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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뷰] 권병준+달파란의 새로운 실험 퍼포먼스 : 여섯 개의 마네킹(Six Mannequins)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31. 18:34


지난,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lig아트홀에서는 달파란 권병준의 프로젝트 공연이 있었습니다. <여섯 개의 마네킹 Six Mannequins>이라는 이름의 이 공연은 록음악으로 시작해 전자음악, 영화음악, 무용음악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을 하는 아티스트 두 명이 선보였으며, 파격적인 무대 영상 및 사운드를 관객들에게 선사하였습니다. 특히 달파란과 권병준은 마네킹의 손과 발, 머리를 자유롭게 분해, 조립, 조정해가며 새로운 소리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으며 관객들은 때로는 마네킹에, 때로는 두 명의 퍼포머의 행위에 집중하며 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이번 기획리뷰는 <여섯 개의 마네킹>을 관람한 앨리스온 수습에디터와 에디터 그리고 두 명의 이벤트 당첨 독자의 글로 구성되었으며,  이 공연에 대한 여러 단상들과 그리고 이벤트 주제였던 " 내가 사운드 아티스트라면 공연에 활용하고 싶은 악기와 공연방법에 대해서" 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비록 공연을 가보지 못한 앨리스온 독자여러분들도 이 글을 보시고 <여섯 개의 마네킹> 공연을 상상해 보는건 어떨까요?



<여섯 개의 마네킹> 공연의 단상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달파란과 권병준의 공연을 보며, 내 머리 속엔 저 한 구절만이 계속 떠돌았다. 도대체, 무엇을 말한 것일까? 지나친 상업화로 비슷한 체형, 비슷한 옷을 입고 끝없이 반복되는 노래만을 고집하는 한국 아이돌 음악을 부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규칙성 없는 소리들의 모음도, 이내는 하나의 음악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표현하려 하는 것일까?

공연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음악에서 이런 생각들을 반복하며 어떤 시사점,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내고자 힘들게 용을 썼다. 하지만, 공연이 막바지로 다가갈수록 나의 그런 궁금증은 점차 옅어져 갔고, 또 굳이 공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달파란과 권병준의 공연은 음악이라기보단 소음에 가까웠다. 애초에 음악 공연이 아니라 사운드 아트 공연이라 하나의 잘 짜인 음악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그만 부분 정도는 음악적 요소를 기대했던 나의 생각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 무대였다.

내가 만약 사운드 아티스트라면 일상적이고 사람들에게 친근한 소재의 매체를 악기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인 평소의 사물을 사용 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생소한 사운드에서 오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세상의 총아라고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을 악기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스마트폰 그 자체의 특성을 살린 어플리케이션이나 디지털 사운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충돌, 움직임 등의 물리적인 특성을 이용한 소리를 이용하고 스마트폰의 복잡한 회로의 부분 부분들이 내고 있는 다양한 신호를 그대로 사운드로 듣는 것 또한 흥미있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네킹들의 전자음에 맞춰 너무나도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던 권병준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라졌던 그들의 네러티브에 대한 생각이 다시 샘 솟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그들은 음악이라는 마네킹 속에 갇혀있던 수많은 소리들을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 내보내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글.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이지훈


“ … 걸 그룹을 연상시키는 6개 마네킹과 두 뮤지션이 펼치는 음악 퍼포먼스 이다. 그녀들의 손과 발, 머리를 자유롭게 분해, 조립, 조정해가며 새로운 소리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본 공연의 팜플렛은 이와 같이 기획의도를 소개하고 있었다. 새로운 소리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비록 무대 위 일어나는 공연이고 퍼포먼스이지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무대가 될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본 공연을 보았다. 특히 마네킹을 조립하여 어떤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공연을 보았다고나 할까.

네덜란드 전자악기 연구개발 스튜디오에서 악기개발 엔지니어로 근무하셨다는 권병준씨의 약력(?)에 걸맞게 사운드를 조절 할 수 있는 신기한 악기겸 기계들이 무대 구석구석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악기(?)들이 마네킹의 팔이나 목, 몸통에 장착되어 끊임없이 사운드를 제어하며 내보내는 구조로 공연은 진행되었다. 두 연주자 겸 디자이너들은 무대 위 마네킹들을 조정해가며 사운드를 조절하지만, 그 사운드의 변함을 세밀하게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지나친 노이즈음악으로 이미 청각의 세밀한 작업의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고, 사운드 그 자체에 집중하다기 보다 무대 위에서 보이는 행동이나 행위에 초점이 맞춰지게 구성되었다는 점이 참 아쉬웠다. 그들이 새로이 만들어 장착시킨 악기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쉽사리 알 수 없었다는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랄까.

