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_TAG 9. 한국의 미디어아트 바라보기 _2010년 비엔날레-페스티벌을 중심으로
yoo89652011. 2. 28. 17:05
0.
아마도. 백남준 작가로부터 시작된 미디어아트의 줄기를 예전부터 주목했던 분들이라면, 2000년대를 훌쩍 넘어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현대 예술(미술)에서 변화된 미디어아트의 위치(지위)를 궁금해 하시리라. 과거 미디어아트는 아방가르드 들이 즐겨 추구했던 형식 실험 이상의 것으로는 인정 받지 못하였고, 최근 다양한 예술 전시에서 파급력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유통구조를 만들지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쯤되면 다양한 각도에서 미디어아트가 어떻게 조명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특히 첨단의 IT 기술을 보유한, 그리고 백남준이라는 영향력있는 아티스트를 배출했던 한국 미디어아트의 상황은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앨리스온에서는 지난 2010년을 돌아보며 숨가쁘게 진행되었던 4개의 국제 비엔날레/페스티벌(광주-부산-서울-인천)을 통해 나타난 (한국의) 미디어아트의 상황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다만 아래 전개되는 각각의 리포트가 비엔날레/페스티벌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리뷰는 아님을 미리 공지드리는 바이다.
현대 예술에서 미디어아트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동시대의 예술로서 미디어아트는 얼마만큼 성장했을까? 한국에서 2010년 가을을 보낸 분들이라면 다양하게 펼쳐진 국제 규모의 전시들 속에서 아마도 이러한 질문들에 도달했을지 모른다. 물론, 광주나 부산 비엔날레의 경우 미디어아트에 대한 활용 관점으로 보기에는 행사의 성격 자체가 다를지 모르나, 2010년도에 진행되었던 두 비엔날레는 주제나 형식면에서 미디어아트에 관한 의존도가 높은 행사였음을 상기해본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사용한 나머지 두 개의 아트 페스티벌 (미디어시티 서울-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과 동일한 수준에서,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비교-분석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판단이다.
처음 살펴볼 행사는 1995년 한국에서는 처음 개최된 비엔날레인 광주비엔날레이다. 2010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 되는 해로서 광주 비엔날레는 그 8회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은 시인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되었을 때부터 쓰기 시작한 연작시편의 제목인 '만인보(萬人譜, Maninbo/10000 LIVES)'를 그 주제로 선정하여 다양한 인간의 삶 속에서 광주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표출시키려 한 듯 하다. 예술 총감독인 'Massimiliano Gioni'는 행사 이전부터 광주 및 아시아 문화-예술에 관한 관심을 피력해왔다. 물론, 이러한 관심과 의지 표명은 외국인 총감독이 국내 행사를 맡았을때마다 천명되었던 것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2006년도의 제 6회 광주비엔날레(열풍변주곡)과 어떠한 차별점을 지니고 아시아 문화예술을 조명할 것인지, 또한 '만인보'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어떻게 현대예술의 장면과 접목시킬 것인지 걱정과 기대가 섞인 채 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
1. 광주비엔날레 2010 / 만인보
이미지에 투영된 인간l글. 선윤아 (앨리스온 에디터)
"산다는 것은 곧 사진 찍히는 것이다."라는 수잔 손탁의 정의는 이전보다도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더 와닿는 말일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만 떠올려봐도 이를 수긍할 수 있다. 혹은 이제는 유행도 지나버린 싸이월드 미니홈피, 혹은 페이스북, 혹은 개인 휴대폰 안의 사진첩을 떠올려보면 어떠한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을 증거로 남기고, 순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로 붙잡아 놓으려 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미지의 대상인 실체와 이미지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미지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불멸성'의 조각이기 때문이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의 <만인보>는 1900년대 초반 이후를 기준으로 예술의 역사 속에 펼쳐져 온 '이미지'의 서사시이자 그에 대한 기록이다. <만인보>展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미지'가 가진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레지 드브레의 지적대로 이미지에 대한 물신숭배로 가득찬 이 시대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생성되고 유통되며 존재하고 소멸되는지 아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결국 이 전시는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서는 초상의 이미지가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흥미로웠던 초상과 관련된 작품 중에, 2가지 층위에서 이미지의 생애를 보여주는 [예징루, 퉁밍쉐가 발견한 앨범]이 있다. 예징루(Ye Jinglu)는 1901년을 시작으로 1907년부터 1968년까지 매년 한 장씩 자신의 사진을 찍어 총 62점의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예징루라는 개인의 일생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사진의 구도와 기법 등에 나타나는 사진 예술의 시대적 변화를 함께 읽을 수 있는데, 이 지점은 우리가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것은 '이미지'가 그 '이미지'를 담고 있는 매체와 매체의 시대적 속성을 반영하여 표현되고 전달된다는 당연한 전제를 상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만인보>展에서 전시된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매체적 특성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이미지의 대상이 되었던 주체들이 매체를 바라보는 시각과 매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인과관계 아래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의 주제를 투영한다. <만인보>라는 거대한 '이미지'의 집합 안에서 미디어는 ‘삶의 변화’를 반영하는 매개이자 도구로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프랑코 바카리(Franco Vaccari)의 [Leave On The Walls A Photographic Trace Of Your Fleeting Visit]과 같은 작품은 미디어 아트가 동반하는 대표적 속성 중의 하나인 ‘관객참여’가 앞선 시대에 어떻게 출연하였는지 보여주었다. 