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티스토리 툴바



관객에 대한 물음 앨리스온 독자와 함께 본 LIG 공연 <아이의 아이>

Waehrend die Kriterien der Choreographie, wie etwa Vorbereitung, memoriale Festlegung, Geschlossenheit und Wiederholbarkeit sind, stellen Unwiederholbarkeit, Offenheit, Spiel und Spontaneitaet die wichtigsten Merkmale der Improvisation dar.[각주:1]

In a set choreography we know what we are doing, and what is actually interesting in an improvised performance, is to not know (...) that I can keep (...) the spontaneity, this state of being in the unknown, of risk, of playfullness and of surprise.[각주:2]

In improvisation it's the acceptance of failure which is important, it isn't preset, the composition process is 'happening' right before your eyes in performance.[각주:3]

"준비, 기억의 확정, 닫혀있음, 그리고 반복 등이 안무의 영역인 반면에 반복불가능, 열려있음, 놀이 그리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즉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각주:4]

<공연 中 현장인터뷰 진행자가 읽어주었던 문구>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은 언제나 무대를 바라보며 장시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러나 <아이의 아이>공연의 관람자 중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은 없었다. 무대를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무대로 향하거나, 극장을 벗어나 복도를 서성인다. 공연은 이미 공연장을 넘어 관람자의 5시간동안의 행동에 의해 구성된다. 누군가는 요리를 맛보고, 누군가는 옷을 입고, 누군가는 대화를 나누고, 또 누군가는 첼로를 배운다. 

마치 1952년 독일의 도나웨신겐에서 개최된 현대음악제에서 존 케이지가 4분33초의 3악장을 음표 없이 TACET[각주:5]으로만 작곡하여 들려줬던 것처럼, 어쩌면 관객들은 당황스럽게 이러한 상황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미술이나 연극에서와 같이 불확실성과 우연성의 작곡을 실험한 존 케이지는 청중들이 내는 소리, 연주자가 악보를 넘기는 소리 등 4분 33초 연주 동안 들린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되도록 하였다. <아이의 아이> 공연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5시간이라는 실험적인 공연 시간과 함께 오직 즉흥으로 구성되어, 공연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게 된다. 더불어 ‘관객’이 공연의 내용이 된다. 시간이 갈수록 기존의 공연자와 관객, 극장과 사람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관객은 무대 맞은편에 앉은 익명의 방문객이 아닌 퍼포먼스의 대상인 동시에 참여자라는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첼로연주가 진행되는 가운데, 의상 피팅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모습>


이번 공연은 앨리스온 독자들에게도 관람의 기회가 주어졌다. 관람자의 한 사람으로서 독자들이 느꼈던 생생함을 글을 통해 전해보고자 한다.

극장 혹은 공연장은 그 나름대로의 권위를 가진다. 그 권력은 관객과의 관계에서 파생되고 관객과 퍼포머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몸과 움직임을 일정 대가를 주고 보는 것이고 무용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짜임새 있게 그리고 치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 기존의 극장의 권위이자 질서다.

그러나, 장수미의 이번 공연 <아이의 아이>에서는 이런 권력구조가 붕괴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가 있다. 5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 ‘즉흥’을 테마로 하는 이 공연이 처음 시작될 때 필자와 필자의 동행은 춤을 추는 무용수를 무대의 완전한 밖인 객석에서 바라보았었다. 머리 위에는 한가득 의문을, 머릿속에서는 장수미의 움직임과 언어를 해석하기 바빴다. 다른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간 중간 안무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관객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지시를 당한 누군가는 당황한다. 약 1시간 가량 극장의 권위는 ‘즉흥’과‘참여’를 유도하는 퍼포머의 의도를 가로막고 있는다. '포스트 드라마틱 씨어터'혹은 여타 다원예술과 페스티벌 봄(Festival Bom)의 여러 공연들처럼, 참여형 공연예술분야가 소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참여형 공연’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쉽사리 몸을 움직여 극에 개입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이자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시선의 반영이다. 

