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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상반기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양대  공기관에서 모두 ‘사진’을 화두로 대규모의 기획전을 개최하였다. 마치 2016년이 ‘사진의 해’인 듯 전시의 주요 흐름이 ‘사진’으로 전개된 것이다.


사진 기획전의 포문을 연 것은 서울시립미술관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한불수교 130주년과 롤랑 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보이지 않는 가족>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직접 ‘기획’한 전시가 아니라,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와 아키텐지역 현대미술기금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를 수입한 것이다. 이 전시와 더불어 일우스페이스에서는 롤랑 바르트의 관점으로 기획한 <인간 가족>을 선보였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다는 <보이지 않는 가족>에서는 바르트의 영향이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시 부대 행사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는 그런 부분을 지적하자 프랑스에서 온 전시 기획자가 롤랑 바르트의 사진 개념을 ‘넓게’ 해석하자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기도 하였다. 차라리 롤랑 바르트를 운운하지 않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열악한 사진 컬렉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높은 수준의 사진 컬렉션에 감탄하면서 전시장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보이지 않는 가족> 전시가 던져 준 아쉬움이 가시기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이 시작되었다. 잔뜩 기대감에 부풀게 만드는 정말 멋진 전시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해방 이후한국 사진계를 주도하였던 ‘리얼리즘’ 다큐멘터리 사진의 영향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의 한 매체로서 사진 작업이 시작되었던 역사적 흐름을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조망해 보겠다는 야심찬 기획이지 않은가. 그러나 제대로 된 사진 전문 큐레이터가 한 명도 없다는 국립현대미술관답게, 큰 기대에 버금가는 큰 실망을 던져주고 말았다. 야심찬 의도와는 달리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라기보다는 마치 박물관의 ‘잘못 기획된’ 유물전과 같은 만시지탄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가족>이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수입한 전시로, 롤랑 바르트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사진 수집품전시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기획력이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수준이라는 점은 몹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이런 결과물이 나오게 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아주 공적인’ 부분인 구조적인 한계와 ‘아주 사적인’ 부분인 전시 기획자의 능력이 ‘잘못된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의 문제점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올해 초부터 사진계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사진전이 기획 중이라는 이야기가 섭외된  작가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전시 제목이나 기획 의도 등이 알려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섭외된 작가들의 면면을 통해서 어떤 전시가 이루어질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70대의 원로 작가들부터 왕성히 활동 중인 40대 작가들이 망라된 작가들의 섭외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작심하고 전시를 준비하는구나, 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오로지 양적 규모만 클 뿐인 조악한 전시 기획에 대한 비판이 작가, 비평가, 언론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중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난타당한 전시가 예전에도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대한민국 현대 미술의 심장, 국립현대미술관의 야심찬 대규모 기획전이 대실패한 것이다.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은 4개의 메인 전시와 1개의 부대 전시로 구성되었다.


  CHAPTER 1 실험의 시작

  CHAPTER 2 개념적 미술과 개념사진

  CHAPTER 3 현대미술과 퍼포먼스, 그리고 사진

  CHAPTER 4 이미지 너머의 풍경 : 상징 반미학 비평적 지평

  그리고 부대 전시인 ‘패션사진’


 각 전시 챕터의 제목은 그럴 듯하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비연출을 고집하였던 리얼리즘 사진에서 각종 연출과 조작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실험 사진들의 등장을 추적한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개념 미술 운동에서 이행되었던 사진 매체의 활용을 짚어본 후, 세 번째 챕터에서는 현대미술에서 퍼포먼스와 사진의 유기적 결합에 대해 살펴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장의 사진 이미지를 넘어서 현대 미술의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은 사진 이미지를 여러 가지 미술 개념으로 정리해 보겠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 미술사를 다른 서적에서 ‘현대미술과 사진’라는 제목으로 있음직한 챕터를 옮겨 온 것처럼 고전적인 제목으로서 훌륭하지는 않지만 딱히 흠을 잡을 수는 없는 구성이다. 다만 부대 전시인 ‘패션사진은’ 매우 사족으로 보이는데, 예술 사진 이외의 사진도 소개함으로써 전시 관객 수를 늘려 보겠다는, ‘관람객’ 수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미술관의 입장이  묻어있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럴 듯해 보였던 각 전시 챕터의 제목들은 각 챕터에서 소개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선정된 작가들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야 만다.



주명덕, 잃어버린 풍경 #6, Gelatin Silver Print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하는 김대수와 구본창의 작업을 통해 1989년 이후 득세하기 시작한 유학파 사진가들의 실험 사진을 통해 만족되는가 싶던 첫 번째 챕터의 목적은 주명덕과 민병헌의 작업과 마주하며 산산이 부서진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뿐만 아니다.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이 등장하더니, 이갑철의 사진도 등장한다. 도대체 무슨 실험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가? 사진적 실험인가? 미술적 실험인가? 그냥 임응식의 생활주의 사진만 아니면 다 포함되는 실험인가? 굳이 1989년을 기점으로 하였으면서, 그 이전부터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은 왜 다루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1989년 이후 활동한 작가들 중에서 여전히 영향력 있는 유명 원로 작가들을 배려한 챕터인가? 이토록 불경한 의심은 한미사진미술관 관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통해 확신으로 변하게 된다. 


