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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은 북을 치고 있다.

마디네는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한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손을 흔든다.
남자들을 눈부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대지도 전율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계속해서 북을 울리며, 춤추고 노래한다.
대지가 달을 감싸안을 때까지
갑자기 한 줄기 빛과 함께, 하늘을 밝아온다

- 모니로 라바니푸르(Moniro Ravanipour), <Ahle Ghargh>에서 발췌



   쉬린 네샤트는 대표적인 포스트 식민주의(post-colonial) 작가이다. 그녀가 이러한 수식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포스트 식민주의가 지닌 두 가지 의미[후기, 탈] 중, 보다 넓은 의미론적 범주를 지닌 후기 식민주의의 의미를 작가 스스로의 상황으로 또한 작품을 통해 시사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17세였던 1975년에 자신의 고국인 이란을 떠나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활동하였으며, 1996년 이후에는 고국으로부터 입국이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스스로가 밝히듯 그녀는 노마드[Nomad]적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이란이라는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환대받지 못하고 철저한 타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로부터 조국의 상황으로부터 보편적 감성을 이끌어내는 노마드적 주체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중적 알레고리가 드러난다. 우리가 인지하는 (어쩌면 서구의 시선에 의해 당연시된) 중동 지역은 철저히 이방인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방인의 공간에서 추방된 이들과 또한 그곳에서조차 타자로서 각인되는 여성이 작가의 공간에서 유영한다. 쉬린 네샤트의 초기 사진 작업은 이러한 이중적 존재 [이방인의 이방인]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방인의 공간은 어디인가?


<알라의 여인들 - 침묵의 저항>, 1994

1994년작 <침묵 속의 저항 Rebellious Silence>과 1996년작 <무제 Untitled>에서는 이방인으로서의 여성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두 작품 모두 차도르[Chador]를 착용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한 작품[94년작]은 총의 머리부분을 자신의 얼굴 앞에 위치시키고 있으며, 다른 작품[96

년작]은 자신의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두 작품은 1980년의 이라크에 의한 이란 침공이 발생하자 자발적으로 총을 든 이란 여성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이란에서의 여성의 권리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1963년 여성이 투표권을 얻으며 여권이 신장되는 듯 보였으나 1979년 이슬람 공화국이 설립되며 여성들은 베일 쓰기를 강요받게 되었다. 이처럼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받고 억압의 대상이었던 여성의 존재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폭압에 저항하며 스스

로를 억압한 국가가 타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국가를 위해 조용한 봉기를 진행했던 것이다.


94년작의 경우,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 여성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작가의 자화상을 바탕으로 얼굴 정면의 반을 가늠하고 있는 총기의 모습과 여성의 얼굴 부분에 타헤레 사파자데[Tahereh Saffarzadeh]의 싯구를 적어넣었다. 쉬린 네샤트는 이란 여류 시인들의 구절들을 작품의 텍스트로 삽입하는데, 차도르를 쓴 여인의 모습은 검은 총기와 얼굴에 씌여진 텍스트로 인해 강한 대비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작품이 보다 강렬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흑백의 사진 위에 씌여진 텍스트의 존재일 것이다. 텍스트는 자국의 언어인 파르시어[페르시아어]로 적혀있다. 이는 일견 시 구절의 원문을 사용하여 작품 속 대상과의 일체감을 획득하려 하는 의도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작가가 뉴욕을 중심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이란이 아닌 타국에서 활동한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언어 사용은 단순히 시각적 효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모국어로서의 언어로서의 파르시어는 여성이라는 이방인의 존재와 의미의 충돌을 만들어낸다.



오 수호자여,
시린 밤 한 가운데에 선 당신은 육신의 집을 떠난 자의

시선으로 주시한다. 피로한 눈꺼풀을 한 채,


오 밤의 간호사여,
부상 입은 도시가 죽음의 약탈로부터 쉴 수 있도록.
당신의 불면은 진정어린 신념에서 나온다.

