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기획취재_4인4색]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_exhibition review

yoo8965 2013. 1. 9. 18:07




앨리스온에서는 지난 2012년 11월, 송원 아트센터에서 진행되었던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을 기획 취재하였습니다.


이 미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대 사회는 기계에 의해 매개되어 변화되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 물리적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영역에 관한 탐구를 시행하고 있으며, 점점 더 기계에 의존하는 삶의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죠. 한편 기계는 부분적으로 인간과 유사한 지능과 인식 구조를 지녀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계의 발전은 자연스레 기계가 궁극적으로 발전하고자 아니 닮고자 하는 인간상에 관한 질문으로 회귀하게 만듦니다. 과연 인간과 기계는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을까요? 사실 이러한 의문은 그리 신선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16-7세기에 영국인 의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인간의 몸이 혈액순환에 의해 작동됨을 밝혔고, 이후 데카르트는 인간은 신체기관의 기계적인 움직임에 의해 운동하는 존재라는 인간기계론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18세기 자동기계가 만들어진 이후, 기계와 인간의 정체성과 작동원리에 관한 의문들은 결국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에 관한 의문으로 귀결됩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흐름에서 21세기 현대의 우리가 마주하는 기계들에 관한 사고는 어떻게 확장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계에게 무언가를 요구(구걸)하고 명령하는 이전까지의 일방향적 물음이 아닌 기계가 오히려 인간에게 어떠한 것을 요구하고 묻고 있는지에 관한 쌍방향적 사고를 요구합니다.


본 기획취재는 앨리스온의 4명의 수습에디터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하단부의 글은 각각 다른 사고를 바탕으로 작성된 전시에 관한 수습에디터들의 4가지의 해석입니다. 인간과 기계에 관한 서로 다른 4가지의 주제를 비교하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전반적으로 차가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온통 흰 공간에는 기계인 듯 보이는 것들이 드문 드문 놓여있었다. 이 전시에서 제시하는 물음에서처럼 기계가 우리에게 구걸하는 것은 무엇일지 내심 그 답을 기대하며 전시관람을 시작했다. 



노진아, <제페토의 꿈>, 복합매체설치, 2010


   노진아의 <제페토의 꿈>이라는 작품은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가장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발가벗겨진 채로 흉하게 의자에 놓여진(앉아있다고 보긴 어려운) 기계인형만이 갖는 무디고 냉소적인 성질은 아무리 예뻐지려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인간의 아름다운 신체를 갈망하는, 어쩌면 기계가 인간과 동일시 될 수 없는 한계를 보여주는 소재가 되었다. 내가 벗겨진 모습이 안쓰러워 ‘안 춥니?’ 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그 사람이 되고 싶은 기계는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해요’라고 말하고, 현재 날씨에 대해 되묻는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이 기계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의심받는다. 기계란 내가 묻는 것에 말해야 하고, 시키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이 기계는 되려 자신이 사람인 냥 자신을 의심하는 관객에게 질문하며 마치 조롱 당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시장내에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뒤로 한 채 다소 불쾌한 기분으로 다음 작품을 보았다. 기계적인 이미지들 중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꼈던 작품이 바로 김두진의 <봄(Spring Time)> 이다. 원작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것은 인간 뼈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의미적 측면에서 통상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이라는 상징을 그 정반대의 의미인 인간의 생명을 나타내는 소재로 이용했다는 것에 놀랐다. 기계는 인간의 ‘뼈’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요소가 개입할 수 있는 피부색을 제거하고 뼈 그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삶의 시작부터 그 끝을 모두 담고 있는, 인간만이 갖는 시간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이러한 ‘뼈’의 최대한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담아내서 인간 존재가치를 상승시켜 주었다. 박재영의 <자가최면장치> 는 전시회장 구석의 작은 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벽은 온갖 연구의 흔적들과 기계의 사용법이 적혀진 종이로 덮여있었고 오싹한 분위기의 녹화 테잎들이 재생되며 어떤 여성의 담담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분위기에 압도된 나 자신은 주체적일 수 없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의자에 앉았고 기괴스러운 원통형 관에 머리를 넣었을 때는 ‘내가 실험대상이 되었구나’라고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고 기계에 의존해 최면 당하길 바라는 상황은 인간이 선택하는 입장이 아닌 도리어 선택 당하는 입장이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김두진, <봄 Spring Time>, 230x145cm, 3D Digital Print, 2010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기계는 도대체 인간에게 무엇을 구걸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결국 기계는 우리에게 구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기계가 자신들에게 구걸하는 것을 찾으려다 되려 자신들이 기계에게 구걸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이 전시의 포스터 속에 기계로 변해버린 자신의 새끼를 품에 안은 채, 눈물이 맺히다 못해 붉게 변해버린 엄마팬더의 원망 어린 눈은, 인간에게 너희들이 만든 기계라는 존재에 대한 그 책임을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두영(앨리스온 수습에디터, dooyoung91@gmail.com)



2.


