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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SeMA 비엔날레 : 미디어시티서울 2014_귀신, 간첩, 할머니‘가 개최되었다. 박찬경 감독이라는 작가 출신의 감독이 선임되어 많은 화제를 모았고, 이러한 화제와 함께 걱정과 우려, 기대와 찬사가 전시 오픈 전부터 다양한 미술 관계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또한, 비엔날레라는 전시 형식에 관한 고민, 그리고 ’미디어‘라는 수식의 필요충분조건에 관한 이야기 또한 이번 미디어 비엔날레와 함께 제기되어온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와 고민들은, 당연하게 불거질 수밖에 없는 각자의 배경과 의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디어는 현대 예술의 흐름에 있어 거부할 수 없는 주요한 소재이자, 형식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미디어아트‘라는 특정한 독립 장르로서의 생명력은 이제 그 힘을 잃었다는 평가 또한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이며, 비엔날레라는 전시 형식은 이제 ’2년마다 찾아오는 대규모 전시’라는 외연 이외의 의미를 찾기 힘든, 오히려 그 형식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비판을 감내해야하는 부담스러운 틀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박찬경이라는 자신의 색이 충만한 작가의 감독 선임은, 앞서 언급한 ‘미디어아트‘라는 장르의 구원자로서의 미디어비엔날레의 의무감을 다시금 되새기게 만든 매우 불안정한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이전 비엔날레(미디어시티서울 2012)의 감독이었던 김선정은 ‘신뢰 Trust'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미디어라는 ’형식‘ 자체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 그리고 그것에 기인하는 대중들의 입장을 재고하게 만드는 자세와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입장은 어떻게 보면 현대 예술이 외면하기 힘든 세계의 본질에 침투하기 위한 문제 제기로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미디어‘ 비엔날레에서 제기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의 답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관객들은 미디어라는 ’형식‘으로부터 (특히, 최근 등장하는 뉴 미디어에 의해) 제기될 수 있는 본격적 ’신뢰‘ 문제에 관한 해답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찬경 감독은 어쩌면 식상할 수 있는 미디어-예술에 있어 매번 등장했던 기대들을 일시에 깨트려버리는 주제 선정을 감행했다. ‘귀신-간첩-할머니’라는 주제는 매번 ‘미디어 예술이 과거의 예술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케케묵은 논쟁거리를 가볍게 통과하여 미디어를 당연하게 예술의 품 안으로 감싸 안아 버렸다. 이는 감독의 색이 전시 전체를 좌우하여 다양한 미디어 예술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우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자세로도 읽혔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려는 상당 부분 전시를 통해 우려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뚜껑을 연 미디어시티 서울 2014는 박찬경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늘 보여주었던 문제들을 확대하여 제시한 일종의 거대한 박찬경 개인전과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까닭은, 위에서 열거했던 주변의 문제들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한 행보에서 외려 그에게 의무감을 제기했던 미술-관계자들과 관객들에게 그 질문들 정면으로 돌려주려는 듯한 자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전시의 주제는 얼핏 보기에는 박찬경 감독이 천착했던 주제 의식의 연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 가지의 키워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의 사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혹은 출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매체의 본질적 성격과 맞닿아 있다. 박찬경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서 제시해오던 주제를 좀 더 포괄적인, 그리고 시대를 사유하는 키워드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들은 작가의 개별 작품 속에서와는 다르게 각기 국가, 문화, 삶의 사이에 혹은 경계에 위치하는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키워드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사이-경계의 문제를 미디어비엔날레라는 매체 예술의 품 안에서 제시해야 된다는 점인데, 오히려 이러한 전제가 매체의 본질적 성격과의 연결을 보다 더 강화시켜 준다. 매체는 본질적으로 중간(medium)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형식적 운명을 지닌다. 때문에, 매체는 그 자체로 세계의 안도 밖도 아닌, 그 사이 공간에 위치하는 유령적 속성을 지닌다. [‘영매’라는 단어의 번역도 medium을 사용한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가 늘 마주하는 매체에 의한 세계는 현실 자체로 보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을 지닌다. 귀신과 간첩, 할머니의 존재는 이러한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세계를 투영하는 메타포이자 필터이다. 귀신은 흔히 저승으로 가지 못한 영혼 혹은 유령적 존재이다. 이승으로 대변되는 현실세계와 저승이라는 가상 세계의 사이 공간에서 출몰한다. 할머니 또한, 삶과 죽음을 연결 짓는 키워드이다. 비록 육신은 현실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죽음을 앞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장 실질적으로 대변한다. 간첩 또한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틈에서 그는 존재하며, 국가 사이의 경계가 해체될 때, 그 존재는 소멸한다. 각각의 키워드는 또한 서로 연결되어 이야기의 층위를 더욱 두텁게 만든다. 가령, 귀신과 할머니는 각각 초자연적 현상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목도하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저마다의 또 다른 의미를 다시금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 가지의 소재들은 현대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아시아라는 지역적 특성에 기인한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로 접어들며 발생했던 역사적-문화적 문제들이 여기에 침투한다. 유령이나 좀비가 아닌 귀신이, 모든 연령대를 넘어 늙은 여성의 상징으로서의 할머니가, 그리고 냉전과 경제 발전의 급격한 변화를 상징하는 간첩은 따라서 서구의 해체적 사유와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오히려 그러한 차이로부터 세계화로 연동되며 주제의 선명함을 획득하는 소재가 된다.


