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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23일 부터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무잔향‘이라는 주제로 공연이 열렸다. 다원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린 공연에는 7개국 24명의 작가의 실험 영상 및 실험 음악이 공연되었다. ‘무잔향‘이라는 이름은 작곡가 존 케이지가 1957년 전미 음악 교사 협회에서 발표한 ‘실험 음악‘이라는 제목의 글의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다.


"텅 빈 공간이나 텅 빈 시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무언가를 보게 되고 무언가를 듣게 된다.

원한다면 침묵 상태를 만들어 보라.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공학적으로는 가능한 한 최대한 조용한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방을 무잔향실[혹은 무향실](anechoic room)이라고 부르며 그 방의 여섯 면의 벽은 특수한 물질로 만들어서 이 방에서는 잔향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몇 년 전[1951년]에 하버드 대학에 있는 그런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높은 소리 하나와 낮은 소리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곳의 연구원에게 물어보니 그는 높은 소리가 나 자신의 신경 체계에서 나는 것이고 낮은 소리가 혈관에서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소리가 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죽더라도 소리는 계속 날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본 리뷰는 이 중 26일에 진행되었던 '리오넬 팔륀+에티엔 께르(프랑스),  사리토테(일본), 케빈 드럼(미국)'의

공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Lionel Palun & Etienne Caire




리오넬 팔륀(Lionel Palun)은 공학을 전공하였고 La Cie Pascoli의 작품을 접한 후 영사 이미지와 퍼포먼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들로 방향전환을 겪었다. 2001년부터 협업과 즉흥, 영상 설치와 퍼포먼스, 소프트웨어 장착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의 디지털 영상 작업을 해오고 있다.

에티엔 케르(Etienne Caire)은 실험영화작가로 주로 추상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전문 필름 랩 등에서 여러가지 과정으로 왜곡된 필름의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변형시키는데 초점을 맞춤 작업을 해오고 있다. 결과물들은 즉흥적인 방식으로 영사하는 퍼포먼스의 형태를 띈다.


24일에는 실험영화작가인 에티엔 케르 단독 퍼포먼스 였다면 26일에는 다양한 맥락에서 디지털 영상 작업을 시도하는 리오넬 팔륀과의 합동 퍼포먼스였다. 퍼포먼스는 약 30여분간 진행 되었으며 가장 첫 번째로 공연되었다.

관객들과 마주한 직사각형의 스크린에 흑백으로 이루어진 원형태의 상이 나타난다. 이 원은 스스로에게서 분리되었다 합쳐 졌다를 반복하며 관객들의 주의를 한 곳으로 집중 시키기를 거부한다. 수동적인 영상의 재생이 아니라 마치 이미지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듯 원은 자유롭게 스크린 여기저기를 누빈다. 동시에 분절되어 재생되는 사운드는 공간의 움직임을 더한다. 이러한 이유는 공연의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공연은 특수한 형태로 제작된 영사기를 통해 이미지를 구현하며 동시에 작가들의 개입으로 영사의 속도와 램프의 밝기 등을 통한 왜곡과 같은 간단한 간섭을 기반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여기에 두 작가는 아날로그 매체에서 발생한 즉흥적 스크린의 표면을 다시 디지털로 재표면화 하면서 차별적인 즉흥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공연 전반에 있어 앞서 말한 원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마치 주인공처럼 퍼포먼스를 이끌어 간다. 심지어 그 배경에 있는 소리는 원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원의 사라진 자리에는 오래된 영화의 푸티지들이 쏟아져 중첩된다. 어느 순간 원의 변형과 움직임이 빨라지며 동시에 원의 이미지들과 중첩된 푸티지들의 경계가 사라진다. 사용된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전쟁이나 폭격의 이미지는 없지만 이때 공연장은 마치 공습을 받는 현장의 중심 같다. 이러한 이미지의 폭격이 지나간 후 원은 앞의 동력을 받아 처음의 움직임보다 더 적극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형태를 띄며 공연을 끝으로 이끈다. 앞선 이미지의 모습이 폭격과 같았다면 이 모습은 마치 한여름 밤의 불꽃놀이와 같았다. 폭격의 중심에 있던 이들은 한순간에 아름다운 색색깔의 폭죽이 터지는 현장의 관람객이 되었다. 

실험영화의 경우 일반적인 영화가 가지는 내러티브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실험을 통한 이미지 자체의 움직임과 충돌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 퍼포먼스의 경우 이러한 목격을 통해 단조로움이 아닌 역동적인 온전한 공간의 채움을 느낄 수 있었으며 이 경험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너머의 메세지를 스스로 느끼고 체험하게 했다. 그들의 퍼포먼스가 능동적이 듯 공연을 관람하는 자도 능동적인 태도로 공간을 사유 해야 순간의 공간을 만나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Saritote 



  사리토테(Saritote)는 기타리스트/작곡가/즉흥연주가인 타구 스키모토(Taku Sugimoto)와 여배우/화가/가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에 카무라(Moe Kamura)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이번 무잔향에서는 펑크밴드 Core of Bells의 드러머인 타케시 이케다(Takeshi Ikeda)가 합류하여 트리오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흔히 상상할 있는 복잡한 전자적 사운드퍼포먼스 세팅과는 거리가 있었다. 준비된 악보가 있었으며 기타-보컬-드럼의 일반적인 밴드 형식의 세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다루는 악기도 악기 자체였지 실험적인 무언가가 가미되어 있지는 않았다. 기타의 타구 스키모토는 별도의 이펙터 없이 일렉기타-기타엠프만 갖추고 있었다. 드럼은 밴드공연에서 쉽게 접할 있는 일반적인 4기통 드럼이었다. 그리고 보컬의 모에 카무라는 가끔 기타를 들고 줄을 튕길 뿐이었다

