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실체변화The Transubstantiation_김신일 베다니엔 귀국 보고展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4. 12.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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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그려진 조각


보링거Wilhelm Worringer의 『추상과 감정이입Abstraktion und Einfeblung』을 보면 예술작품은 모방충동이 아닌 추상충동에 의해 창조된다. ‘공간공포’ 즉 텅 빈 공간에 속에서 느끼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그런 불안함은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만들고자 하는 추상충동을 일으킨다. 이때 예술가는 공간을 재현해 내지 못하고 평면으로 돌아가서 유기적인 자연의 모습을 제거하고 기하학적인 선과 형태로 평면에 합법칙성을 부여한다. 만일 이러한 그의 논리를 따르자면 텅 빈 캔버스 앞에 선 작가들이 긋는, 최초의 선은 그것이 기하학적인 선이든 아니든 간에 추상적인 선일 것이다.
김신일의 작품은 이와 같은 보링거의 주장에 적합해 보인다. 공간을 표현하거나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배경이 사라진 평면 위에 인간형상을 외곽선만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신일은 무채색의 종이 위에 손으로 압인하여 선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압인 드로잉은 하나의 작품을 위해 많게는 700장이 넘는다. 그리고 압인 드로잉은 1초당 30장씩 애니메이트되어 영상작업으로 바뀐다. 모든 것이 절제된, 최소의 것만 남은 듯 보이는 그의 평면은 흡사 미니멀 아트를 모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가 서양의 그것과 달리 정신세계를 지향하듯 김신일의 텅 빈 화면은 동양의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시각적으로는 색도 형상도 모두 소멸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계속되는 수많은 생성이 존재한다. 즉 김신일의 작품에서 사라진 부분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다만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空’은 모든 것이 사라진 ‘없음無’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잉태하고 있는 ‘색色’이다. 압인된 선이 빛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그의 ‘공’과 ‘색’에 대한 생각은 더 명확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