1972년에 처음 선보였던 작품을 거의 40년 만에 재 전시한 이 작품은 '이 벽에 당신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시오' 라는 제목대로 관람자가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이미지 제조 기계를 설치해놓고 직접 자신의 사진을 벽에 붙이는 행위로 작품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40년 후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는 지금으로선 새롭지 않은 이 작품이 생경한 경험이었을 당시의 풍경을 상상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 작품에서 '새로운 미디어'를 마주하는 관객의 수용도가 얼마만큼 달라져왔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다. 폴 샤리츠의 [Shutter Interface, 1975]에서 산야 이베코비츠의 [On the Barricades, 2010]까지, <만인보>展에 등장한 여러 작품을 통해 예술의 스펙트럼이 뉴미디어로 인해 확장되어 온 과정을 어렴풋이 그려본다. 폴 샤리츠는 자신의 영화적 실험에서 스토로보 효과와 같은 새로운 기법들을 고안해냈던 전략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설치작업들을 보여준 작가로, 전시된 셔터 인터페이스는 영화 프로젝터에서 투사되는 사각의 빛과 음향의 교차는 기계가 뿜어내는 시청각적 자극을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흡수하고 감각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미디어가 명상의 도구로 치환될 수 있음을 제시했던 작품이다. 산야 이베코비츠(Sanja Ivekovic)의 [On the Barricades]경우에는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여 작품의 의도를 '완성'시킨다. 이 작품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품으로 생전의 망인들의 초상 사진을 디지털 합성을 통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으로 바꿈으로써 평안한 안식을 기원하는 작품의 의도를 표현한다. 여기에 자원한 일반 시민들이 전시장의 한가운데 앉아 추모곡을 부르는 퍼포먼스가 더해진다.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 추모의식은 가상의 이미지와 공간성에 '본질'을 입히고 디지털 기술이 창조한 가상의 초상은 숭고한 기념비로 치환된다. 이와 같이 재현된 이미지 뿐만 아니라 왜곡되거나 변형된 이미지,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세계까지도 창조해버리는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은 단지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의 주제로 자리잡았으며 무한히 확장되는 가상의 공간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초대한다. 나아가 다양한 범주와 영역을 넘나드는 복합적 매체 실험이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양상이 <만인보>展에서 비중있게 소개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흐름을 선도했던, 혹은 그 과정에 있던 작품들을 통해 지난 100여년간 일어난 예술의 변화, 매체 예술의 흐름 가운데 있었던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각각의 작품에서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전시 자체를 읽는 것은 조금 힘겨운 전시였다는 점이다. 무한히 확장 가능한 '이미지와 인간'이라는 주제의 성격 상, 아우르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젖혀둔 채, 커다란 전체 집합 안에 떠도는 부분 집합들이 나열되어 있었던 듯한 인상이 남는다. 여기에서 '미디어'라는 교집합이 잘 드러났다면, 예술의 미디엄으로써 미디어가 어떻게 확장되고 변모해왔는지가 인터페이스를 통해 제시되고 이를 보조삼아 각각의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삶과 변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면, 이 전시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가 관객들에게 보다 깊이있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의 말처럼 극도로 회화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지의 집합이 아니라 적합한 인터페이스가 아닐까.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비약적으로 사진이라는 매체가 주요하게 활용된 비엔날레였다. 그러나 역시나 광주비엔날레에 있어 미디어는 자료를 담는 '틀'로서 말 그대로 '매개하는 무엇'으로 표출되었을 지언정, 그 자체로 주제에 근접하는 면면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부분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광주비엔날레는 현대 예술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우선적 목표이며, 특히나 이번 비엔날레이 경우 기록보관소의 기능을 수행하려 했다는 점은 행사 전부터 피력되었던 사실이다. 다만, 자료를 모으는 행위 - 또한 그것을 해석하는 행위가 예술의 한 요소가 될 수 있고, 그러한 경로에서 미디어가 전유된다는 사실만은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행사는 역시나 광주 비엔날레와 여러 부분에서 비교되는 행사인 '부산비엔날레'이다. 부산의 경우, 앞서 아시아의 비엔날레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광주와의 선명한 차별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여러 각도에서 그간의 부산의 시도와 노력 그리고 차별 지점들이 발견될 수 있을테지만, 이번 커버스토리에서 주목하는 '매체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광주와는 다른 자세와 입장을 보여주었다.
