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구동희.개인전.<방해> 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12. 1. 06:00



푼크툼을 기대하는가? 기대하시라. 곧장 무너질 것이다. 구동희의 ‘방해’ 때문이다. <방해Disturbance>展은 싱글 비디오 채널 형식의 작품 3점(<비극경연대회>, <Zip-Run>, <겹겹이 쌓인 메아리>)과 삼면화 형식의 사진작품 한 점(<Drive Periodical>)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디오 작품들은 8분에서 16분 정도의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체를 중심으로 한 전시에서 관객에게 가장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상연시간 5분을 넘어서는 작품들이 십 수 점 있을 때, 감상이 아닌 처리를 고민하게 될 때이다. 이 점은 몸의 물리적인 한계와도 맞물리기 때문에 아마도 매체 전시에서 근본적으로 반성해 봐야하는 항목이 아닌가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전시는 전시장의 한계에 맞추었다고 할지라도 성실하게 작품과 대화할 수 있는 적절한 전시환경이 아니었나 한다. 미디어가 메시지가 된지 이미 오래인데 우리는 변화된 매체가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작품관람의 방식에 대해서는 별반 고민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매체예술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관람 방식의 고민 속에 그 해법이 놓여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관객의 감성과 감각을 함께 작동시키려 하는 이번 구동희 전시의 경우는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기대하고 무너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고, 이는 작품의 상영 내내 함께 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구동희의 비디오 작품은 말끔한 형식으로 우리를 유인한 후 상연시간을 채워가면서 점점 그 유혹을 배반한다. 연기를 위해 울다가 오히려 그 울음에 먹혀버리는 배우들처럼 <비극경연대회>는(16분) 배우는 배우대로, 관객은 관객대로 각자의 방식 속에서 삶의 균열 사이로 빠져들게 되고 애초의 출발과는 엉뚱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 경쾌한 구경거리에서 진지하고 불편한 삶의 편린으로 떨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불편해진다. 진지하고 불편한 삶의 편린(그것은 차라리 불편한 감각덩어리이다)과 마주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구동희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포와 연민’을 통해 대면케 하는 인간의 비극성(불편함)과 기묘하게 진동한다. 기묘하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체하는 방식으로 전혀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게 그 비극의 단편(일종의 불편함)을 대면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기묘한 만남은 완결성과 우연성의 극단적 대비를 드러내게 되므로 구동희의 작품의 정향점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준다. 구동희의 방식은 플롯이라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산만한고 다양한 눈물의 형식과 기원에 대한 타자들의 감정을 방기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타르시스에 의한 비극성의 환기가 아니라 플롯의 마비 속에서 풀려나는 산만한 감정들의 분비 즉, 눈물이 눈물을 부르면서 감각이 감정의 수문을 열어제끼는 방식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첨단 매체적 버전이라고 할까. 그러나 거기에는 구원도 교훈도 없고 당연히 카타르시스가 없다. 구원을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매끈한 형식 내부에서 파열되는 플롯, 플롯의 마비 속에서 해방되는 감정의 분기에서 비롯되는 메시지의 교란 어딘가에 있을 법하다. 그것은 메시지가 된 미디어에 이미 길들여진 우리의 지각체계를 교란시켜 메시지를 그 내부로부터 분해하고 메시지가 된 미디어를 다시 한번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경연대회라는 구경거리, 놀이에 대한 그 유혹은 작품 앞으로 끌어들여 주조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배우와 우리를 모두 다시 현실로 되돌려 보내면서 자신의 유혹을 배반하고 있다. 이 배반은 또 다른 매체 예술의 진화의 가능성을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Zip-Run, 2006, HD Video, 09'39"


