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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백남준 이라는 수식어 _alic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 3. 02:40



백남준. 어지간한 학생이나 성인들 중에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2006년 초 그의 사후, 위인전까지 출판될 정도인 그. 많지 않은 역대 대통령들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을 머리에서 떠올리기는 쉬울 것이다. 그와 같은 대단한 예술가, 작가가 한국인에 있었음을 많은 이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백남준처럼 되기를, 백남준과 같은 사람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예술, 문화계에서 백남준은 하나의 고유명사이자 수식어가 되었다. 제 2의 백남준. 심심치 않게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단순히 구글google이나 네이버naver를 검색해봐도 수많은 그에 대한 페이지들이 나온다. 하지만 ‘제 2의 백남준이, 특히 우리나라라는 토양에서 나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선뜻 쉽게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제 2의 백남준이 나오기가 힘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꼽자면 ‘파격’을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일 것이다. 세계적인 IT 기반과 기술을 가지고, 무척이나 빠르게 변하며 그만큼 피드백 역시 광속급인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너무나도 친숙하다. 넷net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일을 처리하기 힘든 것이 현 세대이며 지금 사회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이 급격하게 나타나고, 그만큼 기존의 것들이 사라지는 급변하는 것이 지금의 사회임에도 아직 파격이라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십 수년 전의 것임에도, 그 자신이 지금 존재한다고 해도, 그의 퍼포먼스들과 해프닝들이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다면 반응이 어떨까? 지금이라도 해도 고개가 설래설래,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예술이 대다수 사회의 관념이나 인식보다 선행한다고는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호응과 받아들임이 없다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유교적 가치관은 사회의 위계질서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힘으로 잿더미의 우리나라를 지금까지 이끌어 올린 훌륭한 원동력이었지만 급격한 변화의 수용이라던지 창조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좋은 기반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우리나라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들, 예컨대 백남준 본인, 사진의 김아타, 입체쪽의 이불 등은 모두 해외 출신이다. 모두 파격과 새로움을 가지고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은 것이 그들이지만 만약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같은 활동을 했다면 성공했을까라는 물음에 역시 고개는 설래설래이다.
다른 한 가지 요인이라면 우리들의 무지일 것이다. 그는 위대하다.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비디오 아티스트’라서가 아니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비디오 아트를 처음 세상에 선보이고 사람들에게 예술의 새 지평을 보여준 작가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 누구보다도 고전적 회화에 천재적인 모습을 보였던 피카소가 기존의 시각을 파괴하고 새로운 큐비즘의 관점을 보였던 것처럼. 수백, 수천, 수만의 습작과 회화작품의 반복을 통해 고전주의와 인상주의를 추구하며 1점 원근법을 깨고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을 도입한 것처럼. 예술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지자들이 기존의 방법론을 넘어선 것처럼. 백남준은 지루하리만치 긴 construction의 고심과 실험을 했고, 이를 부수고, 만들고, 융합시켰다. 이런 그이지만 ‘백남준’이란 단어에서 일반적으로 나올 수 있는 단어들은 ‘비디오 아티스트’, ‘TV로 작업한 작가’ 정도이다. ‘제 2의 백남준’을 검색해 본다면 비디오 아트의 대가라든지 떠오르는 신인 작가 등의 기사를 위한 수식어로 얼굴을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가장 접촉하기 쉬운 매체인 웹상에서 공식적으로 그에 대해 분석하고 소개하는 사이트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정말 많이 퍼쳐 있고 소장되어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지만, 온라인 상으로, 오프라인 상으로 그 작품들을 접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아카이빙과 기록 보존은 필수이지만 그닥 잘 이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백남준’ 작가 본인의 무지 말고도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도 그 원인이다. 우리의, 우리만의 생각과 모습, 전통이라는 것은 잘 정립되어 있지 않고, 그렇기에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어찌되었건, 현재 예술의 주류는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서양권이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나라에 잘 나가는, 혹은 잘 나가길 원하는 인재들은 대부분 앞다투어 그들의 시스템과 사상들을 공부하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내 놓는다. 이러한 결과물에 대한 주류에서의 반응은 괜찮을지는 모르지만, 호응은 그닥 대단치는 않다. 비슷하니까. 그리고 익숙하니까.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하고, 좀 더 좋더라도 어쨌거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들인데 파격적인 찬사가 나올 턱이 없다. 그들 앞에서 칸트를 외치고 구조주의를 외쳐봤자 결국은 동양인들이 흉내내고 있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것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우리를 아는 것은 기본인데 왠지 그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 국사는 중고등학교 필수 과목에서 빠져 있고, 사람들은 영어에 목숨을 건다. 한류다 뭐다 해서 TV에서는 사극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청소년들은 주몽이 어느 나라 왕자인지도 모르면서 서양 신화에 열광하고 기회만 된다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원한다. 조선시대의 것이 우리 것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고루하다 외면한다. 본인 스스로도 그랬으니. 대학교 전공의 한국 미술사도 글쎄... 서양 미술사와 미학사의 반의 반 시간을 배운다면 다행일까. 주류에 큰소리치려면 그들의 잣대에서 동급 이상의 질과 완성도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들과 다른 특별함과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백남준은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이용했으며 그 결과가 현재 그의 위상인 것이다.
단순한 경제 논리로 따져서는 안되는 것이 이런 예술이지만 동시에 경제논리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리고 수익을 위한 것이 지상목표이지는 않지만 굳건한 수익 구조 없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고. 그나마 최근 외부적 요인과 자체 노력으로 예술계에 돈이 많이 유입되고 있다. 이런 돈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사실. 그러나 돈이 되니까 미술품을 많이 사고 팔고, 한류를 떠들고, 문화 부흥을 외치며 우리 예술을 세계에 펼치자고 하지만 과연 우리네 예술과 문화 발전이나 발굴, 보존, 교육을 위해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었는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결국은 일반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반론을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부분을 지적하고 발전시켜 봤자, 제자리 걸음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는 근시안적인 투자가 아닌 일반론적이지만 장기적이고 넓은 투자가 절실하다. 적어도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얼굴에 살색 안칠했다고 지적받거나 무언가를 똑같이 안 그렸다고 야단맞거나 감점 먹고, 음악시간에 열심히 가사만 외우는 그런 모습은 사라졌으면 한다. 고학년때는 예체능 시간이 자습시간으로 뒤바뀌는 것도. 설마 요즘도 그러고 있지는 않겠지.


제 2의 백남준의 탄생은 단순히 미술계 인사나 작가층만의 각성이 아닌, 긴 시간이 걸려야 이루어질 긴 대계이다. 그리고 그런 인물의 탄생은 현재의 영국 미술의 중흥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 미술계 혹은 예술계 발전의 새로운 기폭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