2. 부산비엔날레 2010 / 진화속의 삶
진화속의 삶을 담는 미디어라는 그릇l글. 류임상 (앨리스온 아트디렉터)
30평 남짓 되는 검은 공간을 빛 조각들이 가득 채운다. 중앙의 기괴한(?) 유아 형상은 웃는듯 우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인류의 시작처럼, 어딘가 낯선 곳에 떨어진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다. 그것은 생존의 본능을 넘어 ‘편리한것’ ‘쉬운것’을 거쳐 ‘즐기는것’으로 연착한다. 인류의 진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 되어왔다.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원인(猿人)이 직립을 시도하고, 도구를 취하여 세상을 정복해 나가던 고대에 비해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진폭이 지극히 미비해 보일지 몰라도, 인류는 지금 이시간에도 끊임없이 부단하게 진화 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기술로 인해 우리의 감각이 확장되며 시 공간이 축소되어 가거나 확장 되어가는 요즘. 더이상 우리의 정신(혹은 지성)은 신체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네트워크를 따라 흐르며 더 큰 의식을 만드는 현대 인류의 진화는 과거의 물리적 진화에 비해 그 진폭이 깊고 넓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은 한 호흡만 늦춰도 따라갈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 간다. 어쩌면 수천년이 지난 후의 후대들은 선사 그 어느 시기 보다도 지금의 우리를 가장 치열한 진화속의 삶(Living in Evolution) 을 살아간 세대라고 부를지 모를일이다. 앞서 인용했던(부산 비엔날레에 전시 되기도 했었던), 코노이케 토모코의 <지구아기> 울음은 그래서 더욱 진폭이 크다. 더 멀리 날아가는 빛의 잔향이 진화를 향한 인류의 울부짖음을 대신 하는 듯 하다.
인류가 진화해 가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동안, 예술은 그 지형도의 어느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까. 예술은 인류의 진화를 기록하기도 하고, 진화를 돕기도 하며 그 시간과 함께 했으리라. 예술가의 상상력이 새로운 기술의 단초가 되기도 하고, 예술 작품의 섬세한 결이 인류를 풍요롭게, 혹은 조심스레 매만지며 지성을 살찌우게 했다. 예술가의 인생을 담은 작업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지만, 그 경험(작업)이 공유되며 인류에게 유사 경험 혹은 감흥을 전달하고, 그 감정은 증폭되어진다. 예술가의 경험은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를 변화 시켜 왔던것이다. 예술이 인류의 진화를 도와 지성을 자극한다는건, 문헌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겨지기에는 모호한 영역이지만 분명 존재하여 왔다. 특히 고대의 예술이 기술과 하나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창조적인 생각의 시작이 예술로서 발원 된다면 기술로서 보완/정립 된다. 즉, 가장 예술적인(창조적인) 생각이 인류를 진화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수많은 창작물들이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 졌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이렇게 기술과 예술, 창조와 진화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힘차게 순작용 해왔다.