앞서 말한 기획의도에서 보인것처럼, 걸그룹을 연상시키며 살짝 조롱하는 느낌의 장면들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목적이고 사운드 퍼포먼스자체가 수단이라면, 목적과 수단이 적절하게 부합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사운드 퍼포먼스를 통해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느낄 수 없던, 목적이 상실된 느낌이랄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무대와 작품들은 주로 받아드리는 수용자의 주관적인 성향에 따라 개개인이 느끼는 결과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객관적인 틀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보고난 뒤 난해하더라도 기억에 남고 즐거운 경험이라 기억된다면 좋은 공연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공연은 마네킹을 악기로서 사용하여 새로운 시도의 사운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는 점에서는 참신하지만 그 기획과 의도만큼 수용자가 어떻게 느꼈느냐는 한번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것 같다.

글.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정진희


 


 

대중의 시야 바깥에서 끝없는 실험을 하면서도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많이 받는 객체에 대한 사랑 내지 집착이 잘 어우러진 퍼포먼스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공연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그야말로 '낯설지만 흥미로운' 느낌의 공연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달파란과 권병준 이 두 작가들은 보다 진보적인 형태의 전자음악을 추구하는 아티스트인지라 그들의 조합이 과연 어떠한 결과물을 생산해 낼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그러나 그 기대가 너무 컸었을까? 그들의 음악적 해석, 그리고 퍼포먼스가 아직까지는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여자 오디션 참가자를 탈락시킨 뒤 느긋한 마음으로 열심히 설치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은 걸그룹이라는 대중적인 소통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실험을 행해온 듯 싶다. 아울러 관객들로 하여금 흥미를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걸그룹 음악 샘플링, 테레민과 비슷한 형태의 음향장치 등)가 어지러운 전자음과 함께 결코 어색하지 않은 조화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특히 공연 중후반에 이르러 권병준이 마네킹 등에 달려있는 장치를 이용해서 노래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박힐 정도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가 전면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마네킹을 안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흡사 마네킹에 집착하는 한 남자의 모습 내지는 걸그룹의 프로듀서를 꿈꾸는 사람 같았다. 대중의 시야 바깥에서 끝없는 실험을 하면서도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많이 받는 객체에 대한 사랑 내지 집착이 잘 어우러진 퍼포먼스라는 생각이 든다.

글.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김태윤

 

우리가 기대했던 것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

왜 여섯 개의 마네킹이었나? 여섯 개의 마네킹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 공연을 보면서 계속 궁금증이 생겼었고 그 의문들은 공연이 끝나도 완전히 해소되진 못했다. 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여섯은 걸그룹의 평균 숫자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권병준+달파란이 여섯 개의 마네킹을 조합하며 공연을 만든다고 했다. 마네킹이라는 악기를 무대에 등장시키다니, 게다가 그것을 분해, 조립하며 소리를 만든다고 하니 기대를 가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하반신만 있는 여섯 개의 마네킹이 세워져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무대에 놓여있는 사람 크기만한 마네킹을 보니 좀 충격적이긴했다.

그러나 무키무키만만수의 연극같은 퍼포먼스 이후부터 의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공연은 전반적으로 무언가에 항의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무언극의 느낌도 있었는데 오히려 기대했던 새로운 사운드라던가 새로운 악기의 역할에 대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았다. 권병준이 네덜란드에서 전자음악을 공부한 뒤 스타임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만드는 악기(이번 공연에서는 마네킹)에 가장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이 공연은 새로운 악기로 새로운 형태의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사운드나 음악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아쉬운 것이 많았다. 결국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걸그룹이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네킹'과 같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공연 내내 마네킹의 팔을 조정하고, 그들의 위치를 바로 잡는다. 이 모습은 마치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연구소의 과학자가 실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작업복같은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퍼포먼스 적인 부분은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아티스트적인, 혹은 테크놀로지를 기반한 미디어 퍼포먼스를 상상했던 관객은 그들의 연극적인 요소들, 내러티브들을 읽어내고는 기대했던 공연과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이 정말 이 공연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새롭거나 혹은 실험적인 공연? 혹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마네킹을 다루는 행위로 표현하려는 것? 그것을 명확하게 전달받지 못했기에 관객은 여러 궁금증을 가지고 공연장을 나오게 된다.
 
