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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 프로세스와 이들을 수행하는 로봇으로 뒤덮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삶을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의 변화를 야기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단순히 로봇에 대한 상상과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노동과 물질적-정신적 삶, 나아가 윤리와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까지 그 변화는 다양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로봇에 대한 관점은 어떠할까. 그리고 이러한 로봇을 작가들은, 미술관은 어떻게 바라보고 정리하고 주장하고 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로봇에 대해 내어놓은 하나의 관점 <로봇 에세이>에 대해, 앨리스온 에디터들이 각자의 다른 세가지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풀어내어본다.



1st Essay: 아직도 전기양은 안드로이드의 꿈을 꾸는가 


이종완 (앨리스온 에디터)


  지난 4월 18일부터 7월 1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미디어 랩(제 7전시실)에서 <로봇 에세이 Robot Essay>전이 열리고 있다. 요 몇 년 사이에 현대인들은 네트워크와 연결된 스마트 디바이스와 같은 컴퓨터를 일종의 의체처럼 달고 산다. 현대인들은 이미 잠재적인 사이보그같은 존재가 되었다. 인간과 기계의 피아가 모호해진 시대에 <로봇 에세이>전은 ‘로보틱 아트’를 중심으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가능성을 고찰한다. <로봇 에세이>전에서 패트릭 트레셋, 노재운, 비르길 비트리히, 미디어아트 그룹 신승백과 김용훈, 피터 윌리엄 홀든 등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8점이 공개됐다. 


비르길 비트리히, MAKE/REAL, 2010, 가운데.

이미지출처 : http://www.mmca.go.kr/


 전시관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비르길 비트리히의 [MAKE/REAL](2010)이 영사되는 스크린이다. 비트리히의 이 작품은 프랑켄슈타인부터 터미네이터의 T-1000에 이르기까지 SF영화에서 드러난 로봇들의 푸티지(footage)를 수집했다. 이 영상에서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장면은 자동인형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들이다.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카렐 차펙의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에서 최초의 로봇은 인간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최초의 로봇이 그랬듯 기계의 반란은 원형적이고 심지어 새롭지 못할 수도 있는 소재이다. 로봇을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신을 넘어서려는 시도이고 가혹한 대가를 요구한다. 범신론적인 로봇이라는 소재는 많은 작가를 매혹했다. [MAKE/REAL]은 대중매체가 노출하는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에 대한 인간들의 공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흥미롭게도 [MAKE/REAL]의 정형화된 대중문화 속 로봇과 인간의 모습이 EXP LAB이라는 마지막 전시에 이르기까지 <로봇 에세이>전을 주제의식을 관통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익숙함과 낡음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신승백과 김용훈, 캡차 트윗, 2013

이미지출처 : http://www.mmca.go.kr/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신승백과 김용훈의 [캡차 트윗](2013)은 자동가입 방지문자를 의미하는 ‘캡차(CAPTCHA)’에 발상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캡차는 이미지 속의 글씨를 읽는 것인데,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봇(bot)과 같은 프로그램을 막기 위한 것이다. [캡차 트윗]은 컴퓨터는 캡차의 내용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트위터를 통해 컴퓨터 몰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중문화에 흔히 노출된 적대자로서의 로봇에 대한 인간들의 대항의 한 방식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캡차 기술 중의 하나인 리캡차(reCAPTCHA)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것은 전지구적 독점기업인 구글이다. 사용자들이 해독한 캡차는 구글 북스(Google Books)의 고문서와 스트리트 뷰(Streete View) 그리고 구글 포토(Google Photo)의 고양이나 풍경 사진을 자동 분류에 이용된다. 구글이 자신의 콘텐츠를 늘려 나거나 개인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캡차가 기계문명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피터 윌리엄 홀든의 [아라베스크](2007)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음악에 맞춰서 인간의 육체를 딴 플라스틱의 팔과 다리가 군무를 춘다. 공기 압축기는 투명한 플라스틱 호스를 타고 마네킹의 팔다리와 연결되어 있고, 꽃과 같이 배열된 팔다리는 공기소리를 내면서 기이하게 움직인다. 또한, 패트릭 트레셋의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은 구식의 화상 캠을 통해 의자에 앉은 관객에게 인공적인 초상화를 그려준다. 관객들은 기계들의 낯선 군무와 비인간적인 초상화를 통해 기계의 끝없는 확장성과 인간을 닮은 무언가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다만 로봇 에세이전의 전체적인 작품들이 비트리히의 [MAKE/REAL]같은 대중문화 속의 낯선 존재로서 로봇의 이미지를 재확인하는 것에 그친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마지막 전시인 EXP LAB은 로봇에 대한 역사와 영화 클립을 모아놓았다. 이 전시는 <로봇 에세이>전에서 하나의 사족이자 ‘로보틱 아트’가 아직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nd Essay: 로봇의 예술 , SF 상상력 보다 흥미로운 것 몇 가지


