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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보리스키 포인트 - 박병래 개인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7. 26. 22:09


째보리스키 포인트 Zeboriskie  Point - 박병래 개인전

 
2011. 08.03 ~  08.21

통의동보안여관

Opening _ 20110803 (수) pm 5

Opening performance _ 20110803 (수) pm 6 : 30

performer _  최정우, 이용창, 김성배, 유가영, 공영선



 : 세개의 채널로 구성된 작품 <Zeboriskie Point (2011)>는 실험음악을 비롯한 무용과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통해 마치 재즈의 ‘잼(Jam)’과 같은 형식으로 장르간의 라이브 충돌을 통해 전시장에

 서 작품에 대한 또 하나의 조우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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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빗장이 풀리고(The time is out of Joint)”


이번 보안여관에서 열리는 박병래의 다섯 번째 개인 전시 ‘Zeboriskie Point’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 전시이다. 하나의 특정 도시가 지니는 특수한 역사성에 주목해서 식민화, 근대화, 산업화, 신자유주의라는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시각적 화면으로 오버랩시키려는 위용 있는 프로젝트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싱글 비디오를 설명하고 분석하기보다 박병래가 누구이며 그가 어떠한 사상에 고취되어 있으며 그의 미감은 어떠한 특질을 지니는가 선명하게 알아야 한다.

박병래는 내가 아는 몇몇 되지 않는 1974년 나와 동년배 작가이다. 박정희라는 절대군주를 모셨던 유년기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일본의 텔레비전 만화에 열렬히 감동했으며, 이와 대조되는 색채의 반공만화에 불유쾌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산업화의 초기단계였기에 비교적 깨끗했던 청정의 자연과 심하게 훼손된 폐유의 강물이 공존했던 살풍경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내 나이 7살 때 부모들이 소리 죽이며 밤새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 역시 나는데, 그것이 광주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기댈 곳이 전혀 없어서 가톨릭에 귀의했던 부모였다.

초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비교적 세상이 재미있어졌다. 교복이 자율화되었고, 프로 스포츠 시대가 도래하더니, 어느새 올림픽 게임을 국내에서 볼 수가 있었다. 경기가 과열되었고 생전에 진기한 서구식 요리를 다 맛보았다. 이 서구식 요리의 환상 뒤로 노동쟁의나 학생 데모, 분신사건, 시국 사건들이 뒤엉켜 마음의 평화를 앗아갔다. 포르노나 매카시즘 정치가들의 암약(暗躍) 지원세례를 받은 반공영화 등 싸구려 미국문화의 심장이 울렁이고 아랫배 뻐근했던 저속 쾌락의 기쁨을 뒤로 한 채 무엇인가 늘 속는 기분과 불편함 등이 혼재되었다. 여하튼 그때의 싸구려 쾌락만은 지금도 다시 맛보고 싶다. 아무튼 내가 던진 이러한 이야기들을 박병래 작가는 놀랍도록 수긍했으며 공감한다고 했으며, 같은 일을 하는 같은 세대의 같은 감각은 너무도 흥분되는 공유체계였다.

유년기, 인생의 봄날, 음양오행으로는 동쪽, 어스름에서 막 깨어난 나무의 확장되는 기운, 이것은 나머지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귀중하면서도 찬란하고 위대한 시절이다. 1980년대는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다. 보수 강경주의 노선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으며 대처주의(Thatcherism) 영국 내각과 영미 공조를 이루었다. 레이건 정부의 이념은 역시나 매카시즘의 기반 아래 펼친 강력한 미국의 대내외 표방이었다. 노조에 대한 강경주의 일변도, 기업에는 낮은 세금 책정, 복지 예산은 전면 삭감, 스포츠와 대중 영화, 빌보드 팝음악, 포르노그라피 등을 통한 우민화 정책, 전쟁 선호, 무기를 통한 최대 제정흑자, 금융강화를 통한 신부유층 형성, 동구에 대한 강경주의 관철, 강한 정부와 약화된 국민 등이 그들의 정책이었으며 이 황금시절의 완벽한 성공을 1980년대 한국도 벤치마크했다. 그 겉모습은 성공적이었지만 내부에서는 홍역을 앓았음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끓어 달아오르는 경기와 발전양상에 미혹되어 누구나 자기 역시 이 좋은 룰의 게임에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 이득을 멀리하며 신념 좇는 자의 고난을 대부분 방관하며 방기했다.