또한 실시간으로 카메라를 통해 공연을 촬영하며 그것이 하얀 샤를 통해 알 수 없는 모양의 형상으로 보여진다. 이것이 공연을 더 산만한 느낌으로 만든 느낌이 있었다. 단지 마네킹을 찍거나 마네킹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들을 화면으로 또 보여주어야 했을까?

소녀의 뒷목에 장착된 마이크를 통해 바위섬을 부르는 권병준은 무얼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실은 바위섬을 부를 때 신데시스된 소리로 나와서 처음엔 무슨 노래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중간 부분부터 알게 되었다. 다시 막판에 높은 음들이 노이지하게 들리는 등의 소리의 변화들은 재미있게 들렸다. 그러나 공연 내내 유지되는 노이즈 사운드는 그들이 걸그룹을 보는 시각인 것인지 아니면 음향적으로 쓴 것인지 궁금하다. 마네킹으로 컨트롤하며 나오는 소리는 속도가 변화되고, 루핑되며, 제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권병준이 글쓰는 행위를 통해 만들었던 소리처럼 약간 즉흥적이고 계획되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또한 마네킹을 움직이는 행위에 따른 소리의 변화가 그리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아서 조금 아쉽다. 음악 중간중간 소녀시대의 노래도 나오고, 마네킹은 " kiss" "불행해" "사람몸"…과 같은 말로써 사랑을 구걸한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마네킹처럼 걸그룹이 창의성없이 그저 만들어진 음악을 부르고 춤을 추고 한다는 것은 이제 알겠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내가 본 공연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운드의 쓰임에 있어서도, 새로운 악기의 구현방식에서도, 그들이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모두 모호하고 어려운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전반적으로 공연의 포인트나 아이디어가 산만한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공연은 정해진 형식이나 소리, 전형적인 언어를 따르지 않는다. 이 공연의 장르를 정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공연이었다. 마네킹과 두 사람 자체가 악기가 되어 연극을 연출하며 자유로운 느낌의 공연장을 만든 것은 좋았다. 작년에 lig아트홀에서 기획했던 사운드 아티스트 3인의 공연중 권병준의 공연은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관람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형태였다고 들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상상하는 새로운 공연의 형태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그들이 만든 새로운 느낌의 공간..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 촬영되는 모습들이 생중계되며 또 다른 시공간을 만드는 부분은 재미있었다. 다만 그 영상이 모호하지만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관습적이지 않은 그 날것의 느낌이 때론 충격으로, 때로는 이해하기 힘들게 다가왔던 공연이었다. 그 둘의 다음 작업을 기대해본다. 설사 또 기대와 다른 모습에 조금 실망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글 . 앨리스온 에디터 조은희





내가 만약 사운드 아티스트라면 공연에 활용하고 싶은 악기와 공연 방법은.....


내가하고 싶은 Sound performance

나는 메달을 이용하는 사운드 퍼포먼스를 하고 싶다.
메달에는 우리들의 욕망들이 넘쳐난다.
상위 1%에 대한 욕망....
이런 욕망들이 모여서 증식해 나가는 것이 도시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한다. 부정적인 모습과 함께 긍정적인 모습 안에서도 나는 욕망을 발견한다.

표현방법

메달들을 벽에 핀을 이용하여 빼곡하게 걸어 놓는다. 완벽한 정장차림의 수여자가 걸어 나오고 그 옆에는 메달과 상장을 위한 받침대를 든 미모의 여성과 또 한명의 여성이 따라 나온다. 두 여성 모두 몸에 붙는 드레스를 착용하고 있다. 상장 받침대를 든 미모의 여성은 상장을 수여자에게 전달하고 또 다른 여성은 상장을 받을 자의 이름을 호명한다. 호명된 자는 상장을 받기 위해 걸어 나온다. 그의 구두에서 처음에는 가벼운 소음이 난다. 수상을 받기 위한 자리로 다가 갈수록 무겁고 권위에 찬 소리로 변한다. 수여자는 상장을 주고 호명을 했던 미모의 여인은 매달이 걸린 벽으로 다가간다. 핀을 누르면 무겁고 권위 있는 소리가 나온다. 여인은 받침대를 든 여인에게 메달을 건네고 받침대를 든 여인은 다시 수여자에게 메달을 건넨다. 수여자는 호명된 자에게 메달을 걸어준다. 메달을 걸면서 나오는 권위의 소리... . 소리의 무거운 진동이 수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메달을 모두 수여할 때까지 반복행위가 이어진다.

