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무르스murus’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도시의 울타리를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보호와 안전을 뜻한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 ‘모이로스moiros’는 그리스의 세 여신인 ‘모이라이Moirai’라는 낱말과 비슷한데 운명의 손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생명줄을 잣기도 하고 끊기도 하는 역할을 하는 여신들을 지칭한다. 신화적 해석에 따르면 벽은 모성적 보호 울타리인 동시에 부성적 금지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에서 볼 수 있듯이 벽은 양면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자 삶의 근원이기도하며 한편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 고립과 억압의 상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벽으로 인해 생기는 경계는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과 밖, 성聖과 속俗, 여기와 저기라는 관계를 유형화 하면서 하나의 차별을 만들고 극단적인 두 개의 공간이나 개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1
미술관이라는 특수한 기능의 건물에서 순백색으로 칠해진 벽들은 일반적인 벽들과 분리되며 작품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곳, 나아가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그것들을 예술이라는 지위에 올려놓는 권위적인 수단으로도 해석된다. 이에 반해 건축물이나 주변의 환경까지 작업요소로 끌어들인 제니 홀저Jenny Holzer나 바바라 크루거Babara Kruger와 같은 작가들도 있었다. 기존 예술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입체적 예술, 공간과 함께 인식되는 환경 예술의 의미’를 담아내려한 것이다. 2
현재 type:wall 전시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는 설치미술전이다. 벽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한 이번전시는 미술관의 환경과 그 안에 분리되어 있던 작품의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전시는 소마미술관 제1전시실부터 제5전시실까지, 각각 한 명 혹은 한 팀의 작가들에게 하나의 전시실이 제공되어 미술관으로써는 파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작가들의 작업과 미술관의 물리적인 구조가 합쳐진 결과로 공간이 작품이 되고, 작품이 공간의 일부가 된 여러 모습의 '벽'이 있었다.
다양한 벽들의 향연
‘2010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박기원은 공간을 주제로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2010 올해의 작가 박기원 전 :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에서의 작품들이 그러했듯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작품을 소마미술관 제1전시실의 장소적 특성에 주목해 ‘북극’이라는 작품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제2전시실 안에 들어서면 폐벽돌로 쌓아올린 거대한 벽을 마주하게 된다. ‘벽’이라는 제목의 김승영 작가와 오윤석 사운드 아티스트의 공동작업이다. 3개의 엇갈린 벽들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벽면에는 스피커가 부착되어 있고 각 벽마다 소리가 하나씩 울린다. 이동하면서 더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길은 끝이 난다. 작품 사이로 난 좁은 길과 걸어가면서 들리는 소리로 인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벽의 존재가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지하루와 그라함 웨이크필드Ji Haru & Graham Wekefield의 ‘인공생태계:이중의 시간’은 키넥트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이용한, 실재와 가상공간을 가로지르는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이다. 제3전시실 안에서 관람객들은 일반적인 벽과 스크린 벽, 그리고 스크린 벽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가상공간의 벽을 만나게 된다. 작가가 벽을 보면서 저 벽 안에는 어떤 공간이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는 이 작업은 어두운 스크린 벽 안에 인공생태계의 모습을 구현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주황색의 에너지원으로 형상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미생물이 생성-증식된다. 다음으로 그 미생물을 먹고 사는 뱀과 뱀의 허물에서 생성되는 일련의 모형들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형상들이 모두 연계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현실의 돌바닥에 서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있는 관람객은 가상의 생태계와 하나가 되는, 벽이 존재하되 벽이 사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제4전시실의 반투명한 안막천으로 쌓여져 있는 공간에 들어서면 천 너머로 조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설치되어 있는 레일을 따라 지나가는 조명은 그 앞에 형상들의 그림자를 천에 투과시킨다.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흡사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이승애 작가의 ‘원더 월’이라는 작품이다. 원래 종이와 연필로 작업하며 가상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생명체인 몬스터들을 창조하던 작가가, 기존에 자신이 구현하던 작업들과 다른 방식을 가지고 시도한 작품이다. 작가는 그림자와 여행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자신이 여행 중에 모은 피규어나, 작가의 주된 작업물인 몬스터를 OHP필름에 인쇄한 것들을 이용하여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자를 만든다. 여기서의 벽은 기존의 딱딱한 개념을 벗어난다. 시각적인 차단은 하되 사람들한테 뭔가를 알리는 공간으로의 역할도 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상상을 투과시키고, 관람객들에게도 그 자신만의 무언가를 투영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는 박기진, 임승천 작가의 '숨'이 있다. 작품명인 ‘숨’은 말 그대로 ‘숨을 쉰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라틴어인 ‘sen’이라는 단어로 풀이되며 ‘자신의 존재를 성찰한다’는 뜻도 가진다. 이 공간에는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의 가변적인 벽과 기존 전시실의 벽들이 마주하는 모습이 연출되어 있다. 전시장에서 첫 번째로 보이는 거대한 스케일의 벽은 수축과 팽창의 반복과 더불어 커다란 기계음을 내뿜으며 큰 숨을 쉬고 있다. 그 뒤로는 기존 소마미술관 구조의 벽이 마주하고 있다. 그 다음 벽에는 조명의 꺼짐과 켜짐이 천천히 반복되며 조용한 숨을 연출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로 움직이는 벽들을 통해, 정형화된 환경으로서 쉽게 지나쳐버렸던 벽에서 생명력을 발견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움직이는 벽은 움직이지 않는 벽과 대조되면서 그 존재감이 더욱 부각된다.
새로운 형식 + 벽 = 새로운 인식
글. 김명희(국민대학교 TED 디자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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