다시 돌아와 <아이의 아이> 공연 관계자가 “이 공연장 안을 돌아다녀도 괜찮다. 누군가는 무대 위의 오브제들을 만져보아도 된다…”등의 말을 하는 순간 극장의 권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퍼포머와 관객의 경계가 흐려지고, 극 속에서는 끝없는 우연들이 발생한다. 기획자가 말을 함으로써, 극장 위의 퍼포머들은 여러명으로 증식했다. 촬영감독 역시 퍼포밍을 단순히 기록하는 일 뿐 아니라, 누군가를 계속해서 찍는 혹은 찍는 퍼포밍을 하는 퍼포머로 변모한다. 장수미가 자리에 앉으면 그녀 대신 다른 사람이 극의 중심이 되었고, 극장 밖의 복도에서 이뤄지는 요리와 의상 피팅들이 새로운 극의 양상을 형성한다. 이것들은 우연의 잔영이고, 어떻게 이야기하면 퍼포밍의 ‘실패’다. 일반적으로 공연을 지탱하고 있는 극장-관객의 구조, 창작자와 관람자 사이의 관계의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구조가 붕괴되었다고, 이 공연이 실패한 것인가? 그 점에 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공연에서 발생하는 우연들은 공연의 미학적 결을 결정한다. 그리하여 작품을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관객의 일정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조각들을 만들어 각자에게  다른 감동 혹은 사유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장수미의 아이의 아이라는 작품은 우리에게 우연과 참여를 경험하게 한 다소 실험적이지만 유쾌한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선호(creamcardigam@gmail.com)

극장의 권위라는 주제를 갖는 위 글은, 즉흥 공연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극장과 관객은 수직적 구조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관람자는 수동적인 참여로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고, 공연의 기획자는 모든 상황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즉흥 공연은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다. 결국 극장에서의 관람 고유의 권위는 내려놓는 것이다. 대신 그 권위를 관람자와 함께 수평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한 바 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나 외적 맥락에 구속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독립된 존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인데, 저자가 죽으면서 탄생하는 것은 독자였다. 텍스트는 저자가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란 뜻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글의 성격에 대하여 심지어는 저자가 죽는 시점에서 글이 시작된다고 말한 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본 공연은 기획자의 죽음 혹은 극장 권위 유지의 실패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 때문에 기획자가 관람자의 좌석에 앉는 순간, 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공연이 시작됨을 명백히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위: 관람자와 얘기를 나누는 공연 인터뷰 진행자 손옥주 / 아래: 옷을 피팅해 주고 있는 임선열 의상담당자>