나머지 두 개의 비디오 작품 <겹겹이 쌓인 메아리>와 <Zip-Run>은 <비극경연대회>와 조금 다르다. <비극경연대회>가 울음과 넋두리를 통해 불편함을 생성한다는 차원에서 흔적으로나마 서사적인 기운을 조금이라도 남겨두었다면, 나머지 두 작품은 그 흔적마저 사라진다. 그러나 <비극경연대회>에 비해 적극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개입시키거나 편집 등 영화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더욱 더 자연스럽게 기대에 찬 시선을 던지게 된다. 무슨 기대? 서사(narrative)에 대한 기대! 매끈한 형식의 완결에 유혹되려는 것이다. <Zip-Run>의 경우는 남자의 더듬거리는 연기와 그 연기를 집요하게 끌고 가는 행위. 이 행위를 완결하는 시간의 흐름. 이 세 가지가 영화적 형식을 빌려 9분39초 동안 상연된다. 알람시계의 울림, Zip-Run 타이틀, 고무호스, 카세트녹음기, 야외용 조명등, 가파른 계단, 장난감 같은 옥상문, 그리고 옥상. 눈을 가린 채로 어설프게 더듬거리는 남자는 관객이 답답해할 때 즈음 눈가리개를 올려 원하는 것을 정비하고 다시 눈을 가리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옥상으로 올라간다. 행진곡과도 같은 음악을 틀어놓고, 남자는 옆 건물에 조준해 둔 조명원에 맞춰 물 호스로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음악에 맞춰. 그리곤 의미의 완결을 완벽하게 부정해버리듯이 이 구조를 끌고 온 남자는 건물 아래로 툭- 떨어져 버린다. 마침표는 영원히 찍을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눈을 가리고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남자의 행보는 무언가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느닷없이 마감됨으로써 숨죽이며 쫓아간 관객도 느닷없이 화면에서 밀려난다. <겹겹이 쌓인 메아리>(8분23초) 역시 서사가 없으며 <Zip-Run>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 둥근 탁자가 놓여있는 공간으로 사람들은 입회하고 사회자의 신호에 따라 공연이 시작된다. 한 남자가 얼굴은 가리고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로 탁자 위에서 맴돌기를 한다. <Zip-Run>의 남자가 눈을 가리고 물건을 모아가는 시간이 여기에서는 남자가 맴도는 시간으로 대응된다. 이 시간은 모두 영화적 영상으로 관객을 유혹하는 시간이다. 남자는 한 손에 칼을 들고 정신 없이 맴돌다가 그만 쓰러져 버리게 되는데, 이 향연에 초대된 사람들은 남자의 맴돌기가 진행돼가면서 맴돌기의 메아리에 마취되어 가다가 남자가 쓰러지면서 유혹의 시간은 절정에 이르게 되나 그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일부 퇴장하고 일부 공허하게 남아 관객과 함께 유혹의 배반을 경험한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회자의 “Call”이라는 외침은 그야말로 목소리, 물적 자료로서의 기표로 떠돌 뿐이다. 메시지인줄 알고 다가간 관객은 형식 속에서 사라져버리거나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미디어의 메시지 속에서 그 새로운 화법에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에 대해 선택을 숙고하며, 행동을 선택하기 위해 머뭇거리게 되는 것. 새로운 자극인 구동희의 선물은 작품 속에서 만난 어느 강렬한 지점들이다. 이것으로 무얼 하지? 우리는 마취에서 깨어나 숙고하게 된다. 관객이 새로운 화법에 직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매끈한 형식언어의 완결성과 그 형식이 제공했던 기존의 경험들에 근거한 기대였을 것이다. 이 점이 우리를 곧장 구동희의 작품 앞으로 끌고 가는 유혹의 근거가 아닐까. 그러나 결국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은 플롯의 마비, 완결되지 않은 반복과 느닷없는 종결 속에 부딪히는 지각과 기대감의 교란, 내용과 형식의 점진적인 충돌이며 이 지점에서 유혹은 우리를 배반하여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다.



Overloaded Echo, 2006, HD Video, Duration 08'18"


구동희는 알렉시 바이앙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작업은 ‘기존의 형식들을 흡수하면서도 변형을 추구하고 그 내용은 기술적 영역에 따라 고정되거나 정의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내용은 관객의 에너지가 집중되는 바로 그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전시에서 구동희는 미디어가 메시지가 된 이래 너무도 매끈하게 장악해 들어오는 미디어의 지각조직력을 이런 방식으로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직 생포되지 않은 감각의 잔여분을 드러내기 위해 그 매끈한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 즉 메시지를 다시 해체하여 새로운 지각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 구동희의 방해는 여기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우리를 보게 하는 매체에 대해 그 균열의 방법을 제안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며 비디오 예술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글.남인숙(홍대 미학 namis77@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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