내면에 소통이라는 의미를 깊게 새기고 있는 미디어(media)가 새로운 예술의 캔버스, 혹은 붓으로 쓰이게 된것은 인류가 진화 하는것에 있어서의 예술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진화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돌아봄과 보완에 있다. 기록과 전달이 주요한 특성인 미디어는 보다 실제적으로, 혹은 왜곡과 과장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다큐멘터리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기록성은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의 흔적들을 새삼스럽게 환기 시키며 새롭게 조망한다. 이러한 돌아봄의 미덕은 진화의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미디어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세상을 비틀고 전복하고자 한다. 비판과 긍정의 힘으로 겹겹이 쌓여져 가는 기록의 미디어 아트들은 인류의 진화에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며 그들의 걸음을 교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로, 혹은 미디어 아트로 증폭되는 인류의 상상력은 인류에게 어떠한 잔향을 던져 주고 있는가? 즉 어떠한 방법으로 인류의 진화를 보완하기 위해 기능하고 있는가. 상상력 증진의 측면에서 미디어아트는 인류의 필요를 보다 큰 폭으로 충족시킨다.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인 미디어 아트 작업들은 관객을 자극하고 각 산업에 여러가지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화, 음악, 상업 광고등의 컨텐츠와 같이 직접적인 연관 관계에 있는 산업은 물론이고, 과학이나 사회 참여등 여러가지 형태로 그들을 자극한다. 미디어 아트는 상상력이 현실을 만나는 행복한 협업의 과정으로 인류를 이끈다. 또한 작가들의 상상력은 자유롭게 예술 작업으로 펼쳐지며 이것은 관람의 형태로 완성된다. 관람객은 다양한 형태로 그 감흥을 수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적, 혹은 산업적 진화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전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부산 비엔날레의 주제는 진화속의 삶(Living in Evolution)이다. 특히 예술이 인류의 진화에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전시에서 이야기하려는 진화의 속성 중 앞서 언급하였던 돌아봄과 보완의 요소들은 수많은 예술 중 미디어아트의 형식으로 언급되며 더욱 명확해 진다. 전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미디어 아트 작업들은 단지 관객의 즐거움만을 소비하는 역할을 넘어 주제에 명확히 다가서는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즉, 미디어 아트가 가진 수많은 특성 중에 우리를 돌아보고, 앞을 내어다 보는 힘이라는 특징을 부산 비엔날레는 잘 드러내고 있었다. 사타(SATA)의 ‘별속에서 노는 사타’를 보면 아득한 유년의 추억을 환기 할 수 있는 아련한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업은 지극히 회상적 이면서 미래적이다. 환상적인 영상 아래 관람객은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꿈꾸게 된다. 다시말해 인류의 과거를 돌아보며 긍정적인 미래로 ‘진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카타르지나 코지라의 ‘봄의 제전’은 고속 회전 되는 알몸의 사람들이 군무로 보는이를 압도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간혹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미묘하게 혼합되는 섹슈얼리티를 강조한다. 아름답지 않은 인간의 육체가 성(SEX)의 구분없이 뒤섞이는 이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탈 성정체성과 새로운 유형의 인류의 탄생등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감상은 관람객에게 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가질 수 있게 자극한다.
예술이 세상에 어떠한 도움을 주는가? 미디어가 도입된 예술에서 그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 그것이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예술이 가진 본연의 진화 속성을 미디어는 더욱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2010년 부산 비엔날레의 주제는 '진화속의 삶'이다. '진화'라는 테제가 어쩌면 유행을 거듭한, 광범위한 영역에서 제시되고 회자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부산 비엔날레는 좀 더 광범위한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 한 듯 하다. 또한 매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evolution)'라는 테마는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통해 표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반가운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쉬운 접근이 왠지 불안하다. 그 이면으로 나타날 수 있는 주제의 광범위함과 모호함이 드러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진화-미디어'는 너무나 많이 사용된 짝패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고 속에서도 '진화'라는 개념을 가시화하기 위해 항상 뉴미디어를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일본인 총감독 '아주마야 타카시'는 이러한 점들을 우려했던 것인지, 이번 비엔날레가 표방하는 '진화'의 개념을 '인류의 지적 진화'로 제한시켰다. 당연한 제한이자 전제이다. 최소한의 이러한 '틀'이 제시되지 않는 '진화'라는 개념은 너무 모호할 수 있다. 더더군다나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등장시킨 행사들에 주목해보려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광주와 부산 - 두 개의 비엔날레에서의 미디어의 역할은 크게 보자면 결국 '주제를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예술에 있어 미디어-매체의 역할은 그저 단순하게 '매개하는 그 무엇'을 넘어선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미디어아트'를 주요하게 다루는 국내외 행사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국의 대표적 미디어아트 행사인 '미디어시티, 서울 (2008년까지는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지만,)을 통해 현시대 미디어아트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3. 미디어시티 서울 2010 / 신뢰(Trust)
미디어 아트, 모더니즘적 접근l글. 허대찬 (앨리스온 에디터)