무용, 음악, 요리, 의상피팅, 인터뷰가 함께 펼쳐지는 퍼포먼스라는 설명으로부터 공연의 티끌만큼도 떠올려 볼 수 없었던 건 내 미약한 상상력 때문이었으리라. 공연 도중에 원하는 곳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 나가고 들어오는 것도 자유라는 생소한 설명을 읽었을 땐 내게 주어진 충만한 자유로움 때문에 살짝 걱정이 들기도 했다. 엉덩이 붙이고 눈으로 감상하는 공연에 익숙했던 나였기에 마음껏 돌아다녀도 된다는 점이 오히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낯선 기분으로 객석에 앉아있던 나는 퍼포먼스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은 명확하다’는 공연의 설명 문구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도입 부분에서 퍼포먼스의 실마리나마 얻을 수 있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 시간이 다 됐는데도 무대 위는 평온했다. ‘내가 너무 거창한 것을 기대한 건가’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내가 앉은 좌석 열의 맨 끝 좌석 쪽으로 한 여성이 걸어왔다. 그리고는 뒤쪽의 편리한 길을 뒤로한 채 내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왔고 내 무릎과 단단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반대편으로 헤쳐(?) 지나갔다. 한껏 당황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귓가에는 첼로 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로비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고 몇몇 관객들이 일어나 로비로 나가기 시작했다. 로비로 나가보니 한 여성분이 첼로를 들고 다니며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의 그 강렬했던 충돌의 주인공은 로비의 벽과 사람들을 쓸어 만지며 흐읍흐읍하는 신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로비의 한 구석에는 외국인 남성 요리사 분이 견과류와 과일로 보이는 것들을 믹서기에 넣고 열심히 갈고 있었는데 두 시간 정도 후에 시식해보니 이제껏 맛보지 못한 오묘한 맛의 과일땅콩퓨레였다(이외에도 오븐 없이 냉장시켜 만든 케잌과 초콜릿이 제공됐는데 마찬가지로 톡톡 튀는 느낌의 색다른 맛이었다). 다시 공연장 안으로 들어와 보니 디자이너로 보이는 여성분께서 무대 위의 의자에다 상, 하의를 입히고 있었고 또 다른 한 분은 관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종이를 건네주고 있었다. 공연 설명을 처음 읽고 느꼈던 그 당혹스러움과 신비함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이 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몇 시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여러 퍼포먼스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에 현장에 있던 나조차도 LIG아트홀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들 전부를 알 수는 없었다. 무용가 장수미는 무대 2층의 난간에서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여주셨고, 첼리스트 이옥경 씨는 로비에서 관객들에게 첼로 연주법을 알려주는 열린 교실을 즉흥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로비를 지나다니며 완성된 케잌과 초콜릿을 먹기도 하고, 직접 무대 2층에 올라가 손질된 의상들도 둘러보았다. 디자이너 분이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든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관객들을 보면서는 ‘지금 여기 있는 우리는 퍼포머와 관객 할 것 없이 그냥 자기 멋대로 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나 역시 벽 곳곳에 붙여진 포스트잇에 낙서도 하고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들으면서 그 공간에서 자유롭게 헤엄쳐 다녔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환상적이었다. 그 장면들을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쉽게도 딱 하나 밖에 없다. 내게 공연의 시작을 알려 준 그 때의 무릎 감각. 그걸 제외하고는 그 공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마치 방금 전에 꿨던 꿈처럼 흐릿하게 그리고 몽롱하게만 느껴진다. 

이동주(dj3630@naver.com)

5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다채로웠던 경험은 어쩌면 공연을 본다는 행위를 잊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작품을 마주하여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관람자의 강박관념을 제외한다면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즐기는 일상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전해주는 의미를 읽는다는 것은 곧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보겠다는 의지에서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더 바람직한 즉흥공연을 위해서라면, 의도 있는 어떤 행위보다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즉흥은 아예 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최소한의 소품을 준비하는 것, 정해진 시간 내에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 하는 행위 그 자체도 결국은 무조건적인 즉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다음의 관람기도 살펴보도록 하자.


<위: 복도에서 갑자기 벌어진 관람자의 노래와 합주하는 첼리스트 이옥경 / 아래: 케익을 만들고 있는 요리사 조나단 데일>


공연장에 입장을 하면서 관객이 하나둘씩 앉아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며 공연은 시작한다. 무대에서는 두 여인이 정신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듯하다. 공연이 시작이 되는 것은 무대에서 친절하게 공연이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가 안내를 하면서 이다. 친절하게 칠판에 글씨를 적으면서 이 공연에 대해서 관객들이 어떻게 해도 될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무대와 객석을 넘나드는 퍼포머들은 공연의 경계를 허문다. 그에 맞추어서 관객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한다. 보고 싶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보아도 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곤 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꼼짝없이 화장실도 못가는 보통의 공연과는 다르다. 누구에게 피해를 준다는 부담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고 이게 무슨 공연인가 생각되지만 이러한 자유로움 사이에 어떠한 규칙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공연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아무것도 없다기보다 즉흥적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하는 듯하다. 공연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허물없이 마이크를 통해서 관객과 대화하려 한다. 사소한 애기도 하고 진지한 애기도 하고, 이 공연과 상관없는 사적인 애기도 하게 된다. 

문득 왜 공연의 제목이 <아이의 아이>일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공연을 같이 봤던 후배는 아이가 관심을 갖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였다. 생각해보니 공연에서 하는 얘깃거리들이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관심에서 시작되고 보든 안보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공연장 밖에서는 외국 요리사분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 사람들도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 먹을 것에 유독 관심이 많다. 아이들처럼. 이게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하게 반응 하는 듯하다. 이러한 모습들을 관찰한 사람들은 놓치지 않고 이런 것에 대해서 서로 물어보고 애기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려 한다. 

