없을 무대였다. 관객에게 허락된 감각은 청각과 시각이었고,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알바노토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사운드와 비주얼을 상호연동하도록 설정했다고 한다. 그에게 ‘제록스한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DOS와 같은커맨드라인 입력체계에서 윈도 아이콘으로 전환된 제록스? 말하자면 소리와 영상을 미리 설정한 룰에 따라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매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인 셈이다.  경험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알바노토의 사운드와 비주얼은 상호연동한다기 보다는, 가령 하나의 계산식으로 출발하여 얻은 값을 다른 색이나 질감의 종이에 인쇄했기에 다르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똑같은 잉크라도 배경색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알바노토는 음악을 공부하기 이전에 건축과 조경 분야를 전공했다고 한다. 이 공연에서 ‘제록스하는’ 부분은 특정 공간에 동일한 값의 사운드와 비주얼을 변조시켜 반복적으로 새겨넣었을 때 나타나는 효과 아닐까. 반복에 의해 매우 몰입적이면서도 변조-복조에 의해 시각-청각이 병치되는 상태가 지속되는, 피곤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색다른 경험이었다. 알바노토가 들려준 소리와 보여준 영상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소리는 공연장 내부에서 진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사운드는 굳이 말하자면 글리치 계열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공기 중에서 얇은 톱날이 출렁이는 모습이랄까. 톱날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끼리 혹은 공간을 구성하는 벽에 부딪히는 변수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톱날부의 각도는 항시 달라질 수 있다. 그 소리는 귀를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을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 단, 눈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나 시감각조차 그 무대에서는 출구가 될 수 없다. 알바노토가 사용한 비주얼은 원래 하얀 색이었을 도화지에 검은 크레파스를 가득 채우고 긁어댄 결과처럼 보인다. 유일한 창문은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커튼의 빈틈으로 비치는 빛은 바람이 불 때마다 시야에 스크래치를 남기지만, 겨우 패턴으로 잔영을 남길 뿐 일정한 형태로 굳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알바노토의 무대에서 빛은 로고스가 아니라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굳이 창문을 열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몇 번인가 암시적이나마 단순한 사운드와 비주얼만으로 관객의 시야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그 비약은 압도적이지만, 숭고하지는 않다. 그 비약이 매체 안에서만 이루어질 뿐임을 숨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사운드와 비주얼 재료들은 무수히 복사될 수 있고, 공간이 허락하는 한 존재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공연 중의 사운드나 비주얼이 공연장 밖으로 나갈 일은 없다. 공연장이라는 공간이 하나의 채널이기 때문이다. 채널을 벗어난 주파수는 텔레비전이 잡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알바노토가 사운드나 비주얼로 표현하려 했던 지점은 그와 같은 백색소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사실 그것은 노이즈가 아니라 세상 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소리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노이즈 사운드, 노이즈 뮤직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에 비해 노이즈 뮤직을 감상하는 것은 어렵다. 대중음악 문법에 너무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음악의 어떤 부분에 내 신경의 박자를 맞추고 내 몸의 리듬을 실어야 할지, 몇 번 혹은 심지어 몇 마디를 들어보면 감이 오는 대중음악과 달리, 노이즈 사운드로 구성된 음악의 대부분은 나를 음악에 '동기화' 시키기가 영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이즈 사운드가 매력적인 이유는 악기의 한계를 벗어나고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소리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듣는 사람도 새로운 소리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사운드이기 때문이다. 

사운드 아트와 노이즈 뮤직에 대해서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노이즈를 채취하는 행위 자체였다. 어떤 이는 일상을 예술적 재료로 쓰기 위해, 어떤 이는 특정한 공간을 관통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공간에 존재하는 사운드를 채집한다. 혹은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혹은 기술 문명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채집하기도 한다. 나중에는 사운드 채취라는 행위를 목적에 두고 내 주변의 노이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사실 노이즈를 '사운드'로 인식하는 전환은,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공연에서가 아니라, 소리의 발생과 존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 더 개인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그러나 그 노이즈가 어떻게 감상할만한 사운드로 확장되는가는 역시 아티스트의 선언, 그들의 작품에 의해 결정된다. 


알바노토의 둘째 날 공연 작품은 Unitxt. 조금 늦었기 때문에 배정된 2층 맨 앞자리 좌석은 나쁘지 않은 우연이었다. 소극장 한가운데에 놓여진 테이블 하나와 그 뒤로 펼쳐진 커다란 스크린, 그리고 그 사이에 알바 노토가 서 있다. 이 광경이 내려다보이는 시점에서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몰입하는데에 약간은 방해가 된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가 펼치고 있는 퍼포먼스 자체를 관찰하는 데에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개의 관객석을 꽉 메운 사람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시선을 쏘고 있다. 알바노토의 가벼운 등장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알바 노토의 공연은 사운드 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극과 함께 뇌신경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그는 'Unitxt'를 리듬을 분할하는 단위 혹은 언어로서 정의하고 있다. 전자파의 잡음과 기계음이 치밀하게 뒤섞인 소리들이 스피커에서 일직선으로 뻗어나와 벽에 튕기고 또 반대쪽 벽으로 튕기면서 쪼개진 채로 공간을 부유한다. 건조하지만 리드미컬하고 현란한 이 사운드는 알바 노토의 지갑 속 개인정보를 읊조리는 등 인간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동시에 컬러풀한 일직선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영상은 점차 두개의 레이어가 겹쳐지면서 라인들의 움직임이 극대화되어 시신경을 자극한다. 순간적으로 머릿 속을 맴도는 많은 계산들과 달리 그가 다루고 있는 장비는 지나치게 심플해보인다. 그의 두 손은 터치 패드와 컴퓨터 사이를 왔다갔다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운드의 치밀함, 특히 공연 후반부에 펼쳐지는 아주 복잡한 그리드를 걸쳐 흐르는 듯한 사운드의 구성이 감탄스러웠던 공연이었다. 또한 특정 필터를 통해 사운드를 그대로 재현하는 듯한 Sound Visualization은 눈과 귀의 감각이 뒤섞이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간의 감각적 인식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가 이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글. 김종혁, 선윤아 (앨리스온 에디터) 


* 위 알바노토의 공연 사진은 LIG아트홀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LIG아트홀에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