Eric Baudelaire, <시게노부 메이와 시게노부 후사코, 아다치 마사오의 원정, 그리고 이미지 없는 27년>, 2011


   전시는 이러한 세 가지의 소재가 구획 별로 정리되어 있는 형태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또한 주제가 서로 얽혀있어 의미의 층위가 한층 더 복잡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제의 흐름을 읽기 힘들고, 겹쳐있어 해독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의 경우에도 하나의 메타포에만 부합하는 작품이 아닌, 주제와 내용이, 그리고 형식이 혼재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 기존의 선형적 감상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강요한다. 이렇듯 다소 불친절한 전시 구성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작품들이 제시하는 주제들의 얽힘에 그리고 모호함으로부터 발생하는 기묘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이와 동시에 17개국 42점이라는 전시의 작품 구성의 숫자는 다분히 상징적으로 남는다. 관객에게 이러한 숫자는 결국 비엔날레라는 형식이 가져다 준 규모의 경제 이상의 것으로 다가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뚜렷하게 인식되지는 않지만, 다양한 문화 속에서 발생한 유령들이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현장은 역설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것이 박찬경이 의도한 미디어의 영매적 작용일지도 모르겠다. 개막일인 9월 1일에 진행되었던 개막행사들은 이러한 전시의 주제와 구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했다. ‘서울새남굿’을 시작으로 퍼포먼스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자크라왈 닐탐롱(Jakrawal NILTHAMRONG)의 단편영화와 에릭 보들레르(Eric Baudelaire)의 작업은 그것에 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나뉘었을지 몰라도 금번 비엔날레의 주제들의 연결성을 적절하게 잘 보여준 프로그램들이었다. ‘굿’이라고 하는 무속의 제의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필수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 첫 번째로 제의를 올려야되는 대상으로서의 ‘신’과 이러한 신을 숭상하여 제의를 올리는 ‘신도’, 그리고 신과 신도를 매개하는 사제자(司祭者)인 원무당(元巫堂)의 존재가 그것이다. 때문에, 비엔날레의 첫 번째 행사에서 이미 관객은 ‘굿’이라 명명되는 전통적 행위들을 목도하며, 스스로의 의도를 넘어 매개자의 행위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매우 전통적인 미디어에 관한 해석이자, 이번 비엔날레가 전달하고자 하는 영적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점이다. 결국 굿이라는 행위는 초자연적 대상을 전제하는 매우 비과학적이라고 인식되는 행위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비과학적 매개의 행위가 미디어의 본질적 의미와 직결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역설적인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주최 측은 이러한 개막식의 굿이 전시의 개막을 축원함과 동시에 과거 재판소와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던 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의 역사 속 애환을 씻고자 하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개막식의 굿은 삶과 죽음,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를 연결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전시의 중요한 이정표로서 기능한다.


Tamura Yuichiro,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鱸包丁)>, Suzuki Knife, Social Cooking, 2014


   1층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한국 작가인 양혜규의 작품 <소리나는 조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수천 개의 방울들로 만들어진 설치물은 전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 무당이 사용하는 방울들로 제작된 설치작품은 ‘바람의 궤도’, ‘소리나는 보름달’, ‘소리나는 춤’의 세 작품 군으로 구성되는데, 비단 한국인 및 아시아인들이 아니더라도, 방울 소리와 이와 연동되는 향의 존재는 다분히 주술적이고, 정신적-초자연적으로 인식되는 요소이다. 관객은 전시장 중앙에 설치된 작품들로 인해 정신적 공명(혹은 이와 반대로 개별 작품의 인식을 방해하는 노이즈)을 체험한다. 이를 뒤로한 채, 타무라 유이치로(Tamura Yuichiro)의 작품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鱸包丁), 2014>으로 이동하게 되면, 전시를 보는 현재의 장소가 미술관임을 잊게 만드는 설치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마치 재판장처럼 보이는 환경을 구현해놓고 1764년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작품의 제목은 당시 유행했던 가부키 극에서 따온 것인데, 살인 사건에 사용된 흉기가 생선을 손질할 때 사용하던 식칼이었음으로부터 물고기를 가르거나 손질하는 것을 지칭하는 일본어 ‘사바쿠’와 옳고 그름을 밝히는, 혼란스러운 일을 풀이하는 ‘재판’을 지칭하는 단어로서의 동일 단어를 미묘하게 차용한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립미술관이 과거 재판소 및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장소적 의미를 다시금 획득하는데, 시간을 거슬러 장소의 의미가 탈바꿈되어진 현재에서 과거의 사건은 작품을 통해 현재화된다. 이렇듯 과거의 의미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양상은 야오 루이중(YAO Jui-chung)의 <만세(萬歲) Long Live, 2011>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1911년(辛亥年)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제작된 이 작품은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화려했던 극장을 배경으로 공허한 외침이 반복된다. 2000년간 지속되었던 전제정치의 종료를 알리고, 새로운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탄생을 알렸던 이 외침은 10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지나온 시간 동안의 변화된 중국의 모습, 그리고 체재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것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냉전과 이데올로기 투쟁, 국가 간의 외교 분쟁의 상처로 얼룩진 아시아의 현재는 이렇게 과거와의 매개를 통해 그 상흔을 다시 소독하는 셈이다.