   현대사회에서 기계는 인간 생활속에서 인간의 소망을 실현해 주고 인간의 욕망을 대신하며,인간의 감각까지 대체하게 되었다.사람은 과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창조하고 싶은것일까? 전시를 통해 사람이 자신이 풀 수 없는 고민들을 기계에 투사하는 것은 아닌지 기계 넘어 인간의 욕망을 바라보게 되고, 또 반면에 인간이 지각하는 사고를 확장시켜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고 있는 기계를 만나게 된다.인간과 기계의 공존과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전시이다.


   노진아의 사이보그 기계는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여성의 몸을 가진 기계이다.이름을 입력하면 상대방의 이름까지 인지하고 질문에 답을한다.그 답이 꽤 구체적이고 깊이가 있어서 단순히 기계가 아닌 또 다른 생명체를 만나는 느낌이 든다.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인류멸망보고서>에 나오는 부처가 된 로봇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로봇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어 스스로 작동을 멈추고 열반에 든다.현대 사회에서 로봇은 점점 발달하고 있고 사람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로봇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일본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추구하는 로봇의 불성이 기계와 인간의 공존에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모리의 말을 따르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인간과 기계사이의 주종구별이 없으며, 우리들은 기계와 융합되어 부처 안에 있는 셈이다.인간의 존엄이란 기계를 부리는 일이 아니라,기계와 로봇에게도 우리에게 있는 것과 똑같은 불성이 있는 바,그 불성을 찾아내 기계와 로봇에 의해 자기가 수증될 때에 확립되는 것이다."라고 하고있다. 노진아의 사이보그 기계도 사람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하고 평화로운 눈빛으로 조언을 하고있다.이렇게 점점 발전하고 있는 로봇의 모습을 볼때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앞에서 오히려 위화감이 들기도 하고 이들이 만드는 비현실에 대해 사람이 얼마나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것인지 에 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모리의 말처럼 궁극적으로 인간과 기계의 조화란 이런 기계라는 새로운 종을 대함에 있어서 배척하지않고 올바로 조종하고 또 그로인해 인간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지 않을까.



박재영, <자가최면장치>, 혼합재료, 2012


   박재영은 기계가 만들어 내는 비현실적 허구에 심도있게 다가가고 있다. 작가는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일상적인 환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환타지는 기계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존박사와 보카이센은 허구적 인물이지만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다. 그가 설립한 가상의 회사 다운라이트(DoenLeit)는 거짓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사업자등록을 가진 회사로 설립되었다. 그는 이 다운라이트를 통해 우리사회에서 가상이 현실화되는 지점들에 대해 연구한다. 요즘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사람들을 접근성이 쉽게 연결해주지만 현실과는 다른 많은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하지만 이 가상현실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고 사람의 의해 움직이고 있는 실제상황이기도 하다.가상현실과 실제상황은 마치 비슷한듯 하지만 많은 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다.가상현실과 실제상황에 대한 차이를 인식하고 다른점을 이해하고 기계의 장점을 발전시켜가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번 전시는 기계에 대한 작가들의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점점 기계화 되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느낄수 있었고 또 기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만들었다.기계와 인간의 공존은 기계에 대한 맹신도 아닌 또 무조건적인 불신도 아닌 인간을 이해하고 기계가 만들어 내는 여러가지 차이들을 인식하고 미래의 발걸음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미정(앨리스온 수습에디터, mugl@naver.com)



3.

* Man's desire is the desire of the Other


 오늘날 우리에게 기계(機械)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동력을 받아 움직이거나 일을 하는 장치라는 의미의 기계는 18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며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면에서 충실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견해와 과학기술의 발달을 등에 업고 조금 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고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켰다.