임태환 (앨리스온 에디터)


<로봇에세이>는 대중문화가 양산한 SF 상상력을 빌려, 로봇과 인간의 대립/공존의 불안함을 전시했다. 이 전시는 그 동안 쌓아온 SF 대중문화의 영향 덕분에 꽤 그럴싸해 보이며 그러한 통로는 이질감이 없이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듯하다. 그러나 전시를 관람한 후 든 인상은 SF 상상력에서 보여진 로봇문명의 공포가 아니었다. 생뚱 맞게도 작품이 ‘움직인다’라는 지점이었다. 


이 전시의 쾌감은 작품의 구동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로봇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 로봇문명의 공포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그런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아젠다가 아니다. 작품을 관람하면서도 디스토피아적 공포보다는 인간이 아닌 기계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피터 윌리엄 홀든, 아라베스크, 2007


특히 피터 윌리엄 홀든의 <아라베스크>에서 팔/다리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에 맞춰서 접히고 펴고를 반복한다. 마치, 수중발레를 하는 것과 같은 이 움직임은, 공기 압력장치를 동력으로 삼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삐그덕 거린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서 삐그덕 거리는 움직임은 인간의 곡선미와 리듬감과 다르게 경박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매끈한 인간의 움직임과는 다른, 기계의 삐그덕 거리는 움직임이 왈츠에 맞춰서 춤을 추는 것은 그 자체로 생경했기 때문이다. 


패트릭 트레셋,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 2012


패트릭 트레셋의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은 그림을 그리는 로봇이다. 관람객이 의자에 앉으면 디지털에 카메라에 포착된 정보값에 따라서 관람객의 얼굴을 드로잉한다. 드로잉은 인간의 기법을 답습하지만 인간의 손이 아닌, 로봇의 움직임에 따라서 초상화가 완성된다는 점은 다르다. 로봇은 인간의 손이 움직이는 궤적과 다르게, 입력된 정보값에 맞춰서 움직인다. 그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실제 얼굴과 매우 일치한다. 흥미로운 점은 로봇의 객관적 인식이,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과 근본적인 인지속성은 다르지만 그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은 유사하다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해석’이 개입된다는 것. 로봇 또한 정보값을 해석하는 과정에 따라서 같은 피사체라도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 로봇은 인간의 재현 영역에서만큼은 유사한 속성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이 전시는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재현의 능력을 통해서 또 다른 예술을 선보이는 장으로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로보틱 아트가 로봇 그 자체로 예술이 아닌, 로봇이 하는 예술로서 이 전시는 꽤 볼만한 지점이 있었다. 아직까지 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김상진의 <화성영가>다. 인간의 성대를 재현한 오토매틱 기계가 부르는 ‘Lord, I want to be a Christian’. 어디까지 로봇이 인간의 예술영역을 재현할 수 있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이 전시는 공포 보다, 로봇이 인간을 얼만큼 유사하게 재현하는 가에 방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관객이 바라보는 관점은 그러한 로봇과 인간 사이의 이질성에서 오는 흥미로움이다. 인간과 로봇 사이의 유사성이 인간을 공포감에 몰아 넣는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로봇이 인간에게 왜 공포스러운가? 적어도 이 전시는 질문에 대한 비슷한 해답을 내놓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로봇에 대한 인간의 공포감을 흔한 SF 상상력에 기대어 관객을 설득한다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3rd Essay: 희망과 공포 사이, 제 3의 시각


허대찬 (앨리스온 에디터)


체코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robota’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로봇(Robot)은 그 어원대로 인간을 대신하여 단순하고 지루하며 위험한 일을 대신 수행하도록 인간들이 상상한 존재였다. 이 상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 그 자신을 닮거나, 인간처럼 생각하고 갈등하며, 인간과 융합하기도 하고, 인간을 뛰어넘은 지능과 능력을 지니기도 하는 사이보그(Cyborg), 안드로이드(Android), 휴머노이드(Humanoid),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실제로 구체화, 현실화되고있다. 