"미디어 시티 서울 2010은 <신뢰Trust>를 통해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이념을 시사하고자 하지 않으며, 미디어의 기술적 이고 학구적인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폭넓은 의미를 좀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며, 좀더 개인적인 시각에서 현대사회의 트라우마를 공유하고자 한다." -전시서문 중-
올해의 미디어시티 서울은 그 여느회차의 행사와도 달랐다. 지금까지 미디어시티는 당대의 미디어 아트의 모습들, 기술 매체와 기술환경을 기반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아트의 모습을 '미디어 아트'라는 이름 아래 보여주었다면 올해는 다시 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미디어'란 무엇인가. 2000년, 제 1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의 송미숙 총감독이 언급했듯 본 비엔날레에서의 미디어아트는 새로운 테 크놀로지를 방법적으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산업과 연계된 새로운 예술의 영역이었다. 이번 2010년의 주최측은 이후 5회 에 이르는 행사 동안 긴장감 없는 전시 주제, '미디어 아트'라는 형식적 분류 안에서의 선택과 집중이 결과적으로 안일한 기획으로 진행되었다는 지점을 문제제기하고 행사의 제목부터 새롭게 접근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사용되던 '서울 국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라는 명칭 대신 '미디어 시티 서울'을 사용했다. 이는 미디어, 도시, 서울을 동등하게 배치하고 세 개념과의 관계를 다시금 고찰하려는 의도이다. 지금까지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는 도시 혹은 서울 이라는 키워 드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획진은 이를 묶을 수 있는 주제로 "신뢰(Trust)"를 들고 왔다. 미디어란 무엇이며 미디어에 있어서 신뢰란 무엇인가.
이러한 재질문에 대한 해답 찾기로 이번 미디어 비엔날레는 매체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전의 매체가 new라는 단어가 감추어진, 새로운 기술이 도입된 시대의 매체상이었다면 본 비엔날레에서는 ‘매스 미디어’에 집중한다. 여기서의 매스미디어란 기계기술 수단을 통해 정보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대량 전달하는 매개체 혹은 전달시스템이다. 단, 매스미디어의 일반적인 통용의미, 언론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을 통틀어 전시 기획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을 꼽으라면 <표적 사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흑백사진 몇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표적 살인'은 이스라엘 당국이 테러를 막 는다는 명분 하에 반 이스라엘 단체의 인사들을 암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애국이라는 명분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 행위의 시점을 그대로 가져온 이 작업은 시각적인 지점부터 충격적이다. 망원 렌즈 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은 마치 저격총의 스코프를 통해 표적을 바라보는 시점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일반 팔레스타인 사 람들을 암살에 사용되는 스코프를 사용해 찍음을 통해 시선이 가져오는 강렬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배경을 알고 이미지를 읽어내야 한다. 그렇게 드러나는 작품의 내용은 강렬한 프로파간다를 내포하며 관람객들에게 주입된다.
본 비엔날레는 끊임없이 유입되는 기술과 전달에 대한 반응과 몰입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매체를 바라보는 수축적 개념의 전시였다. 최신의 기술과 작품 앞에 섰을 때 강요되어 온 뭔가 반응할 것 같은 작품들의 소개에서 몇발자국 물러나 관조적인 조망하기를 청한다. 지금까지는 물리적인 접촉과 접근을 통한 체험과 지각적인 몰입을 요구했다면 이번에는 한 발 떨어진 물러나서 바라보기, 즉 이미지를 '읽고' '사고하기'를 요구한다. 지금까지 미디어를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서 매체미학적 관점, 즉 감성적, 지각적인 몰입이 진행되고 있었다면 이번 미디어시티는 모더니즘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새로움의 첨병,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술 등 '새롭다', '다르다'라는 구호에 대한 의무감에 사로 잡혀있던 미디어아트였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넓어지고만 있는 상황에서의 수축적인 관조의 시도가 이번 기획의 목표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의 시의적절성과 설득력은 아쉽게도 몇 가지 문제에 의해 묻혀버렸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미디어 생산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전문사진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을 넘어 핸드폰에 기본 장착되어 1인 1카메라의 시대가 된지 오래다. 작가 백남준이 소니의 포타백을 통한 영상생산의 시대를 연지 반세기만에 역시 핸드폰에 기본장착된 카메라를 통해 누구나 영상을 생산하고 있다. 개개 인이 만들어 낸 이미지는 flickr나 youtube를 통해 공개되어 전시된다. 사회 혹은 다수의 대중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화자가 제한되어 있던 시기는 끝났다. 그리고 이미 미디어의 활용과 그에 따른 의미의 전달과 변형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체화하고 현상 자체를 즐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미디어의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드러내고 내용의 전달을 강요하는 방법은 무리가 있다. 기획의 태도는 이번 비엔날레가 바라보고자 했던 매스미디어에서 역시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기존의 매스미디어 TV, 신문, 라디오와 함께 새로운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들이 그것이다. 기존 매스미디어가 완성된 사진, 텍스트, 영상을 일방향적으로 송출했다면 이들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미디어들을 수용, 가공, 편집하고 또다른 정보를 더하여 재매개하고 재창출을 행한다. 여전히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무수히 많은 청자 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화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다를 수도 있고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 새로운 매스미디어는 현재 꾸준히 이야기되는 ‘쌍방향성’을 지닌다. 이들 미디어는 이미 기존의 매스미디어 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번 비엔날레의 맹점은 이 지점에서 존재한다.