 이런 흐름은 스마트폰, 태블릿PC로 대변되는 모바일 디바이스들이 널리 쓰이면서 극명하게 구체화 되었다. 사용자의 감각에 반응하는 방식의 UI(User Interface)가 일반화되면서 기계와 인간은 종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한 방향에서 양방향 간의 소통중심으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이 이종 간의 소통이 처음에는 가시적인, 하드웨어의 편리성 부분에서만 변화를 꾀했었다면 지금은 묵시적인, 소프트웨어의 편의성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모바일 디바이스들이 스펙의 향상만으로 이전과 같은 만족을 주기 어려워진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더욱 부각된 UX(User eXperience)도 그렇다. 사용자가 상호 교감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총체적인 경험에 관한 이 개념은 더는 기계와 인간의 시선이 외적인 부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단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기계가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까지 접근했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



이장원, <Untitled>, Installation View, Size Variable, 2004-2008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 전시는 기획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기계를 예술로 끌어들임으로써 기계에게 어떠한 감각들을 요구, 혹은 구걸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라고 한다. 이런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여덟 작가의 각기 다른 시선을 송원아트센터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노진아의 <제페토의 꿈>이다. 키보드로 타이핑한 질문을 기계 피노키오가 답하는 인터페이스인 이 작품은 단순하게 사람의 물음에 답하는 인공지능을 구체화 시킨 것에 그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계 피노키오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듯 오히려 자신을 향한 의심과 불신에 대해서 반문함과 동시에 생각의 환기를 촉구한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명제와 맞닿아 있다. 물론 <제페토의 꿈>은 완벽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질답 과정을 예외처리를 통해 화두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처한 것이라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는 병치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여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 데카르트처럼 의심을 던지며 존재를 증명해 가려는 기계 피노키오는 어쩌면 전기양 필립 K. 딕 의 SF소설『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이 아닌 조금은 더 감성적인, 데카르트를 꿈꾸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페토의 꿈>이 인간화된 기계로 소통을 시도했다면 잭슨홍의 <인간적인 자동판매기>는 기계화된 인간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사람이 자동판매기에 들어가 직접 음료수를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작품은 1769년 켐펠렌에 의해 제작된 체스 두는 자동인형, 일명 <The Turk>(터키 사람)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은 나무상자 위에 체스 판이 놓여 있고 그 앞에는 터키인 인형이 앉아 있는 형태인데 상자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서 인형을 조종하여 체스를 둘 수 있다. 기계장치의 힘을 빌렸지만,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감성에 따르는 것이다.



잭슨홍, <인간적인 자동판매기>, Installation, 2012


 <인간적인 자동판매기>도 사람의 감각을 빌어 기계의 역할을 수행하는 점에서 흡사하다. 작품은 자동판매기의 내부에 부착된 알고리즘 순서도로 기계적인 절차를 수행하도록 제안한다. 또 전동 연필깎이와 헤어드라이어로 기계가 제공하는 감각적인 부분까지 흉내 낼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기계의 입장이 되어봄으로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인지, 기계적이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며 나아가 우리가 기계에 얼마나 인간적인 감각과 감성을 투영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제페토의 꿈>과 <인간적인 자동판매기>가 감각적인 부분을 체험하게 하여 감성을 이야기했다면 김두진의 <봄 Spring Time>은 감각기관을 해체해 보임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한다. 윌리엄 부게로의 회화 작품인 <Springtime>을 3D 디지털 프린팅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신고전주의가 갖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에서 탈피해 감각기관들, 살을 제거한 뼈만을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외형적 요소들 때문에 생겨나는 감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생물학적 근본을 이루고 있는 뼈는, 인간을 닮으려는 기계가 단지 외형적인 면을 통한 감성의 구걸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뼈있는 물음처럼 다가온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말했다. "Man's desire is the desire of the Other",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이 함의하는 바와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일반화하자면 욕망의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아닌 타인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의 주제인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기계가 인간에게 구걸한, 다시 말하면 욕망하는 감성이, 사실은 타인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이처럼 기계를 통해 감성을 욕망한 행위는,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기계가 인간의 감성의 영역까지 접근하고 있는 만큼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 예로 우리는 모바일 디바이스의 대중화로 인한 속칭 스마트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기계에게 스마트하게 종속되었다. 직장인들의 업무가 일상으로 확장되었다거나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중독이 날로 심해져 간다는 보도는 그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시선은 무엇일까. 전시에서 시사하는 바처럼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전민제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aliceonUeber@gmail.com)



4.

