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미디어시티서울 프리비엔날레 <종합극장: Interspace Dialogue> : 새로운 감독은 어떤 시도를 보여줄 것인가? _exhibition review

yoo8965 2013. 5. 29. 16:38



영화제 같았던 전시


  5월 7일부터 5월 26일까지 3주가 안 되는 기간 동안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는 <종합극장: Interspace Dialogue> 전시가 열렸다. 같은 기간 동안 1층에서는 한국과 대만 간의 교류전인 <대만현대미술 Rolling! Visual Art in Taiwan>전이 열렸고, 2층에서는 전국시도립미술관 네트워크 주관으로 하정웅 컬렉션 특선전을 겸해 <격동기의 혁신예술: 재일작가를 중심으로> 전시가 열렸다. <종합극장>전은 본관 3층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따지고 보면 <종합극장>전은 큰 규모의 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시공간 상의 겉보기와는 달리 <종합극장>전은 ‘버거울 정도로’ 큰 전시였다. 20일 동안 4개의 전시장에서 64편의 상영작이 1시간 반 간격으로 돌아가며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격렬한 점심시간을 틈타 여유롭게 전시를 훑어보기를 바랐을 직장인들에게는 난감했을 전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종합극장> 상영 스케쥴 출처 : http://offandfree.blog.me/110167508454

 

  <종합극장>의 소개문에는 ‘건축구조물과 실험영화의 장르결합을 통한 새로운 전시형식에의 도전이며, 포스트 뮤지엄을 지향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비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전시’라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건축전이자 영화제인 전시였다고 밝혔지만, <종합극장>은 건축전보다도 영화제의 성격이 강한 전시였다. 미술관이라는 건축 내부에 설치된 요소들만으로는 건축적인 성격을 강조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크리스탈 관에 설치된 소사이어티 오브 아키텍처(Society of Architecture)의 <임폰더러빌리아 Imponderabillia>의 경우 플라스틱 의자를 겹쳐 고딕 교회의 볼트 천장처럼 구성했지만,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벽체를 이루는 플라스틱 의자가 상당한 공간을 차지했고, 여기에 입구에 튀어나온 의자 다리의 문제로 인해 공간은 더욱 좁게 느껴졌다. 2관에 설치된 오상훈의 <인터스페이스 바이 인터스페이스 Interspace by Interspace>의 경우는 건축이라기보다는 큰 조각 작품 같이 느껴졌다. 프로젝터는 폐타이어 구성물 밑에 있던 것이 아니라 옆의 공간에 별도로 놓여 있었다. 건축의 공간성과 실용성을 제대로 살렸다고 평가할 작업물은 1관에 설치된 국형걸의 <바일레터럴 씨어터 Bilateral Theatre>와 3관에 설치된 맥스 쿠오(Max Kuo)의 <플러쉬스케이프 Plushscape>였다.


국형걸. <바일레터럴 씨어터 Bilateral Theatre>의 개념도.


  대부분의 관람자들은 아마도 미디어 색션 A/B파트가 상영되는 3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상대적으로 상영시간이 짧은 영상작업들이 돌아가며 상영되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딱딱한 앉을거리가 놓인 다른 상영관에 비해서 맥스 쿠오(Max Kuo)가 구성한 3관의 관람환경은 훨씬 ‘포근’했다. 맥스 쿠오가 만든 <플러쉬스케이프 Plushscape>는 공사장에서 먼지막이로 많이 사용되는 부직포 천을 말아서 마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텐트처럼 묶어 구성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로서는 지금까지 봤던 전시 중에서는 가장 편안한 관람환경이었던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MOVE>전에서 보리스 샤마즈가 보여줬던 작업물 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긴 눕는 것만큼 편한 것이 있겠는가?)