이제 로봇은 우리의 옷가지에서 스마트폰에 이르는 각종 도구들처럼 우리의 바로 곁에서 우리를 돕거나 감각을 확장시키는 존재 그 이상이다. 인간과 로봇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에까지 도달했다. 단순노동을 대신하는것을 넘어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의료분야, 항공기와 자동차 등의 교통수단의 조종, 시장분석 등의 암묵지(tacit knowlegde)의 영역으로 이해되던 분야까지 로봇이 그 역할과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여전히 창의력이나 최종결정과 판단의 영역, 감성과 감정의 영역은 인간의 몫이지만 최근에는 이 감성과 감정의 영역까지도 활동 범위에 포함하는 로봇들도 등장했다. 이렇듯 전방위적인 측면으로 인간과 가까워지고있는 로봇에 대한 이해와 예측은 극단적이다. 희망과 공포. 삶을 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며 인간을 삶 안에서의 의무에서 해방시킬 존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체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이해된다. 우리는 로봇에 의한 혜택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정말 혜택인가 라는 의심을 동시에 던진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로봇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에 대한 한 모습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볼 수 있다. 전시 <로봇 에세이 Robot Essay>는 로봇에 근간한, 로봇이라는 존재에 대한 8개 작가 및 그룹들의 8개 작품을 통해 예술가들의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김상진, 화성영가, 2015


피터 윌리엄 홀든(Peter William Holden)의 <아라베스크 Arabesque>와 김상진의 <화성영가 Mars Spiritual>, 패트릭 트레셋(Petrick Tresset)의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 5 Robot Named Paul>은 ‘창작과 표현’이라는 예술가의 행위를 로봇에게 투사했다. <아라베스크>는 분절된 팔과 다리들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무대에서의 군무를 행한다. <화성영가>에서는 텍스트를 음성화해주는 TTS(Text to Speech)프로그램의 일종인 보컬로이드(Vocaloid)가 스피커를 통해 미국 흑인들이 노예시절에 공유했으며 지금은 찬송가가 된 ‘Lord I want to be a Christian’을 합창한다.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은 하나의 인물을 앞에 두고 다섯 대의 로봇이 각기 다른 시지각 알고리즘을 가지고 인물을 관찰하여 각자의 로봇팔을 통해 종이에 이를 스케치하는데, 각 로봇은 5개의 각기 다른 개성을 드러낸다. 위에 제시된 각 작품들은 정해진 규칙 또는 알고리즘에 의한 반복행위이다. 하지만 이들은 공간 안에서 무용가이고 중창단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이들의 반복은 로봇의 노동과는 다른 존재감을 자아내며 기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노재운, 임포스터, 2015


로봇과 기술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드러낸 작품들이 전시 공간의 곳곳에서 동작하고 있었다. 노재운은 필립 K. 딕(Philip Kindred Dick)의 SF소설 <임포스터 Imposter>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온 동명의 작품을 선보였다. 소설 <임포스터 Imposter>에서 알파 센타우리와 지구는 우주전쟁을 진행중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알파 센타우리측의 스파이 로봇으로 의심받게 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스스로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나 결국 자신이 로봇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스파이로서 프로그래밍된대로 자폭하여 태양계를 날려버린다. 노재운은 이 순간을 회화로 표현했다. 그는 이 종말의 순간을 인간과 로봇에 대한 차이의 깨달음으로서 불교적 각성, 즉 해탈로 해석한다. 

레베카 혼(Rebecca Horn)의 <공기 La Turnura>는 로봇이라기보다는 기계의 모습이다. 특별한 행위를 지시하는 소프트웨어는 없지만 스스로의 기계구조를 통해 반복적인 움직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단순한 차가운 움직임이 아닌 서로를 마주보는 우아하게 장식된  홍학 깃털들의 율동은 마치 스스로가 감정을 드러내는 듯 생명성을 가시화한다. 한편 홍학 깃털이라는 자연물과 금속뼈대라는 인공물의 조합은 사이보그(Cyborg)를 연상케 한다. 

신승백과 김용훈의 <캡차 트윗 CAPCHA Tweet>의 골자인 캡차(CAPCHA)는 인터넷 상에서 ‘bot’의 일종인 자동가입프로그램들이 광고 등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웹사이트에 가입하는 것을 막기위해 개발된 필터이다. 캡차에서 가입하는 자가 인간임을 확인하기 위해 묻는 텍스트는 랜덤하게 각도가 틀어지거나 모양이 비틀어져 컴퓨터나 프로그램이 읽을 수 없다. 이렇듯 컴퓨터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인 캡차를 그들은 재미있는 방식으로 해석해냈다. 두 작가는 트위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을 캡차를 이용해 변환시켜 컴퓨터상에서 진행되는 사람들의 소통을 컴퓨터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비르길 비트리히(Virgil Widrich)의 <Make / Real>는 로봇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의 EXP(Experince) Lab의 <미래부터 미래주의까지>는 로봇에의 낙관적 희망을 드러낸다. <Make / Real>은 손이 닿지 않는, 전시 공간 전체를 내려다보는 높이에서 상영되는 영상이다. 기술을 통해 완전한 창조를 욕망하는 인간의 꿈은 그 결과물인 로봇을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다. 지극히 발전한 로봇은 인간의 존재를 위협한다. 비트리히는 지난 100년간의 인형과 로봇에 관계된 SF 영화사의 핵심 장면들 - 프랑켄슈타인, 2010 스페이스 오딧세이, 스타워즈, AI, 터미네이터, I Robot 등 - 을 수집하여 연대기화했다. 그는 기대와 욕망, 공포와 절망을 인간과 로봇 사이에서 보여주었다. 