공연이 2시간정도 흐른 뒤에는 이제 좀 지쳐간다. 나가고 싶어진다. 나가도 된다고 했으니 나가서 다시 돌아오는 게 낫겠다 싶어진다. 그래서 나가기로 하였다. 나가는 길목에 공연하시는 분의 삐친 듯한 한마디를 듣게 됐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잘가”를 비꼬듯 애기한 것 같다. 그렇게 이 공간에서 벗어나 일상의 안부에 대해 애기하다 보니 어느새 이 공연에 대해서는 잊혀 진다. 공연이 끝날 무렵 집에 가게 되었는데, 공연장을 다시 들릴까하는 잠시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다시 가 봐도 똑같을 것이라 예상되어 들어가지 않았다. 리뷰를 써야하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느낌도 어떻게 보면 리뷰일듯해서 그냥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이 공연에 대해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정확히 정리되지 않는다. 지금도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은 무용가 장수미씨의 표정과 몸짓 말투 등등 사소한 모습들이었다. 그것이 인상 깊었다. 

안톤(sanghoemail@gmail.com)

이쯤에서 <아이의 아이>라는 공연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실제로는 ‘I of eye’의 의미로 만들어진 이 문구는 개개인이 갖는 관점에 대해 열어 놓는 공연을 하고 싶었던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분명한 목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도대체 공연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이 올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있는데, 사실 그에 대한 결론은 어떠한 평가도 관계없이 수용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떠한 반응이 있었고, 감정이 생겼고, 생각을 하였다면 그것으로 공연이 완성된다는 식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과연 즉흥공연의 참된 의미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위: 첼로를 연주하는 이옥경 / 아래: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무용가 장수미>


한 연주자는 무대 밖 공연장 복도에서 피아노 의자를 사용하여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이크와 앰프를 타고 내부 공연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공연장에 있던 무용가는 그 소리에 반응하는지 안 하는지 불분명한 태도로 무대 위를 거닐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관객석을 바라보며 계속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눈치였다. 관객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의식하는 무용수의 어색한 모습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그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뀌어져 갔다. 공연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연주자와 무용가 둘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다. 어찌보면, 조연이라고나 할까. 먼저 요리사가 있었다. 그는 공연장 복도에서 케익과 파이, 초콜릿을 만들었다. 관객이 요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테이블을 설치하여 오픈시켜놓았었기 때문에 요리사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요리를 해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조연은, 옷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대 앞의 관객석 사이의 복도라던가 무대의 한쪽 구석, 혹은 무대 위, 공연장 밖 복도 등 이 곳 저 곳에서 옷을 소재로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주었다.  일부 관객들은 옷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구경하였고 옷을 만드는 여인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처음에 존재했던 관객과 그녀 사이의 어색함은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빨간 바지를 입고 있었던 공연 스텝이었다. 그녀는 공연 처음부터 어떤 행위로서 해프닝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공연의 1시간이 넘어갈 때 즈음, 뭔가 공연의 진행사항에 반응하는 관객의 소극적인 모습에 어떤 자극을 줘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녀는 갑자기 무대에 나가 관객들에게 본 공연을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댔다. 그녀는 5시간을 진행하는 본 공연은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공연이라고 소개하며, 공연을 적극적으로 즐겨달라고 관객에게 호소했다. 그녀 덕분에 관객은 조금 더 자신있게 관객석에서 일어나 이 곳, 저 곳, 그녀가 설명해 준 것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물론 그 전에도 일부 관객은 복도를 오가면서 구경하고, 요리사가 구워준 케익도 운좋게 한 피스 먹어보았지만, 2/3 이상의 관객은 그 자리에 부동으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빨간바지 스텝은 조금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이 5시간동안의 공연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책임한 공연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관객으로서 5시간을 어떠한 날 것의 소재- 여기서 소재는 해프닝이라 말할 수 있다-들만 던져주고 알아서 반응해주길 바라는 공연이었다. 공연 스텝을 제외한 네 명의 각각의 퍼포머들이 이어간 해프닝들은 대부분 그들만의 해프닝이었다. 연주자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나름의 소리 실험을 이어갔고, 무용가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나름의 행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객에게 말을 건네면서 질문을 이어갔고 관객은 계속 대답을 이어가야만 했다. 의상디자이너는 관객을 세워놓고(물론 동의하에) 천을 입혀놓으면서 의상을 제작해갔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관객을 상대로 무관심적이거나 혹은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 이렇다보니 관객에게 달콤한 디저트를 제공했던 요리사의 행위까지 관객의 환심을 구함으로서 공연에 발을 묶어놓으려는 듯한 장치로 보이기까지 했다.‘아이의 아이’에서 도대체 관객은 누구며, 관객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빨간바지 공연 스텝의 관객을 향한 호소와 디렉팅은 무엇이었는가? 5시간의 당위성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모든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의 실험들에 흥미를 가져주기만을 바랬던 것일까? 그들이 원했던 관객의 ‘참여’는 무엇이었으며, 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관객의 한 사람으로써, 케잌을 주면서 참여를 부탁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했던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면, 과연 이 공연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의 아이’는 미완성의 총체적 난관이었다. 본 공연은 수많은 의문점들을 던져주었으나 질문을 던져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5시간의 기억은 확실히 남겨주었다고는 할 수 있겠다. 