- 불면의 충성, 타헤레 사파자데 1980에서 발췌



   96년작의 경우, 이전 작업과 연결되는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타 작가의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여인의 얼굴에는 텍스트가 덧씌워져 있으며 차도르 역시 여인의 수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자신의 손으로 입술을 만지고 있으며 그 손짓은 매우 조심스럽다. 이러한 제스쳐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만약, 94년작이 '총'이라는 강력한 오브제를 통해 여성의 봉기를 직접적으로 상징했다면, 이 작품은 여성의 언어를, 여성이라는 이방인의 존재의 언어를 그것을 발화하는 주요한 기관인 입과 입술을 클로즈업 함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알라의 여인들 - 무제>, 1996

절대적 이방인들에게 있어서의 최후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모국어라고 하는 자신의 몸에 깊숙히 배어있는 언어일 것이다. 위의 사진 작업에서도 작가는 차도르를 쓴 여인으로 분하여 이란 여성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녀는 17년 동안 망명생활을 한 이방인으로서의 기억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차도르를 착용해도, 흑백의 사진을 통한 시간의 우회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부족함이 느껴지는 듯 하다. 어쩌면 이러한 결여된 감정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작가 본인만이 느끼는 스스로의 이질성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파르시어라는 텍스트의 삽입은 매우 효과적인 예술적 충돌의 모티브가 된다. 데리다는 언어를 소속의 첫 조건이자 마지막 조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언어가 소유 박탈의 경험, 환원 불가능한 자기 고유성 박탈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언급한다.[각주:1] 만약, 데리다의 언급처럼 언어가 우리 자신의 고유성을 박탈할 수 있다면, 당연하게도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역할 또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데리다식의 해체적 시각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모국어를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쉬린 네샤트는 자신이 고유성을 이란 여성에게 있어서의 상징적 사건으로, 그리고 그러한 사건에 직면하는 그녀들의 태도를 관통하며 동기화한다. 물론, 이러한 동기화가 작가 개인의 차원에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관객들에게 공명하는 이유는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역사적 아픔과 차별의 순간을 그리고 그로부터 지각될 수 있는 여성의 감성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의 3부작과 해체적 공간 


<격동 Turbulent>, double channel video, 1998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제작된 비디오 3부작은 이러한 이방인의 감성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복합적으로 풀어낸다. 첫 번째 작품인 <격동 Turbulent, 1998>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것을 금지한 이란의 법을 다루고 있다. 작품은 두 개의 마주보는 스크린에 의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첫 번째 스크린에서 남성 싱어가 노래를 부른다. 긴 노래가 끝나고 남성 싱어 뒷쪽에 앉아있는 객석을 채운 수많은 남성 관객들은 열정적으로 환호한다. 그리고 조용히 맞은편 스크린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 싱어의 노래가 시작된다. 음악의 오랜 전통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부르고 응답하는 Call-and-Respons' 방식이다. 그런데, 전환되는 방식이 대조적이다. 남성의 노래가 울려퍼질때, 여성은 베일에 가리워진 채 텅빈 무대를 마주하고 뒤돌아 서있다. 이윽고 남성의 노래가 끝나고 여성은 노래를 시작한다. 그러나 남성이 객석을 채운 남성들로만 구성된 관객을 뒤로 한채 맞은 편[스크린]의 여성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면, 여성은 대조적으로 텅 빈 관객석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데, 카메라가 그러한 그녀 주변을 돌며 그녀의 노래 부르는 장면을 포착한다. 왜 남성은 여성을 향해, 그리고 여성은 객석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또한, 남성의 노래는 일반적인 범주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인 것에 반해 여성의 경우엔 노래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일종의 구음[口音, an oral sound]이다.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노래의 공간을 카메라는 여성 주위를 탐색하듯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한다.