EXP LAB, 미래부터 미래주의까지, 2015


<미래부터 미래주의까지>는 예술과 문화, 기술간의 접점과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각적 인터페이스를 제시한다. 앞서 작품에서 드러난 다양한 관점은 이곳의 시각적 지도에서 정리된다. 로봇을 중심으로 역사의 연대기를 거꾸로 추적하며, 예술-문화-기술의 각 시점에서의 역사적 사건과 분기점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종착지는 기술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미래주의 선언이다. 선형적 연대기의 동선은 벽에 그려진 타임라인으로 추적 가능하며 각 역사적 순간들은 책의 형태로 인덱싱되어 그 표면에 프린트된 바코드, 그리고 바코드 리더기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영상으로 감상이 가능하다.


이번 전시는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작가들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이며,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희망어린 분석과 공포와 우려섞인 전망이 아닌,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의 시각과 해석이다. 이제 로봇은 우리의 삶이 직접적으로 파고들어와 있으며 개인으로부터 사회 전체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봇의 존재는 사회적 가치와 시장 가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그 가치판단에 의한 거대논리에 강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한편 예술가들에게 로봇은 생각을 진행할 수 있는 하나의 주제이자 시각을 투영하여 전달할 매개자이다.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이 대비된 상황에서 로봇이라는 기술적 대상에 대해 또다른 관점을 보고, 투영할 수 있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도, 그리고 이 글을 정리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 여전히 막연하다고 느낀 것은 전시의 제목 탓일지도 모른다. ‘에세이’. 에세이는 글쓰기의 형태이지, 특정해서 전달하는 ‘주제’나 ‘내용’은 아니다. <로봇 에세이>라는 제목 아래 8개의 작품은 평등하게 펼쳐졌다. 이번 전시는 전시를 보기 전에 상상했었던 인간과 로봇의 차이, 인간을 규정하고 로봇을 규정하는 관점이나 요즈음의 사회적 이슈인 노동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특정 주제에 대한 일관된 주장이나 분석이기보다는 말 그대로 로봇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묶인 수필집과 같았다. 전시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재촉한다. 읽어냄은 관람자의 몫이라고.



본 전시에 대한 세명의 에디터들의 공통된 의견은 전시를 통해 드러낸 ‘로봇’에 대한 인식과 사유가 새롭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2015년. 21세기. 스마트폰은 피부처럼 늘 우리와 함께 다니며 웨어러블 컴퓨터의 개념을 시작할 스마트워치가 열심히 팔리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우리는 늘 온라인 접속되어 있다. 비행기는 사실상 오토파일럿이 비행 전체를 관할하며 구글과 아우디의 무인자동차 시연에서 볼 수 있듯 자동차의 운전 역시 인간의 손을 떠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날아다니는 로봇 -드론-이 우리 머리위를 날아다니며 드론의 시야가 방송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우리들이다. 그런데 전시에서 나타나는 로봇에 대한 인식과 상상은 20세기 대중문화의 그것과 특별히 다른 지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로봇에 대한 사유가 도돌이표에 의해 반복되는듯 보이는 이 부분은 당대의 작가들이 지닌 인식의 공통점인 것인지, 기획차원에서의 통일성인지, 리서치의 한계인지가 모호했다.


요 근래 몇십년간의 기술의 발달은 무언가 충격적인 변화나 사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랑비에 젖어들어가듯, 이제 너무나 익숙한 기술기기들의 존재는 이것이 없었던 불과 십수년전의 삶을 기억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명확하게 변해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이고 환경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로봇이다. 로봇에 대한 작품의 하나 하나는 분명 바라보기 즐겁고 시사하는 바는 강하다. 하지만 이들이 모여서 합주하는 노래는 평이했다.  



글. 이종완, 임태환, 허대찬 [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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