금년의 기획에서 이러한 새로운 매스미디어에 대한 언급이나 접근은 없다. 이렇듯 지나치게 올드 미디어, 즉 신문 등의 인쇄 뉴스와 사진, 비디오 기반의 다큐멘터리 등에 작품을 할애한 점 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점이다. 뉴미디어 뿐 아니라 인쇄매체와 같은 오래된 미디어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겠다는 목표는 그 '오래된 미디어'가 주인공이 되면서 온데간데 없어졌다. 이는 기획 목표인 미디어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바라 보았다기 보다는 과거 회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미디어가 가진 폭넓은 의미를 좀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라는 의도는 셀렉팅된 작품들을 통해 오히려 미디어를 제한적으로 바라본 이전과 대비되는 방식의 접근이 되어버렸다. 결국 미디어 시티 서울 에서의 미디어는 기획의도대로의 중립적인 접근이 아닌 미디어의 가능성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부정하는 듯한 양상으로 까지 읽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홍보 방식에 있어서 이번 비엔날레는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활발히 사용되어 기존의 미디어 비엔날레보다 행사의 진행과 상황이 친숙하고 피부에 와닿게 전달되었다. 전달된 정보에 대한 피드백 역시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시장이 어두워서 제대로 동작하지는 않았지만 작품 옆의 QR코드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의 정보를 좀 더 손쉽게 얻게 해 주었다. 다양한 미디어들이 개개인의 능력과 감성에 의한 결과물로 등장하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시대에 무한 확장하고 있는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정리해 보자는 기획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지만 이러한 문제의식과 동기 부여를 제기하는 부분, 즉 기획의 입장에서 가고자 하는 방향을 묶는 이유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으며 작품들이 지나치게 미디어의 카테고리 중 올드 미디어에 집중되었다는 부분은 아쉬운 지점이다. 결국 이번 비엔날레는 '미디어 아트'에 관한 비엔날레이라기보다는 '미디어'와 '아트'에 관한 비엔날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디어시티 서울 2010'은 우리가 최근 기대한 '미디어아트'에 대한 예측을 전복시켰다. '비엔날레'라는 형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감성에 기댄 초기명을 복원시킨 이번 행사는 어떠한 측면에서는 '미디어아트'에 관한 대중들의 근본적 자세 교정을 요구하는 듯 하였다. 깊이가 없다고 비판받던 미디어아트가 현 시점에서 예술의 장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유들이 제시되었다. 다만, '신뢰'라는 어쩌면 진부한 미디어에 따라붙는 주제어가 관람객들에게 잘 전달되었을지 의문이다. 주제를 통해 미디어가 지닌 '신뢰'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최근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뉴 미디어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TV나 신문 등의 미디어를 통해 제기된 신뢰 문제를 현재의 시점에서도 과거와 동일한 미디어에서 끄집어낼 수 밖에 없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보다 새로운 미디어에 집중했던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은 어떠할까?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은 2010년 그 2회째를 맞이하는 행사이다.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총감독 : 김형기) 행사에 비해, '아트센터 나비'라는 미디어아트 전문 센터(총 기획 : 노소영)가 기획/진행을 맡은 이번 행사는 어떠한 모습으로 관객들을 맞이하였을까?