   쉬린 네샤트의 영상 작업은 스크린의 확장적 형태를 잘 드러낸다. 소위 확장 영화[Expanded Cinema]라 분류되는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관객은 두 개의 스크린에 의해 만들어지는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는 혼성적 공간에 노출된다. 돌림노래와 같은 형식이기에 주의의 집중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싱어 -> 여성 싱어]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주체가 전환되는 장면에서, 그리고 주체의 노래를 듣는 타자로서의 상대의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지각을 분산시켜야 한다. 벤야민은 단일 스크린을 사용하는 영화를 통해서도 분산적 지각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스크린의 분화 및 확장적 형태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객의 의식을 공간에 분산시킨다. 관객은 남성의 스크린[남성 싱어가 노래 부르는 장면이 흘러나오는]에서는 관객을 마주하는 싱어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객석과 같은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의 스크린은 관객이 마주하는 공간적 구조를 지니지 않는다. 여성 싱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스크린 속의 텅빈 객석을 응시하며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관객의 공간은 여성의 공간과 구조적 괴리를 지니게 된다. 즉, 관객은 남성 싱어의 경우, 객석의 위치에서 관찰하는 반면, 여성 싱어의 경우, 무대 뒷편의 공간에 놓여지게 되는 셈이다. 물론, 카메라는 여성의 뒷모습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관객은 무대 뒷편의 공간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여성 싱어의 모습을 전지적으로 조망하게 된다. 매체에 의해 재편된 공간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관객은 여성 싱어의 노래부르는 뒷 모습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남성 싱어의 모습보다 더욱 큰 감정을 전달받게 된다. 이러한 강화된 감정은 여성 싱어의 구음에 가까운 소리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차도르를 착용한 채 구슬프게 소리를 내는 타자의 모습에서 [이란의 역사적 배경을 모른다 하더라도] 느껴지는 두터운 감정의 공명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감정은 앞서 진행되었던 남성의 모습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요컨데, 여성은 이 작품에서 얼굴없는 타자로 등장하지만 이러한 타자는 남성이라는 주체와의 대립으로는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다.


<환희 Rapture>, double channel video, 1999


   이러한 대칭적-대립적 스크린의 배치는 이듬해 제작된 <환희 Rapture, 1999>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격동>이 이란에서의 여성-노래금지법에 관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면, <환희>는 좀 더 넓은 의미-지역에서의 자유를 속박당한 여성을 그려내는데,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스크린을 대칭시킨다. 그러나 <격동>이 순차적 스크린의 시점 이동을 꾀하였다면, <환희>는 남성과 여성의 내러티브를 동시에 보여주며 결국 성별의 차이로 구별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남성과 여성을 연결시킨다. 이 작품에서 남성은 한데모여 요새와 같은 진지에서 여성을 응시하고, 여성들은 남성에 의해 구축된 환경을 벗어나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격동>과 유사한 리듬감이 발생한다. 남성의 스크린에서의 수축은 여성 스크린에서의 이완으로, 여성 스크린에서의 응집은 남성 스크린의 해체로 전달된다. 때문에 관객은 동시에 진행되는 두 가지 이야기의 구조적 상관 관계를 떠올리며 두 스크린 사이의 공간을 점유한다. 두 스크린을 통한 분리된 내러티브는 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암시적으로 연결된다. 다만, 이러한 연결이 직접적인 내용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닌, 관객에 의한 의식적 연결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관객은 수동적으로 주어진 내러티브를 소비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 개입으로 두 스크린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열정 Fever>, double channel video, 2000


   비디오 3부작의 마지막은 2000년에 제작된 <열정 Fever>이다. 이 작품에서 네샤트는 스크린을 병렬 배치한다. 앞서 제시했던 대칭 스크린에 의한 순차적 응시는 스크린의 병렬적 사용에 의해 동시성을 획득하는데, 남성과 여성의 분리된 공간은 이전의 작품들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냈던 여성의 제한적 사회적 위치를 보다 직접적인 화법으로 전달한다. 두 개의 스크린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한 남성과 여성의 여정을 그린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길로부터 출발하지만 서로를 스쳐지나며 시선을 교환한다. 이러한 서로에 대한 막연한 끌림은 '집회'라는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예상치 못한 단절의 순간을 맞이하며 종결된다. 그들이 참석한 집회의 연사는 유부녀 줄레이카[Zoleikha]가 청년 유세프[Youssef]를 유혹하는 코란의 우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연사는 여성을 비난하며 집회에 모인 이들을 선동하게 되고 여성은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남성과 여성이 유일하게 한 공간에서 [비록,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을 분리하는 검은 천에 의해 가로막혀 있더라도] 마주하지만 동시에 서로는 서로에게 덧씌워진 사회적 굴레를 체험한다. 즉, 만남의 공간은 동시에 헤어짐의 공간-해체의 공간이 된다.



글.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




  1. 자크 데리다, 남수인 역, <환대에 대하여>, 동문선, 2004, p. 1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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