 이런 미니멀한 악기 세팅과 더불어 연주자 주위에는 백열등 부분조명을 설치해 어두운 홀에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그들이 내는 사운드 또한 조명처럼 은은했다. 그리고 소리들은 분위기만큼이나 섬세하며 미려했다. 기타의 타구 스키모토는 하모닉스주법을 통해 청아한 음들로 공간을 채워갔다. 보컬의 모에 카무라는 음에 맞춰 나지막하게 알아차리기 힘든 특정 음절들을 날숨처럼 내뱉었다. 드럼의 타케시 이케다는 최소한의 연주로드럼이 있다.’라는 정도의 존재감만을 간간이 드러냈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던 세밀한 소리들은 40 분간 조화롭게 공간을 부유했다. 그리고 연주자가 준비한 악보가 넘어가는 순간과 소리조차도 마치 연주의 일환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렇게 흘러갔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작고 섬세한 소리들이 잠깐의 고요함, 침묵마저 연주의 일부인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운드아트 퍼포먼스들이 공간을 소리로 가득 채우는 형식이었다면 사리토테의 연주는 오히려 소리를 비우는, 덜어내는 형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침묵으로서 공간을 채우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연주 후에 기타의 타구 스키모토와 잠깐 대화를 나눴었다. 하모닉스만을 사용한 이유, 즉흥연주 대신 악보를 준비한 이유, 악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연신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다 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깐의 말로 설명하기엔 길고 복잡한 뒷이야기가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실제로도 그는 장고 끝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거나 그냥 그렇게 했다는 식의 대답을 하였다. 지금에야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어찌 보면 퍼포먼스를 특정한 전제들로 분석하길 꺼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질문처럼 퍼포먼스가 무언가의 의도를 전제하고 행해졌다고 받아들이기보단 그들이 표현한 그대로를 보고 느껴주길 바랐던 아니었을까.

 

Kevin Drumm

 


케빈 드럼 (Kevin Drumm) 미국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험음악가이다. 작업의 형태는 앨범이나 공연, 설치작품을 위한 음악을 만드는 형식이며, 초기에는 실험적인 기타연주로 음악을 시작하였으나 이후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으로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케빈 드럼의 공연에 앞서 무잔향의 다른 참여자인 한국의 사운드아티스트 홍철기씨는 그를 자신이 생각하는 21세기 최고의 실험음악가라고 소개하였다. 물론 작가의 칭송이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질 없다. 하지만 같은 분야의 사람이 이러한 존경을 표한다는 것은 적어도 단순한 겉치레는 아닐 것이다

그는 공연에 앞서 복잡해 보이는 테이블 셋과 별도의 커다란 스피커를 세팅하였다. 테이블 위에는 믹서와 노트북 그리고 이펙터들이 즐비했는데 대부분은 직접 제작한 것으로 보였으며 시판 중인 기타이펙터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사리토테가 어쿠스틱, 아날로그적 사운드를 선보였다면 케빈 드럼은 전자-기계적 세팅을 통해 완연한 전자적인 디지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발생시킨 소리가 모두 투박하고 거칠며 차갑기만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파도소리 같은 잔잔한 화이트 노이즈가 바다내음처럼 공간을 채우더니 차츰차츰 다른 노이즈들이 겹겹이 쌓여가며 굉장히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사운드스케이프를 형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발생한 미묘하고 자글자글한 노이즈는 불규칙적으로 공간에 산재하는 듯했지만, 속에서도 일정한 규칙성, 마디를 가지고 있었다. 주기는 마치 해안가를 덮치는 파도의 물결 같았다

이렇게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들은 공간을 침식해갔다. 잔잔하고도 반복적으로. 층층이 쌓여가는 노이즈들은 주기적인 파도가 해안선의 모래를 침식해가듯 점층적으로 공간을 침식했으며 나아가 관객의 청각까지 잠식했다. 처음 노이즈를 마주했을 때는 고요함과 대비되는 이질적인 소리로 인식하였지만, 반복적으로 접하게 후에는 공간의 하나로 인식하게 것이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앞서 쌓아가던 노이즈가 해안가의 파도 같았다면 물결은 점점 청자의 발목, 무릎까지 차올라 넘실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노이즈 위에 쌓아올려진 육중한 저음과 고른 대역의 거친 노이즈는 상대적으로 거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충분했고 마치 수평선 저편에서 파도가 몰려오는 느낌을 선사했다. 점점 커지는 소리들은 차츰 상승하는 파고 같았다. 그리고 거대한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거라는 직감한 몸은 긴장해가고 있었다

이윽고 눈앞에 닥친 거대한 노이즈의 파도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거친 소리에 빠져 있는 동안은 염려했던 것보다 평온했다. 극에 달한 소리는 한계를 벗어나는 출력이어서 그런지 주변을 묘하게 진동시켰는데 이점이 물속을 부유하는듯한 표류 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 어마어마한 출력의 소리들은 거부감이 드는 소음이라기보단 물속에서 느낄 있는 적당한 수압 같은 안락함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런 안락함은 물속을, 소리를 자의대로 유영할 있는 자유로움을 주었다. 다층의 농밀하고도 거대한 노이즈를 선택해서 들어볼 수도 있고,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도 있도록 말이다

그의 공연은 비정형의 노이즈를 주로 다룸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이는 그가 세밀하게 소리를 다루는 스타일이면서 점진적으로, 점층적으로 사운드스케이프를 그려가는 성향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런 표현법 또한 하나의 형식일 뿐이지 정답은 아니다. 무자비하게 거친 날것의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느냐, 다듬어진 소리를 들려주느냐 하는 것은 그저 다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한 , 불쾌의 판단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며 익숙함에서 오는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글. 김은솔.전민제 [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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