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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조중걸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5. 2. 07:47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조중걸, 서울:프로네시스, 2007

체코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부정하고 싶은 대상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가지는 것, 이러한 미학적 이상이 ‘키치(Kitsch)’라고 말한다. 즉, ‘부정’을 통해 존재를 외면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키치의 의미라고 정의 내린다. 꽤나 단순하고 편리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일지도 모르는 이 ‘부정’에 숨어서 우리는 어떠한 것을 손쉽게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어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모르는 척’ 넘겨버리곤 한다. 그건 사람에 대한 감정이던지, 일로 인한 스트레스라던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어떠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신경 쓰지 않기 위해, 기분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고 넘겨 버린다. 결국 자신에 대한 자기애적 본능은 원치 않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기제들에 대한 방어의 한 방편으로 ‘외면’을 선택하게 만든다.


예술에서의 ‘키치’는 이런 외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진정한 예술이 존재한다는 입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술사학자 적 견지에서 키치를 정의한다. 키치는 고급예술을 가장한 통속예술로서, 그 안에는 통속적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서 솔직하게 전달하는 통속예술의 특성도, ‘미’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진정한 예술의 순수함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이란 “긴장 해소의 계기에 새롭고도 더욱 고달픈 긴장을 내걸고, 소비의 자리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다 놓는다는 패러독스”를 지닌, 다시금 긴장을 유발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예술조차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일반 대중들이란 예술을 통해 잠시 쉬어가길 바랄 뿐, 긴장을 주는 예술을 바라지 않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저자는 키치를 순수예술에 기생하는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예술로, 고급예술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존재로 언급한다. 산업혁명 이후 모든 것이 소비의 원리로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 예술조차 소비되기 위해 얕은 수를 써야하고, 이것이 바로 “키치의 달콤함과 끈적거림”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키치에서의 ‘반성적 거리’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본래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행위로서, 순수예술에서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거리’와 비교된다. 예술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게 도취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키치를 ‘사이비예술’이라고 정의하고, 키치가 인간을 가식적인 행위와 기만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왜 키치가 필연적으로 등장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결국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에 기인한다는 답변을 이끌어낸다. 자연으로부터는 소외되었으나 신과 이성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인간은, 신이 죽고 이성이 신념을 잃은 순간 삶의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삶의 의의가 사라진 인간에게는 절망만이 남아 이러한 절망의 토양에서 키치를 불러냈다고 정리한다.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그 순간에 키치는 자기 자신의 얄팍함을 의지하여 삶의 의미를 삼으라고 유혹하고 나약한 인간은 그 끈을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키치는 예술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와 공존하는 어두운 반대 면으로 존재한다. 설령 진정한 의미가 아닐지라도 이러한 키치가 없다면 인류는 허위의식조차 끌어안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키치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키치의 역할이 우리를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고 말한다. 키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절망과 온전히 맞닥뜨릴 것인가, 아니면 키치 가운데서 가려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키치의 달콤함을 맛볼 것인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저자는 키치를 극복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근대 이후의 예술이 키치를 넘어서기 위해 어떠한 노력들을 계속해왔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다다이즘이나 인상주의, 표현주의, 기능주의에서의 키치를 넘어서는 예술적 발현들을 이야기하며 키치 해체를 말하기 위한 준비단계를 거친다. 저자가 말하고 부분은 결국 제 3장 <키치 해체하기>에서 나타난다. 소격효과, 메타픽션, 네오리얼리즘 등의 속성을 파악하면서 키치는 어떻게 해체되고 파괴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현대예술, 철학으로 돌아보기>에서는 형식만이 남은 예술로서의 현대예술이 아닌, 미학적 요소가 존재하는 예술의 발현을 주장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상기되는 것은 “왜 키치는 부정적인 면으로만 읽혀지는가?”라는 의문이었다. 물론 저자가 키치의 일면을 긍정하고 그로 인한 순기능을 말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단지 진정한 예술에 대조되는 키치의 모습만을 설명해줄 뿐, 단순히 부정적이라고만 할 수 없는 키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기에는 부족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중심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 어떤 사물에서도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본다. 결국, 인생의 모든 것은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재인식에 기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부정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더 이상 절대적인 것에 기댈 수 없고 상대적인 논리에 의해 삶의 의미를 찾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키치는 오히려 더 많은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0과 1의 디지털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현실을 외면하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미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신기루처럼 보였던 디지털의 세상은 이미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Virtual Reality는 인간이 이룰 수 없기에 외면하고 싶은 그 모든 것을 구현해주는 세계가 아닌가, ‘외면’으로 시작하는 키치의 속성 속에서 가상적 현실은 도래한다. 순수예술이라는 오른편에서의 발현만이 인정받는 시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키치라는 왼쪽 면으로 무한대로 나아가고 있는 현재, 가상과 현실이 혼재하는 이 시점에서 키치적 달콤함은 더 이상 가리워진 거짓이 아닌 또 다른 모습의 진정한 의미의 생성이라고 우리의 시선을 조금 수정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본다.



글.이은아.앨리스온 에디터 (l.eunah@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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