지루함...

 수여가 끝나면 수여자와 미모의 여인들은 무대 뒤로 들어가고, 호명된 자들만이 남아 관객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낸다. - 소리는 수여자와 미모의 여인들이 들어갈 때에만 울리고 호명된 자들이 관객을 보고 서 있을 때에는 침묵.....

글. 추유선


 


 

“어느 날 쇼핑을 하다가 눈에 띄는 그녀가 있길래 유심히 지켜봤더니 목과 팔의 각도가 약간 안 맞는거야. 심혈을 기울여 고쳐줬더니, 글쎄 그녀가 사라졌더군!” 쟝 쟈크 상페의 데생 모음집 중에 마네킹 제조업자들이 쉬면서 하는 나누는 대사의 일부이다. 아름답고 완벽한 균형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의 차이가 오차가 되어버리는 몰개성.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

달파란과 권병준은 피노키오의 제페토할아버지가되어 마네킹의 의미없는 움직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규칙들을 만들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기존의 악기는 악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음색과 소리를 내는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전자음악은 그렇지 않다. (나오게 될)소리는 디지털화되어 이미 정해져있고 그 소리를 언제 어떻게 내는지를 약속할 뿐이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사용한다면, 그 고유의 음색이 필요해서 바이올린이 아니면 안되지만 전자음악은 정해진 소리가 나온다면 언제 어떻게 내는지 약속하는 방식은 (이번 공연에서는 마네킹에 달려있는 센서와 마네킹의 움직임) 필연적이지 않다. 바로 그점이 전자음악(또는 사운드아트)가 음악의 한계를 확장시키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고뇌와 번민에 빠지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네킹을 움직이면서 사운드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전자음악과 전자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자화상처럼 느껴졌다.

 마네킹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인간이 내는 소리를 전자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Myoelectric sensor를 이용해 인간근육,성대,표정의 움직임을 수치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소리에 매핑하는 방식으로 공연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Daito Manabe씨와 Hifana가 Myoelectric sensor를 이용해 여러가지 실험을 하는 장면은http://www.youtube.com/watch?v=LDk6zWDB4SM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글.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유동휘


도시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비슷한 사람들만으로는 도시는 존재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도시에 살고 있다. 반드시 생애 전체를 도시에서 보내지는 않더라도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한번쯤은 도시를 방문하기도 한다. 이제 도시는 거대한 개인들의 집합 공간이다. 도시에서 개인individuals들의 몸이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를 그려내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한 사람(사운드 아티스트)이 자신의 작업실에 출근해서 일어나는 해프닝으로 인해 다른 공간에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는 일상을 연속적으로 연출하는 방법으로 공연한다. 즉 일상 속의 물건과 사람의 몸이 악기가 된다. 인간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음과 소리는 어쿠스틱한 느낌으로 사용하고,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기계음들을 전자음으로 믹스하여 연극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든다. 예를 들어 3층 건물의 지하에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는 자신의 작업실에 지하철로 출근해서 작업을 하던 중 1층의 치과 병원 사람들로부터 컴플레인을 받게 되면서 극은 전환되고 변환되는 식이다. 이러한 스토리 텔링을 하게 되면 도시 속의 일상을 사운드로 그려내면서 평소 우리가 익숙해 있던 시각성보다는 청각과 촉각적인 감각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으며 상상력을 자극할수 있다. 2층과 3층에는 각각 PC방(전자음)과 바둑을 두는 기원(어쿠스틱)을 연출하여 전자음과 어쿠스틱을 함께 어울어지게 하면서 도시의 개인의 삶을 그들의 일상의 물건(악기)과 몸(악기)이라는 매체로 표현할 수 있다.

  글. 조혜영

 

*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추유선, 조혜영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 위 공연 사진은 Lig아트홀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Lig아트홀에 있음을 밝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