맥스 쿠오(Max Kuo), <플러쉬스케이프 Plushscape>


  그에 비해 다른 전시 공간의 ‘건축적 구성물’들은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보였다. 게다가 다른 구성물들은 ‘대량으로 양산되는 산업자재를 대여하거나 생산과정 중 불량제품으로 분류 폐기된 제품을 협찬 받음으로써 동시대의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리사이클링(recycling)’ 혹은 ‘업사이클링(upcycling)’ 개념을 건축구조물에 도입하려 시도했다.‘는 기획 의도에는 부합했지만, ’지게차 팔레트, 행사용 플라스틱 의자, 공사장 먼지덮개인 부직포, 자전거 타이어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산제품의 각기 다른 물성을 이용하여 단순한 시각을 통해서가 아닌 무대장치와 관람객의 촉각적 경험을 유도하고자 하였다‘는 의도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무대를 연구하고 연극적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건축, 회화, 조각, 디자인 등 시각예술의 모든 영역과 기술을 접목시켜 공간을 만드는 기술’을 탐구했다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에르빈 피스카토어(Erwin Piscator)의 ‘종합극장(Total Theatre)’ 개념에 이번 전시 구성이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확실해보이지 않는다. 관람객은 건축적 요소에 집중하게 되기보다는 상영되는 영상들에 관심을 가졌다. 관람객들은 ‘영화제 같은’ 전시 방식에, 상영관을 나누고 상영 시간표에 맞춰 수많은 영상물 중 하나를 알아서 선택해 보는 방식에 집중했을 것이다.


영화제처럼 기획된 배경은 무엇인가?

  상영된 영상물들을 보면, <종합극장>전은 색션이 6개나 됐다. 주요 색션인 역사, 장소, 미디어 외에도, 오프앤프리 국제확장영화예술제가 프로그램 파트너로서 참여했고, 여기에 아브라모비치 특별전과 신지승의 마을영화 색션도 별도의 색션으로 구성되었다. 어찌보면 ‘종합’이라는 전시 제목에는 부합하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어떠한 기획 의도 없이 급조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기도 했다. 분명한 점은, 프로젝션 맵핑, 피지컬 컴퓨팅, 사운드 비주얼라이제이션 등으로 대변되는 최근의 미디어아트 흐름과, 작년에 유진상 교수가 기획했던 미디어시티 서울 2012와 비교했을 때, <종합극장>전은 정말 ‘영화제’ 같았다는 점이다.



  왜 <종합극장> 기획진들은 이렇게 전시 구성을 했을까? 글쓴이는 <종합극장>을 기획한 배경에 박찬경 예술감독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보았다. 박찬경 예술감독이 <종합극장>전을 기획했다는 것은 아니다. (글쓴이는 리뷰가 업데이트 된 이후 <종합극장>전 전시 기획진들이 박찬경 감독 선정 이전부터 전시를 준비한 것으로 안다는 지적을 받아 리뷰를 수정했다.) 다만 적어도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제도 기관은 <종합극장> 전시와 박찬경 작가를 연관시켰다. 박찬경 감독은 <종합극장>전이 열리던 13일 오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디어시티 서울 2014의 예술 감독에 선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www.union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476) 그리고 이번 <종합극장>전은 내년에 열리는 미디어시티 서울 2014의 프리 비엔날레를 표방한 전시였다. 또한 <종합극장> 기획에 참여했던 큐레이터들과 박찬경 감독은 함께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종합극장>이 2014년도 미디어시티 서울의 향방을 가늠케 하는 프리비엔날레임을 강조하고, 미디어시티 서울의 예술감독으로 박찬경 감독을 선임한 이상, <종합극장>전과 박찬경 감독을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종합극장>전은 내년에 열리는 미디어 시티 서울 2014의 경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전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박찬경 감독이 영화나 영상매체에 대해 강조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박찬경 감독은 “2012년 미디어시티서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듯 관객들이 좋아하지만 예술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대중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가 주요 쟁점”이며,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제도적인 구분을 벗어나 음악 콘서트와 퍼포먼스, 장르영화(상업영화) 상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박찬경 감독이 “흔히 미디어아트라고 하면 새로운 기술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미디어를 다뤄보고자 한다”, “미디어는 매체, 언론, 소통 등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 기술매체 보다는 소통매체로서의 미디어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고 밝힌 점에 비춰보면, 상대적으로 작품(text) 그 자체보다는 사회적 맥락(context)을 담는데 이미 많은 시도와 검증이 이뤄진 영화나 영상 매체가 더 중시될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와 미디어아트의 모호한 집합 관계