4.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2010 / Mobile Vision : Unbounded Aesthetics
정렬되지 못한 파편들의 잔상l글. 이은아 (앨리스온 에디터)
인천미디어페스티벌2010(이하 인다프)에서는 여러 관점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구체화된 테크놀로지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을 적극 활용한 작업들이나, 새로운 매체형식실험에 대한 고민을 접할 수도 있었으며, 미디어아트의 발현 과정에 대한 단초들을 얻을 수 있는 계보까지 포함해 크게 3가지 정도의 포괄적인 관점을 두루 제시하였다. 미디어아트의 지속적인 발달상, 진보적 입장을 대변해왔던 과년도의 서울시립미술관의 미디어아트비엔날레들과는 달리 올드미디어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춰져 버린 <미디어시티서울2010>에서는 볼 수 없었던 최근의 뉴미디어에 기반한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인다프에서는 더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인다프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인터랙션 하는, 이제는 익숙해진 효과들을 사용한 <위로부터의 손(2008)>이나 통신 장비를 매개로 한 <한숨소리로(2009)>, 밀폐된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뿜는 CO2의 양에 의해 움직이는 <열린기둥(2007)> 등의 작업들이나, 공간을 시각화하는 <빛의 속도(2010)>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기존에 익숙해진 효과들을 사용하지만, 작가의 의도에 의해 달라지는 표현들이 어떻게 새롭게 제시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인시켜주었다. 여전히 과거에 미디어아트라는 장르에서 제시되었던 효과들이 가공에 의해 지속적으로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또 한편으로는 ‘환경’이라는 주제의식이 네트웍을 통한 작업이나 로보틱 시스템을 활용해 기존 매체 실험들의 결과물을 변주하여 새로운 미디어아트 작업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네츄럴 퓨즈(2009)>, <열린 항해-프로테이(2010)>). 또한 <미분생활 적분도시(2010)>같은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의식을 전하기 위해 미디어아트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대체 불가능한 매체와의 결합이 가져오는 시너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2008)>이나 <대지(2008)> 등의 작품에서는 ‘공간’이라는 매개체와 뉴미디어가 결합하여 사람들에게 기존과 대비하여 어떠한 공간 인식의 변화를 불러오는 지에 대해 묻는 등의 공간에 관한 실험적 작업들도 눈에 띄었다. 언급한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뉴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효과들을 경험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전달받거나 적극적으로 반응해 작품의 일부를 형성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품에서 기능하는 미디어의 속성은 대체불가능의 강력한 작품의 원동력이 되며, 특히 최근에 등장한 미디어의 속성에 초점을 맞춘 작업들은 이미 새로운 미디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더 폭넓은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에 힘을 싣고 있었다. 소개되었던 여러 작품들에서 나타나듯이 인다프는 2010년에 개최되었던 아트페스티벌 가운데 그나마 가장 많은 부분을 최근의 미디어아트 씬을 가늠하게 하는 지표들에게 할애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미디어아트 씬을 가늠하게 하는 앞의 작업들과는 달리 과거 미디어아트에서 제시해왔던 효과들을 단순화하여 적용한 작업들 역시 인다프에 공존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다프의 전시 일부는 국내 유명 아티스트들의 작업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디지털화(化)’ 되어 제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디지털화 작업이 어떠한 의미를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매체 형식에 대한 실험 정신을 토대로 발전한 미디어아트에서 단순한 디지털화는 단지 ‘신화’적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의 작업이 가지고 있던 장점들을 오히려 파편화 시킨 것 같은 디지털화된 작품들은 아직 익숙하게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스마트폰 안에 갇혀 원래 작품이 전달하던 의미를 가치 없게 만들었다. 단지 인다프 일부 전시에서 보여준 이러한 작품들 뿐 아니라, 아직도 다수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뉴미디어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접근하기보다는 단순히 디지털화된 작업에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이나 작가들에 태도에서는 필사적일 정도의 새로운 매체로의 전환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진다. 이러한 ‘디지털화(化)의 신화’는 이미 최근의 미디어아트 씬에 대해 충분히 관람한 관람객에게 영향을 못 미칠 수밖에 없다. 기존의 현대 미술계의 전시에서 이러한 ‘디지털화’ 작업들이 다뤄졌다면 그럴수도 있지하며 넘어갈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씬을 다루는데 초점을 맞춘 인다프 같은 미디어아트페스티벌에서 이러한 태도는 전체 전시의 불균형을 초래했다고 생각된다. 광주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계보를 전면에 제시하였고, 그 하위에서 미디어아트를 보여주었다. 