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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9일부터 10일, LIG아트홀에서 권병준은 신작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을 공연 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삐삐롱 스타킹에서 고구마라는 예명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고 지금은 프리랜서 음악인, 음악관련 하드웨어 연구자로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선 5월, 그는 이미 프로젝트 그룹 ‘이악’과 진행한 워크샵 결과물을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이라는 제목으로 공연했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권병준이 지난 10여년동안의 작업모음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현대미술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악기를 통해 ‘장면’을 만들어 내는데 관심 있던 권병준의 실험적 ‘장면’을 두 개의 다른 시각으로 ‘목격’ 해보았다.


#1. 비논리적 무대 VS 공간의 인식

먼저 이 공연은 퍼포머가 바닥에 봉을 쿵! 치면서 평균대를 조심스럽게 건너면서 시작한다. 퍼포머는 한 발짝 전진할 때마다 봉을 바닥에 쿵 찍는다. 사실, 이 퍼포먼스의 의미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위태로움? 쿵! 이라는 소리가 전달하는 위압감? 정도. 첫 번째 퍼포먼스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다음 퍼포먼스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지만 두 번째 퍼포먼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연등이 위 아래로 진자운동을 반복하는데 첫 번째 퍼포먼스의 의미를 이끌어 낼 연결점은 없었으며 세 번째 홀로그램 퍼포먼스의 전주곡도 아니었다. 모든 행위들이 이러한 논리적 흐름을 깨면서 무대 중앙, 좌우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공연은 영상, 홀로그램, 사운드, 레이저 등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무대를 구성하고 있다. 물, 바람, 열, 증기, 빛 등 자연현상을 모티브로 한 청각적, 촉각적 장치들이 한 공간 안에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존재감과 이야기를 드러낸다. 공연의 시작은 마이크가 장착된 막대를 의지하여 퍼포머가 평균대를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은 이번 공연의 화두인 ‘안과 밖‘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으며 이 후 등장하는 수증기 막 또한 화두와 관련이 있다. 공연의 구성원들은 흔히 아웃사이더라고 칭 할 수 있는 극장과는 거리를 둔 시스템 바깥의 사람들이다. 이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안과 밖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과 더불어 경계를 자유롭게 하는 모습이 공연의 장면에서 평균대로 그리고 수증기 막으로 표현된다. 이후 공중을 가로지는 등 형태의 스피커가 등장한다. 등은 무대에서 관객 쪽으로 반복하여 움직이며 빛의 이동과 사운드를 생성하고 그로 인해 관객이 공간의 일부를 인식하게 한다.



<하이브리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권병준>


#2. 기술의 언어 vs 방기된 스토리

공연에는 다양한 기술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기술들이 화려하거나 거창하다는 느낌 보다 기술로 만들어진 악기들이 퍼포머와 만나 움직임이 되고 그 움직임이 공간을 구성하여 공간을 인식하게 되는 결과로 나아간다. 그가 만들어 낸 악기들은 여러 기술들이 중첩되거나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있지만 ‘전기히터’처럼 공산품들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이 전기히터들은 여러 대가 공중에 설치되어 고요한 순간을 붉은빛으로 채운다. 공간의 색상의 변화로 인해 전기히터와 물리적인 거리와 별개로 공간의 온도가 높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히터의 열기가 밝혀지는 움직임이 만든 소리가 객석에 직접진동으로 전해져 볼 수 없는 소리가 움직임을 통해 장면화 되며 공간을 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연후반에는 수증기 막에 한 남성이 춤을 추는 장면이 보여 진다. 시간이 흐른 후 수증기 막 뒤편의 벽의 문이 열리며 그 남성이 실시간으로 춤을 추는 장면을 관객들의 눈으로 바로 ‘목격’하게 된다. 안과 밖이 공존하게 되고 관객석과 그 남성의 공간이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관객들은 그의 소리와 움직임을 실제로 접하게 되며 그 남성이 힘들어 움직임이 둔해질 때까지 춤은 이어지다 공연은 끝이 난다.


어쩌면 이 공연은 고의적으로 스토리를 방기하고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과시적인 사운드아트 퍼포먼스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완결된 주제 안에서 성립할 없는 공연이라면 단지 사운드를 위한 사운드아트였을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대연출의 방점은 스토리 보다는 청각과 시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맞춰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즉, 무대동선은 스토리를 토대로 한 연결이 아니라 퍼포먼스가 가장 잘 돋보이기 위한 연출인 듯했다. 퍼포먼스가 막을 내리고 그 다음 행위가 이어질 때, 전후 의미의 연결고리가 이어지지 않았는데 설령 둔해서 알아차리지 못한 들, 그 고리가 헐거운 건 사실이다. 관람자는 의미를 쫓고 있지만 무대는 표현에 집중했다.

수증기를 통한 홀로그램, 하이브리드 피아노 연주와 현악 이중주 등 이 모든 것들이 새롭고 낮선 청각과 시각적 표현이었으나 그것이 어떤 맥락 안에서 의미를 지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기술적인 신기함과 새로움이 새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관람자는 감각을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번역하여 새로운 감각의 영토 안에 포함시킨다. 만약 이 공연이 단지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사운드 표현에 주력하고 그 외에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면 과연 이 공연에서 보여준 감각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악기를 연주하듯 줄을 이용한 사운드 퍼포먼스> 


#3. 사운드 아트의 한계 vs 장면의 목격

개인적으로 이 공연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각각의 사운드와 비주얼을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바로 위의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이 공연이 사운드아트가 관객에게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없는 한계점을 명확하게 드러났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개별적인 사운드의 의미를 관객에게 드러내는 것을 굳이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소리의 기승전결 혹은 고조에 따른 사운드의 특성을 더욱 매력적으로 이어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 까라는 아쉬움이다.


그는 소리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지만 소리만 가지고 표현하니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한다고 한다. 또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무대를 사용하는 데, 새로운 악기는 새로운 제스처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제스처들이 모여 어떤 ‘장면’ 들을 만들어 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보았듯 어쩌면 이 공연 안에서 소리의 존재와 의미들만을 찾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 공간의 울림을 느끼고 그 순간 자신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악기를 통해 생성된 퍼포머의 움직임에서 그의 10년동안의 시도가 담담히 실험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국악과 하이브리드 악기의 결합>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번 공연에서 단 한가지 이견이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한정된 공간에서 다양한 매개물을 활용하여 청각과 시각을 배열, 교차한 무대연출이었다. 무대 중앙, 좌우, 백 스테이지 하물며 수증기를 통해 공중공간의 활용과 퍼포머의 얼굴이라는 공간까지 표현매개물로 활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만, 이러한 연출을 극대화하는 방법론을 바라본 시각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운드 아티스트들이 고민하는 문제. 즉, 비시각적 매체를 어떻게 두드러진 감각의 형태로 변환시켜 관객의 감각을 두드릴 것인가 였다. 권병준의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이 의미 있었던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에 관한 고민을 풀어주는 실험들이 이 공연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글. 김은솔.임태환 [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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