  반면 상대적으로 이전 미디어시티 서울에 출품됐던 작품들과 유사한 미디어아트에 대한 언급은 적어 보인다. 박찬경 감독은 “작가 출신이다 보니 문제적 전시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그에 호응해 창조적인 전시를 만들어 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문제는 과연 그 ‘창조적인 전시’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종합극장> 전시가 미디어아트 서울의 프리비엔날레적 성격의 전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디어아트와의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관계가 사실 매우 불명확해 보인다. 박찬경 감독이 생각하는 미디어아트가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불명확하다.
  이번 <종합극장>전에 드러난 미디어아트의 개념도 이러한 문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애초에 <종합극장>이 영화제로만 기획되었기 때문에 이후 뉴미디어아트에 대한 것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프로젝션 맵핑 같이 이제는 잘 알려진 미디어아트 작업이 <종합극장>전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에 관해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상영된 영상물들이 기존 영화의 서사적인 형식이나, 관조적인 다큐멘터리, 혹은 기존 실험영화의 형식의 연장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에 관해 논하는 것이다.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에게 바치는 헌정영화(서원태의 <토니 레인즈와 한국영화 25년>)나, 화산의 분화 모습을 찍은 영화(빠울로 어브레유(Paulo Abreu)의 <잠들어있는 Asleep>), 파운드 푸티지 성격을 가진 실험 영화(석성석의 <Noise film_199809_no.3>) 등이 그렇다. 이것은 <종합극장>전에 상영된 작품들이 영화 혹은 영상매체에 편중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미디어시티 서울이 그동안 소개해온 뉴미디어아트 작품들과 비교할 때, 그 작품들은 영화와 같은 기존 미디어아트의 연장일 뿐 아닌가? 그것이 이후 등장한 미디어아트(혹은 뉴미디어아트)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단순히 지금의 <종합극장> 전시처럼 미디어시티 서울 2014가 기획된다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앞서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되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지난 2012년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작품은 플로리스 카이크(Floris Kaayk)의 애니메이션 작업들이었다. <악성금속증 Metalosis Maligna>, <전자 목(目) The Order Electrus>, <생명의 기원 The Origin of Creatures>이 돌아가며 상영되는 통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거나 앉아서 기괴한 허구의 다큐멘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어도 글쓴이가 전시를 찾았을 때마다는 그랬다.) 차라리 별도로 방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맨바닥에 앉아 그 허구의 ‘시나리오’를 다 지켜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데이비드 보웬(David Bowen)의 <파리 트윗 fly tweet>이나, 니나 피셔(Nina Fischer)와 마로안 엘 사니(Maroan el Sani)의 <눈을 감는 영혼들 Spirits Closing Their Eyes>을 다 지켜본 사람들은 흔치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매체 형식. 그리고 덜 무거운 주제. 대중이 그것들을 원한다는 점은 명백해보였다. 글쓴이조차도 그런 관습적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플로리스 카이크(Floris Kaayk), <악성금속증 Metalosis Maligna>


  미술관 내에서조차도 이러한데, 현대 사회에서 영화나 TV 방송 매체의 영상이 가지는 우위를 새삼스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적절한 비교일지는 모르겠지만, 방송과 게임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저녁 메인 뉴스에서는 게임을 유해매체로 보도하며, 게임사들은 케이블 방송에 자사의 게임을 e스포츠 종목으로 유치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이런 지적을 들으면 특정 매체의 도덕-윤리상의 문제와 매체와 매체간의 선점-후행관계를 혼동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과거 순수예술분야의 ‘모더니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치 장인처럼 외길을 가고 극의에 이르면 후행매체(뉴미디어아트)도 자연스레 ‘예술적인 경지’에 이를 것이라 믿으며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많은 산업 종사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산업계에 국한된 문제일까? 글쓴이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영화를 본적은 있지만, 영화관이나 영화제에서 뉴미디어아트나 게임을 본적은 없었다. 전자의 경우는 오늘날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정말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 다양성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이는 비대칭적인 현상임에 분명하다. 영상매체는 지배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으나, 영상과는 거리가 먼 뉴미디어매체는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 영상매체는 보다 촉각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를 재매개하기도 한다. 한 예로 이번 <종합극장>전의 미디어 색션에는 에반 미니(Evan Meaney)의 <세이바스 : 에필로그 - 재현의 근원 Ceibas : Epilogue-The Well of Representation>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RPG 게임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그 작업은 ‘영상물’로서 벽면에 투사되고 있었다. <세이바스>는 게임 콘텐츠를 영상물로 편집한 머시니마(machinima)이다. 그렇다면 이 작업은 영상일까 게임일까?


에반 미니(Evan Meaney), <세이바스 : 에필로그 - 재현의 근원 Ceibas : Epilogue-The Well of Representation>


  이미 매체 간 재매개가 일상화된 상황이라서, 더 이상 그린버그처럼 특정 분야의 순수성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상황이라서, 이런 논의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영상 매체 = 미디어아트’라 보아도 무방한가? 영화나 영상작업은 미디어아트(혹은 뉴미디어아트)일까? 반대로, 미디어아트(혹은 뉴미디어아트)는 영화나 영상작업일까? 이는 비내러티브적인 영상작업에도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다. 소위 실험영화, 혹은 실험적인 영상작업과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뉴미디어아트)는 무엇이 다른가?