상대적으로 인다프에서는 ‘로이 애스콧’이라는 선각자를 통해 미디어아트 초기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는 ‘로이 애스콧’ 전을 통해 미디어아트의 계보에 대해서도 관람객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이 섹션은 디지털화된 유명 작가들의 작업들보다 더 관심을 가질만한 섹션이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아트페스티벌의 관람객들을 이미 직간접적으로 미디어아트의 체험에 익숙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도입부에서 이 섹션을 제공했다면 이러한 미디어아트의 발생적 측면이나 계보학적 측면을 짚어주는 것도 의미 있고 관심을 끌만한 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다프는 다양한 관점과 더불어 한국 미술계에서 다루지 않은 최근의 미디어아트 작업들을 보여주고자 했던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넓어진 스펙트럼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에 작품마다, 섹션마다 단절된 층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전체적인 전시의 완결성을 제공하지 못했다. 또한 관람객의 미디어아트에 대한 이해도에 대한 고민 역시 전시 전체에 녹아들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너무 쉬워서 다가가고 싶지 않은 작품에서부터 작품 설명을 재차 읽어야 이해가 되는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는 상황은 어느 편의 관객도 만족 못시키는 애매한 상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인다프는 긍정적인 부분들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조율의 문제로 긍정적인 면이 묻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잘 그려진 전체의 그림 아래에서 디지털화에 대한 강박보다는 뉴미디어가 제공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매체 실험적인 작품들이 포진되어 있고, 지역적 관람객 층위를 포괄하고자 하는 작품들 또한 적소에 배치된, 전체적인 조율이 되어있는 미디어아트페스티벌은 꼭 “next one”에서만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2010년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은 앞서 소개되었던 미디어시티 서울 2010에 비해, 대중들이 보다 편하게 미디어아트를 직접 체험하고 즐기게 만들었던 행사였다. 모바일 기술을 활용한 예술적 시도라던지, 미디어아트의 초기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만들었던 시도들은 관객들에게 미디어아트'가 차세대 예술로서 분명 공고한 위치를 잡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미디어아트가 지닌 단점 내지는 약점 또한 노출시켰던 행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앞서의 미디어시티 서울이 다소 어려운, 그리고 맥락을 파악해야만 하는 미디어아트를 소개하여 대중들에게 난해한 미디어아트를 경험시켰다면, '인다프'는 '이것이 과연 예술일까?'라는 근본적 질문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5.마치며
4개의 행사는 저마다의 기획된 취지와 놓여진 맥락이 다르다. 그러기에 조심스럽다. 더군다나, 각 행사에서 활용된 혹은 투영된 '미디어의 역할과 미디어아트의 위상'이라니. 이러한 고민들에서 본 기획 기사를 발행하기까지에 많은 고민과 지연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2011년이 벌써 몇달이나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이 기사를 내보내는 것에 관하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미디어아트는 20세기 후반에 소개된 이래, 지속적인 견제와 혹평들을 겪어왔다. 몇 가지 주요한 비판들을 열거해보자면, '기술적 요소들에 치중하여 예술로서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라는 점을 첫 번째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본질적인 미디어아트가 내포한 딜레마일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예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속성들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라는 연이은 질문들을 발생시킨다. 또한 저작권 문제 및 그로부터 기인한 상업적 시장이 형성되기 어려운 점 등도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아트는 시간이 갈수록 보다 근본적 예술적 경계들을 건드리며 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성장하고 팽창하고 있다. 국내에서 미디어아트에 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명된 해를 2000년 남짓으로 보자면(2000년 서울에서 '미디어시티 서울'이라는 미디어아트 전문 페스티벌이 만들어진 이후 여타의 지역에서 앞다투어 미디어아트 전문 행사들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는 다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이제 '미디어아트가 과거의 예술과는 어떠한 점이 다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또 꺼내놓는 것보다는, '어떠한 매체를 통해 예술이 우리에게 새로운 감성을 전달하고 있는가'에 집중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미디어'라는 '아트'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점점 그 모습을 감추어간다. 마치 처음 미디어아트가 소개될 때, '미디어' 앞에 붙는 '뉴'라는 수식어구가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에는 필요한 것이 있다. 미디어아트가 지닌 진정성에 관한 반성과 다양한 실험에 대한 추구가 그것이다. 특히 국내의 경우, 미디어아트가 보여주는 화려한 쇼만을 무비판적으로 즐기기보다는 보다 실험적인 미디어아트의 수용과 소개가 시급한 상황이다. 화려함과 반짝거림을 강조한 미디어아트의 일면을 체험하고 즐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디어라는 기술적 시도가 결합된 예술'이 제시할 수 있는 광범위한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후 국내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현대 예술의 장에서 이러한 미디어아트의 다양하고 진정성있는 모습을 계속하여 만나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