YAO Jui-chung, <만세(萬歲) Long Live>, 2011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간극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유산으로 의미화 되지 못한 부분들까지 소환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에 인위적으로 노출되었던 아시아의 시간들은 현재를 오염시키고 있으며, 이미 여러 징후들을 통해 미래의 시간들도 이러한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매체를 통해 최대한의 보편적 기억을 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매체의 시각이 보편성을 전제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뒤로 한 채, 우리에게 이러한 기억과 흔적들이 소중한 까닭은 의미화의 체에 걸러지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2층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는 김인회, 김수남 작가의 한국 무속, 굿에 관한 기록(사진과 영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관객들에게 남겨진 것들과 그러한 맥락에서 배척되어버린 요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1960년대 말까지 한국 무속에 대한 기록은 식민지 시기인 1920~1930 년대 일본 민속학자들이 연구한 자료와 소수의 국학자들이 조사한 자료가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생을 함께 굿판을 찾아다니며 작업했던 두 작가의 기록은 현재의 미술관에서 또 다른 맥락으로 소개된다. 2014년 김인회는 지난 40여 년 동안 작업한 약 3,500여 점의 한국 무속 사진과 동영상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가운데 동영상은 355점으로, 총 86건의 굿을 기록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김인회가 직접 고른 30건의 굿 기록 영상 가운데 대표적인 다섯 건을 재편집해 공개하고 있으며, 김수남의 경우, 그의 유작전인 «한국의 굿: 만신들 1978-1997»에 전시되었던 40여 점의 흑백사진 중 20여 점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타계하기 직전 자신의 대표작으로 선정해 친필 서명을 남긴 작품들이며 지금은 그 자취가 거의 사라진 한국 무속 신앙의 원형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김수남, <한국의 굿: 만신들 1978-1997> 연작 중에서. 거제도 별신굿, 경상남도 거제군 죽림마을, 1986


   미디어의 특성으로 인해 지나가버린 과거의 모습들이 현재의 순간에서 생생히 재현된다는 사실은 미디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중간자적 성질과 함께 소멸되어버린 것의 부활과 현전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유령적 기록들로 인식된다. 이번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러한 인식은 시대와 지역, 전통과 성(gender) 그리고 현실과 가상을 아우르는 부유체적 주제이다. 박찬경 감독은 “귀신은 아시아의 잊혀진 역사와 전통을, 간첩은 냉전의 기억을, 할머니는 ‘여성과 시간’을 비유한다. 그러나 출품작은 이러한 주제를 훌쩍 넘어서기도 하고 비껴가기도 하는 풍부한 가능성의 상태로 관객 앞에 놓여 있다. ‘귀신 간첩 할머니’는 전시로 진입하는 세 개의 통로이다.”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감독의 발언은 이번 비엔날레가 의미를 종결지어 소개하는 것이 아닌, 가능성의 상태로, 비결정의 지층으로 남겨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령, 누군가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아시아의 정치적 간극과 그로부터의 시대적 아픔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할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문제로 타 작품들과의 관계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의미다양체로서의 현대 전시가 갖는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열림이 주제의식의 선도와 관객의 이해를 결정하는 주요한 잣대로 기능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던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으며, 또한 얽매여있는 이러한 주제들의 층위가 전체 비엔날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는 기여하지만 그것이 개별 작품을 그리고 각 주제들의 표출에 있어서의 방해물로 작용한다는 사실 또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번 비엔날레가 제시한 미디어의 본질적 의미로부터의 주제 연동은 최첨단 미디어 활용의 최전선이라는 한국의 지역적 배경에서는 오히려 그 신선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시도였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과거의 기록적 매개체를 넘어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인식적 주체로서의 미디어 혹은 미디어로 구성된 현재의 환경을 해석하는 툴로서의 내용 구성은 되지 못함이 안타깝다. 미디어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스스로의 모습과 양태를 달리하며 발전해왔다. 그럼에도 그 본질이 우리와 세계 사이의 그 무엇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로부터 세계 자체로 인식되기보다는 그러한 간극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존재성을 갖는다는 한계를 여전히 지닌다. 따라서 오히려, 미디어의 본질에 접근하는 주제가 현재에서도 유효한 기록으로 또는 기억으로 그리고 유산으로 인식되려면 미디어에 담겨진 과거 기록들의 현재화로서는 부족하다. 이제 우리는 두터워진 현재를 해석하는 틀로서, 실재하는 현실적 존재로서 그리고 미래를 투영하는 현재의 거울로서의 미디어를 상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미디어를 통해 미래를 유산으로 상속받고 있기 때문이다. 



글.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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