* 인간과 기계, 차이점을 찾기 위한 몸부림


   지난 년도 말, 송원아트센터에서는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展’을 진행하고 있었다. 종말론으로 들썩였던 2012년에 사뭇 어울리는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시작하였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과학기계문명이 몰고 온 생태계의 파괴를 죽음의 동인으로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었다. 언제부턴가 기계는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성조차 잠식시켜가는, 즉 인간의 ‘불안’을 촉발시키는 존재가 된 것이다.

 다음은 전시 큐레이터 백곤씨의 간단한 전시 소개 구절이다.


‘기계는 과연 인간에게 무엇을 구걸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반대로
‘인간은 기계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의 중심엔 인간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법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왜 우리는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그건 바로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The monster)'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과 기계 역시 이제는 ‘짝패 관계’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이론가 르네 지라르(Rene Girard)에 따르면 ‘짝패관계’란 경쟁자들 사이의 차이가 전혀 없을 때 생겨난다고 하였다. 모든 차이가 사라지고 오직 동질성만이 그들 사이를 지배할 때, 이들은 완벽한 ‘짝패(double)'가 되며 집단의 결정적인 위기를 가져오는 것 또한 구성원들 사이의 완벽한 상호호환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면 인간이 기계를 두려워하는 것은 차이점 때문이 아니라, 동질성 때문이며 해결법은 차이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에 대한 답을 여덟 명의 작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내는데 그 모습이 참 흥미롭다.



Troika, <SURROGATE>, Lama C-Type Print, Gloss, Mounted on Aluminum, 2012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룹 트로이카는 엄마 팬더가 원망 어린 눈빛으로 전자 아기 팬더를 끌어안고 있는 작품 <Surrogate>를 통해 전자적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이에 상반되게 아찌아오의 경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기계 테크놀로지의 자연 모방을 통하여 유쾌한 미래를 꿈꾼다. 작가 이장원, 노진아, 김두진은 표현 방법은 각각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기계와의 차이점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특히 작가 노진아의 <제페토의 꿈>의 경우 그 표현방식이 과감하다. 무섭도록 인간과 닮은 피노키오를 전면에 내세워 관객으로 하여금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 대답들이 너무도 견고하다보니 질문을 하면 할수록 관객은 인간 근원에 대해 혼란을 느끼며 그 주변을 서성이게 된다. 박재영의 경우 <자가최면장치>를 통해 인간인 최면 치료사보다 최면 기계를 신뢰하는 기계에 전도된 현실적 판타지를 그려낸다. 이와 대비되게 잭슨홍과 신기운은 대체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강한 신뢰를 드러낸다. 잭슨홍의 <인간적인 자동판매기>의 경우 정면에서 바라보면 일반 자판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어딘가 수상해 뒤쪽으로 돌아가 보면 작가의 위트에 웃음이 픽 나온다. 사람이 기계 안에 들어가서 수동으로 음료수를 제공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기계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믿음직스러운 기계는 ‘돈 먹을 일은 없겠네.’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신기운의 <Desire has no history_Chess>은 우리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사물들을 모조리 갈아버린다. 관념과 상징이 부서진 자리에서 우리는 맹신해온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된다.



신기운, <Desire has no history: Chess>, 2 Channel Video Frame Installation, Full-HD H.264 Codec, 12min, 2009


   본 전시는 전자적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시각과 디스토피아 시각이 함께 공존한다. 또한 기계에게 전도당하는 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되지 않을 미래를 꿈꾸는 제각기의 시각이 함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 모두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주요 화두를 공통적으로 품고 있다는 점에서 흐름이 유지되고, 생각이 지나치게 분산되진 않는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보단 사유의 시발점이 되어주었다면, 작가 신기운의 경우 나름의 결론을 내놓은 듯하다. 이상을 향한 관념을 다시 인간으로 향하게 할 때 기계는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신의 영역을 향한 왜곡된 호기심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면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인간의 ‘의도’인 것이다. 그것이 강박에 가까운 탐욕이 될 때 결국 우리는 압도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늘 그 중심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음에도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 바야흐로 테크놀로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는 인간에게 무엇을 구걸하는가?’ 알면서도 잊어버리는 그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전시였다.

황민교 (앨리스온 수습에디터, aliceon.net@gmail.com)


 

전시기획자의 글.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 백 곤(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