정새해(sayhey.chung@gmail.com)



본래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는 감흥에 따라 움직임을 결정하는 즉흥기법은 비결정기법(indeterminancy)이나 우연기법(chance technique)과는 의미가 다르다. 비결정기법과 우연기법이 공연 전에 미리 모든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연습을 하는 데 비해, 즉흥기법은 말 그대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즉 비결정도 우연도 아닌 것이 즉흥이기에, 무엇인가는 결정이 되어 있고 그것에 반응하여 행동하며, 무조건적인 우연만을 추구하지는 않아야 한다. 이번 <아이의 아이> 공연에 대해 혹자는 혼란스러움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고, 또 다른 이는 실험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즉흥공연의 완성이라는 평가를 했다. 사실 공연이 원활히 진행되려면, 관람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요소가 되어버리는 것이 즉흥공연일 것이다.

존 케이지의 433초 공연도 처음 공연할 당시에는 화를 내고 나가버리는 관객도 있었고,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호통을 치는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된 것일 수 있다. 그 사실을 명쾌히 보여준 것은 그 이후의 촬영된 영상이다. 그 영상에서는 아무도 떠들지 않고 조용히 악장을 넘기는 소리만 존재한다. 이미 청중이 무엇을 할지 예상하고 최대한 그 의도에 맞게 행동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공연도 사실 무조건적인 자유를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무슨 행동이든 해야만 한다는 전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질문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기획자의 의도를 우리는 어디까지 즉흥이라 할 것이며, 또한 얼마나 파격적인 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을 자아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공    연   아이의 아이(I of eye)

▪ 일    시   6월 14일(토), 15일(일) 오후 2시  

▪ 소요시간   총 5 시간

▪ 참    여   컨셉/무용_장수미

             음악/공연_이옥경

             현장 인터뷰 진행_손옥주

             현장 의상 피팅 진행_임선열

             현장 요리 진행_조나단 데일(Jonathan Dale)

▪ 주    최   LIG문화재단

▪ 담 당 자   박은영 

▪ 문    의   LIG아트홀 T. 1544-3922  www.ligarthall.com



장수미

이옥경


글 정리/작성.  이진 [앨리스온 에디터]

  1. Quelle: Friederike Lampert, Tanzimprovisation. Geschichte-Theorie-Verfahren-Vermittlung, Bielefeld: transcript, 2007, p.35 [본문으로]
  2. Mark Tomkins in: A. Benois (Hg.): Nouvelle de Danse 22/33, p.213 [본문으로]
  3. Alessandro Certini in: ibid., p.233 [본문으로]
  4. 프리데리케 람퍼트, 무용즉흥. 역사-이론-방법-매개, 빌레펠트: 트랜스크립트 출판사, 2007 [본문으로]
  5. 'silent(침묵)'을 뜻하는 음악 용어 [본문으로]
신고
TAG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