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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갤러리 1층에 설치된 로스 매닝의 몇 가지 작업을 보고서 내려간 지하, 어둠이 짙게 착색된 곳인 만큼 모든 감각을 또렷하게 벼려낸다. 여기서 감각의 주인은 소리다. 킷 웹스터의 <위상이동Phaseshipt>의 효과다. 똑딱 하는 시계소리가 귀가를 단순하되 단단하게 맴돌며, 소리의 ‘현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잠시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정면을 응시하면, 추상적인 괘종시계 형태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시각의 집요한 욕망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관철되며, 소리의 현전은 어느새 시각에 포박된다. 다채롭게 변주되는 삼각형 기둥에 진자추가 오고가는 형상은 똑딱 하는 소리의 운동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보거나 마치 보는 것 같고, 따라서 소리가 영상으로 번역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Kit WEBSTER, Phaseshift, 전자석, 진자, 비디오 프로젝션, 가변크기, 2016


2. <위상이동>은 그렇게 시각과 청각을 혼합하여, 일종의 초감각적 환경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한 순간 청각적 몰입하는 경험은 우연한 사건이며, 웹스터가 기획한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서 잠시 시각의 욕망을 억눌러 보면 어떨까. 일부러 오독해 보는 것이다. 소리에 경청해 보는 것, 무엇인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자체를 듣고서 ‘성찰’의 계기를 찾아보자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현대만큼 감각기관을 쉴 틈 없이 몰아붙였던 시대는 없었다. 특히 디지털문화는 각종 감각을 복제해서 양을 늘리고 편집해서 질을 높이는 등, 해가 갈수록 그것의 강도를 올린다. “양은 질로 전환됐다.”(벤야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쩐지 감각의 다양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주체는 쏟아지는 각종 감각의 폭탄들 때문에 허우적거리며 사소한 정보를 찾을 때조차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능동적인 주체커녕 수동적으로 대상으로 하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센서에 따라 반응하는 ‘피험자’일 따름이다.


Kit WEBSTER, Phaseshift, 프로젝션에 따른 이미지 변화의 모습



3. 감각과 정보의 과잉은 (간접적이긴 해도) 매체작업 일반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대체로 매체작업은 읽기가 좋고, 이론으로 분해하기 쉽다. 최신 기술은 언제나 설명을 요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때로는 과학자로서 때로는 기술자로서 개입하며, 심지어 이론가나 평론가를 겸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물론, 현대미술 일반이 개념과 이론의 성향이 짙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둘 간의 차이는 없는 것은 아니다. 매체예술이 개념과 이론을 내재한 형태를 띤다면, 현대미술은 외부에서 도입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란 얘기다. 게다가, 매체예술은 지나칠 정도로 이론과 담론에 친화적이다. <컬러 쉬프트>의 서문만 읽어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디지털기술을 바탕으로 공간적 실험을 하는 킷 웹스터는, 독창적인 하이브리드조각과 강렬한 시청각적 시퀀스를 통해 몰입적 환경을 만드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웹스터의 조각적이고도 공간적인 퍼포먼스는 3D 프로젝션 매핑프로그램을 통해 발생한다.” 기본적인 미술용어뿐만 아니라 각종 과학・기술 용어들이 ‘우후죽순’ 동거한다. 너무 자세한 정보는 길을 잃게 만들며, <컬러 쉬프트>의 서문이 정확히 그러한 경우다. (“그는 <위상이동>(2016)에서 지각과 의식의 개념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물리적/디지털 환경 사이에서 나타나는 평행적 차원을 탐구한다.” 이쯤 되면 심리학의 주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Kit WEBSTER, Phaseshift, 전자석, 진자, 비디오 프로젝션, 가변크기, 2016



4. 감각과 정보와 개념의 과잉. 작업도 그렇고 그것을 설명한 서문도 그렇다. 한편으로 봤을 때, 이것은 각종 정보로 과잉 부풀어 오른 현실과 닮아 있다. 소리든 그림이든 각종 감각을 모조리 매체로 (여러 차례) 매개된 결과일 것이다. 너무 많고 너무 길고 너무 짙다. 이 과정에서 작품 자체가 소멸하고, 덤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까지 희미해진다. 주체가 혼자서 매체가 체계적으로 차단한 현실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각과 성찰’의 범주로 사유하고, 무분별한 다량의 감각들 때문에 성찰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설명한다면 근대의 미망에 여전히 사로잡힌 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이제는 정보의 바다에 그저 ‘잠입dive'해 있는 게 편안해 보일 정도다. 각종 대중문화에서 정보가 양수를 대체한 제 2의 자연으로 현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5. 문제는 현재가 상실조차 상실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물론, 옛것이라고 당연히 추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잃어버렸다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기억은 해야 할 텐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은 것이다. 마치 시내 중심가의 가게들이 석 달에 한 번씩 바뀌는 바람에 자주 가더라도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상실하는 것과 똑같다. 빈 칸의 존재만 겨우 의식될 뿐이다. 여기서 기억들은 끊임없이 복사되고 변환되어 주소들 사이에서 이동하는 컴퓨터 기억장치의 자료들처럼 장소를 상실한다. 앞서 우연히 경험한 ‘사건’을 되씹어 보자. 성찰의 경험이 없었다면, <위상변화>를 ‘오독’하며 성찰할 수 있었을까. 대체로 지각의 사건은 우연히 발생하기 마련이다. <위상이동>에서 관객이 시각에 포박되기 전, 소리가 문득 ‘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포착하는 기회조차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힘들게 포착한다고 하더라도 집중해 성찰하는 것 역시 난망해 보인다.


Ross MANNING, Point cloud opera, TV, 비디오카메라, 조명, 전구, 램프, 가변크기, 2106


6. “산만한 수용은 모든 예술영역에서 날로 강력하게 감지되며 통각에 나타난 심원한 변화의 징후[다].” 일찍이 벤야민은 낭만주의적 ‘관조적 성찰’을 비판하고 다다의 ‘분산적 지각’을 옹호하며,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예술을 몽상했다. 오늘날 분산적 지각은 주체를 확실하게 침투했으며, 예술 영역 곳곳에서 역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형태로 등장한 신인류는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이 지점이 흥미로운 것은 로스 매닝의 작업들이 응답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 이 작업들은 소통방식의 끝없는 수정과 적응을 거치며 아이덴티티를 재현해내는 방식으로 기술과 연어의 개념을 가로지른다. 리얼리티 텔레비전 쇼와 소셜 미디어, 가상게임 등은 자아에 매료되는 것을 넘어 우리 존재의 면면에 깊이 배어들었다.” 다소 장황한 설명을 간추리면, 첫째 소통은 기술과 언어를 통해서 정체성을 제작하며, 둘째 현대의 각종 매체들은 존재들을 구성한다는 것. 하지만 실제 작업의 면면은 (앞서 정보와 개념의 과잉을 비판했던 것처럼) 매우 소박하다. 텔레비전, 형광등, 비디오 등 여러 가지 기성품을 재조립하여, 현대의 혼융된 매체・기술・정체성 관계를 ‘개인적으로’ 진단하는 설치다. 소통-기술-체계의 공격에 작가-개인의 반응이므로, 매우 간단한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다.

7. 그래서 그런지 <컬러 쉬프트>의 작업들은 기묘하다. 제법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하는 말은 미래지만 하는 짓은 과거로 보이고, 기술적 미래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만 답변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평소에는 과학자요 기술자요 프로그래머에 이론가까지 자처하지만, 정작 중요할 때는 (과거의) ‘작가’를 소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전한 도피처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글. 김상우 (앨리스온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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