90년대 대학을 찾은 우리는 1989년에서 1991년으로 이어지는 냉전 종결로 인한 대학가의 공항상태를 목격했다. 민중미술의 쇠퇴와 오욕으로 얼룩진 모더니즘, 반토막 서구사상이 눈앞에 목도되었으며 자유연애, 패셔니즘, 댄디스트, 소비향락, 강박, 신경질, 칼 마르크스에 대한 긴급한 사형명령, 그와 반대로 찾아온 프랑스 구조주의에 대한 조급증 등이 선배들과 교수들이 보여주었던 작태였다. 전공투를 먼저 경험했던 일본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정신을 오독한 채 외모만을 숭상하고 추구했으며 그들이 먹던 밥과 그들이 보던 만화를 잇따라 모방했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나 무라카미 류를 좇아 일본으로 유학했고, 술을 함께 먹고 놀던 박병래는 한스 하케, 요셉 보이스를 찾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즈음에 한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위용에 눌려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했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아마도 1981년도 제널럴 일렉트릭 전 회장 잭 웰치의 경영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주주가치’를 최고선으로 둔다. 그래서 기반 산업과 사회투자를 줄인다. 정리해고를 한다. 계약직을 통해 임금과 복지비용을 줄여 주주에게 이득을 나누어준다. 임금을 아끼려면 자국에서 공장을 포기하고 제 3세계 허름한 곳의 노동자들을 고용한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신념은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시대성, 바로 이러한 취지였다. 그 누가 예술과 문화는 정치경제의 뿌리에서 핀 꽃이라고 했던가. 진정으로 비평적 저항주의 작가들은 시각적 쾌락주의로 전향했으며, 상업적 보수주의 작가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실험이 있더라도 개인적 실험과 퍼스널 네러티브에 머물렀지 결코 사회 전방위적으로 네러티브를 펼치지 못했다. 전지주의 호메로스적 이야기꾼은 멸종했다. 거세된 거대담론 시대의 허약한 개인 작가만이 난립했다. 전세계 어딜 가도 더 이상 한스 헤케나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크리스 버든, 그리고 백남준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박병래의 ‘Zeboriskie Point’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과감하게 내린 한 작가의 결단이다. 이 제목은 이탈리아 명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1970년도 영화 ‘Zebriskie Point’를 변형시킨 유희어로서 이 영화는 일상적 세계와 가상의 이상세계가 혼재된 영상이 압권이다. 이 영화는 전형적으로 19세기 사무엘 버틀러의 소설 ‘에레혼(erehwon)’의 귀결과 같다. 이 세계에서 유토피아란 과연 있는가? 있다면 어디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해서 영어 에레혼을 뒤집어 “nowhere” 즉 아무데도 없다고 말한다. 있다면 그것은 알파벳 세 개를 떨어뜨려 “now here” 지금 여기라고 대답한다. 박병래와 나는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는 젊은이임을 언제나 가슴속에서 확신한다. 따라서 존 로크나 헤겔과 같은 거물을 언제나 숭상해 마지 않는다. 언젠가 글에서 읽었던 감동적인 글귀가 있다.

 

나는 자신이 18세기 계몽정신의 추종자이며, 인간의 진보라는 ‘진부한’ 관념을 여전히 고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꺼이 자인한다. 내가 헤겔 체계의 진수(眞髓)로 본 것은 국가를 최고도덕의 구현으로 찬미한 점이 아니라, ‘역사는 자유의 의식을 향한 진보’라는 그의 생각이었다.[1]

 

한국의 군산을 배경으로 장기간 프로젝트로 진행된 ‘Zeboriskie Point’는 간척사업으로 변질된 폐허의 공간을 무대로 작가 박병래가 중첩시킨 군산의 역사적 이미지, 그 모든 모습의 퇴적체이다. 일제 강점기의 슈미토모 은행(조선 은행)과 적산 가옥, 일제 농장, 미군정기의 미군부대와 미군 봉사자들과 기지촌 여성들의 마을(타운), 산업화로 인한 상흔이 보이는 토지,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의 상징인 새만금 간척지 등을 무대로 박병래는 100년이라는 시간을 추적하며 모든 흔적을 ‘지금 여기’라는 가치에 집적시킨다. 일제 수탈자 슈미토모 은행 자리는 80년대 나이트클럽으로 변신하여 군사 향락문화을 겪었고 90년대는 중국으로 수출을 담당하던 해운회사 자리였다가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곳곳의 역사적 이미지를 ‘Zebo’라는 가칭 외부인이 수집하여 미래적 공간 새만금의 사막에 집적시킨다. 여기에서 상징적 행위가 동반된다. 그 상징적 행위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겪었던 수렵과 채집시대의 행위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20세기 어린이들이 놀던 유희적 행위를 오버랩시킨다. 마지막 유희행위를 통해 자치기 놀이의 후련한 비행이 창공을 가르는 가운데, 관객으로 하여금 희망도 절망도 아닌 중성적 기분으로 초대한다. 그 날아가던 ‘막대자’의 이름은 분명히 자유이다.

이번 박병래 전시 글의 제목을 햄릿에 등장하는 대사에서 빌려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뒤틀린 시절이구나. 저주받은 운명이여,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2] 빗장이 풀려서 방향성을 상실한 현재의 혼란함을 타계할 방법은 한가지이다. 역사의 장기적 합리성을 믿어보는 것이다. 진정 긴 역사를 하나의 방향으로 중첩시켜 반성해볼 때 종합적으로 다가오는 직관이 있게끔 마련이다. 박병래의 ‘Zeboriskie Point’는 100년의 시간을 중첩시켜 반성해봄으로써 지금의 시기가 지나간 시기보다 긍정적이었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진보적 지식인 박병래 작가의 일차적 깨우침이다. 더욱이 박병래 궁극적 작업은 지금으로부터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절차탁마 준비 과정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박병래가 역사의 치유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현재 그의 중성적 미감의 영상은 반드시 보다 극렬한 미적 완결성으로 또다시 다가올 것이다.



이진명, 큐레이터(Lee Jinmyung, Cura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