사회와의 소통, 그리고 미디어아트

  이러한 모호성은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신세대 미디어아티스트들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일 수 있기에 중요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 문제는 과거 중세의 신구논쟁처럼 매체와 매체 간의 지리멸렬한 우열논쟁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본다. 단적으로 시청각적인 것을 내러티브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미디어아트(특히 피지컬 컴퓨팅이나 사운드 비주얼라이제이션)는 영화만큼 진지하지 못하며, 사회적인 내용을 더 잘 담지하지 못한다는 논쟁으로 변질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존 기계매체를 사용한 예술과 새로운 디지털매체를 사용한 예술의 대립은 이전 모더니즘 시대의 매체성 담론만큼 뚜렷하게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여전히 존재한다. 작가마다 사용하는 도구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있는 한, 매체 간 차이와 특성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구는 구분을 낳고, 구분은 개성을 낳으며, 개성은 정체성과 연결된다.
  게다가 우리는 여기에 ‘대중과의 소통’의 문제까지 결부시켜 다뤄야만 한다.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은, 특히 사회적인 표현 수단으로서의 뉴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탐구되었다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매체 자체의 형식적, 기술적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넘어 사회와 주변 관계로 작업을 확장하는 경향은 이미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는 1990년대부터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제는 거대담론이라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려 시도하는 인간의 발달단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디어아트도 이제 그런 시도를 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지난 2010년 미디어시티 서울에서도 트위터 등을 활용한 작업이 나온 것을 보면 그런 모습이 보였지 않는가?
  문제는 그 ‘통과의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데 있다. 대개 이런 문제는 결국 다음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 같다. ‘다 잘할 수 있는가?’ 대중이 지루하지 않도록 어필할 수 있는 대중성도 가지면서, (아도르노 식의) 예술적인 태도를 지키면서 예술성을 충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이 문제는 사실상 모든 예술이 고민해왔던 것이며,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시대인 오늘날에는 그것이 곧 (예술가와 예술작품 모두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다.
  특히 미디어아트는 이 부분에서 더 어려운 처지에 있다. 그 누구도 미디어아트에 요구되는 제원이, 종이와 연필을 최소요건으로 하는 문학보다는, 비싼 재료를 요구하는 조각이나 건축에 가깝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기술이 저렴해지고 널리 보급되어 누구나 쉽게 프로젝션 맵핑을 할 수 있고 3D 프린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여전히 미디어아트는 준비해야할 것이 많다. 더군다나 그것이 단순히 만들어놓고 작가 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인증받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투입 비용과 결과물의 ‘품질’ 간의 정비례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의미에서든 처절한 의미에서든, 미디어아트는 대중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도 이 점에서는 비슷한 처지에 있지만, 상대적으로 영화는 제도적인 안전망을 갖추었다. 반면 뉴미디어아트는 아직 발달단계에 있다.

새로운 미디어아트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번 전시에 영상만 출품됐다고 해서 내년 미디어시티 서울에서도 영상 작업만 나올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섣부른 단정이다. 당연히 박찬경 감독이 영상 매체에만 올-인한 전시를 기획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글쓴이가 이런 고민을 장황하게 써내려간 이유는 이번 <종합극장>전이 미디어아트 관람자층에게는 내년 미디어시티 서울 2014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며, 미디어시티 서울 기획진에게는 기획 방향을 정하는 지표가 되어줄 전시이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미디어 시티 2014가 순수영상매체에만 치중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시청각적 영상 관람에 국한되지 않은 미디어아트도 사회문화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박찬경 감독이 미디어아트와 사회적 맥락의 결부를 더 강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해답 제시는 결코 ‘영화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디어아트도 변해야 하며, 단순히 흥미 위주의 작업에 머물지 않고 영화처럼 심각한 면도 다룰 수 있는 예술매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단순히 그것이 영화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기존 영상매체의 아류나 확장이 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 다큐멘터리처럼 문제가 되는 현상을 촬영하고 보여주거나, 혹은 그와 유사하게 ‘연극적으로’ 시뮬레이션을 통해 재구성 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이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상당한 격차가 있을 것이라 본다. 또한 이미 기존 예술영화들이 시도했던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내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 역시 새로움을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과는 격차가 있을 것이다. 작가출신의 새 감독은 과연 어떤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 것인가? <종합극장>의 미디어아트 작품들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던 대안들이, 미디어시티 서울 2014에서는 드러났으면 한다.


글. 홍선표 (앨리스온 수습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