 첫 번째 챕터의 당혹스러움을 뒤로 하고,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포럼A>를 잔뜩 벽에 붙여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찬경’ 개인의 이름으로 전시된 것인데, 이것은 어떤 맥락에서 전시된 것일까? 두 번째 챕터의 제목이 ‘개념적 미술과 개념적 사진’이다 보니, 당시 한국 개념 미술의 선봉이었던 <포럼 A>를 통해 챕터 제목의 정당성을 빌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너무 얕은 접근으로 보인다. 사진과<포럼A>의 연관성은 회화와 <포럼A>의 연관성만큼 너무나도 일반적인 관련성이 아닐까? 거기에다 하나의 매체를 ‘박찬경’ 개인의 이름으로 전시하다니?(오프닝 이후 , 박찬경이 항의했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고, 결국 ‘박찬경’의 이름은‘포럼 A’로 교체되었다.)


강용석, 동두천 기념사진, Gelatin Silver Print


 두 번째 챕터는 첫 번째 챕터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 다큐멘터리 작가인 강용석의 <동두천 시리즈>가 이 챕터에서 소개되고 있다. 강용석의 <동두천 시리즈>가 당시 한국 사진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맞지만, 개념 미술과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이런 식이면 모든 사진 작업이 개념 미술일 것이다. 그래서 박영숙이나 김옥선의 작업도 이 챕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인가 보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21세기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표 작가인 노순택의 수많은 작업 중에서 굳이 <내장 시리즈>를 가져와서 개념 미술 섹션에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 미술에서 현재 노순택의 작가적 위치를 의미 있게 만든 것이 과연 <내장 시리즈>였는지 묻고 싶다. 노순택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고 있는 <올해의 작가상>에서 2014년도에 최후의 1인으로 선정된  작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의 전시 기획자는 노순택의 작업 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두 번째 챕터에서 챕터의 목적을 온전히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은 성능경뿐이다. 1970년대부터 퍼포먼스와 개념 미술을 펼쳐온 일흔 다섯 노장 작가의 대표작인 <S씨의 반평생>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였던 전위 작가들이나 민중미술 작가들 중, 유일하게 작가의 작업 스타일대로 전시된 것이다. 박불똥, 이승택, 성완경 등의 작업은 작은 방을 만들어서 다 때려넣거나 벽면에 성의 없게 붙여놓아서 후학으로서 민망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디스플레이의 조악함을 떠나 첫 번째 챕터와의 연관성을 놓고 보자면, 유학파 사진작가들의 작업보다 이들의 작업이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다는 문제점도 있다. 1989년이라는 시기적 타이틀 때문에 1989년 이후의 작품들을 걸어놓았으나 이들의 사진 작업이 시작된 것은 훨씬 이전이기 때문에 이것은 끼워맞추기식 구성에 불과하다.


 세 번째 챕터의 제목은 현대미술과 퍼포먼스, 그리고 사진이다. 현대미술에서 퍼포먼스가 도입된 것은 반백년 전이고 이 영향이 사진에서 부각(‘시작’이 아니다)된 것이 1980년대 이후의 연출 사진들이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작가 구성을 기대해 보았다. 김아타, 김인숙, 니키 리, 천경우, 배찬효, 조습 등등 이번에는 잘 구성된 듯하다가 역시 삐끗하고 만다. 왜 이 챕터에 방병상이 있단 말인가.  방병상이 퍼포먼스 작가였단 말인가. 방병상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꽃무늬 옷을 입혀서 사진을 찍었단 말인가. 두 번째 챕터에 있었어야 할 오인환의 작업은 또 왜 여기 있는지……. 두 번째 챕터가 비좁아 보이기는 하던데, 자리가 모자라서 이 섹션으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챕터에는 원성원의 작업도 소개되고 있다. 원성원의 작업은 소위 ‘사진 조각’으로 분류되는 ‘콜라주’ 작업인데 왜 이 챕터에 자리 잡은 것일까? 현대미술이어서? 퍼포먼스여서? 사진이어서? 현대미술이고 사진이기는 한데, 그렇다면 이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 중에 현대미술이 아니거나 사진이 아닌 작품이 있던가? 그리고 이번 전시의 만병통치약으로 등극한 노순택이 여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촬영한 사진인데, 퍼포먼스 섹션에서 소개한다는 것은 ‘아리랑’ 공연을 노순택이 기획한 ‘퍼포먼스’로 이해한 것이라고 여겨도 되는 것인가? 북한의 ‘아리랑’ 퍼포먼스를 기획한 작가라니. 정부에서 빨갱이라고 붙잡아 갈만한 상황이다. 잠시 이 전시가‘국립’ 미술관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잊게 할 만한 전위적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작가들과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실상 두 번째 챕터와 세 번째 챕터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네 번째 챕터의 제목은 ‘이미지 너머의 풍경: 상징 반미학 비평적 지평’이다. 쉼표 하나 없는 이 제목을 보며, “그래, 상징이되 반미학적이어야 새로운 비평적 지평을 열 수 있겠지”라고 억지로 이해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왜냐하면 챕터의 제목과 이 챕터의 존재 이유는 무관한 것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냥 이 챕터에는 최근 십여 년간 가장 잘 나가는 사진작가 혹은 사진을 매체로 사용하는 작가들을 모아 놓았다. 한성필, 구성수, 고명근, 이명호, 백승우, 김상길, 정희승, 박형근 등등. 오형근이나 강홍구처럼 역시 이 섹션에도 잘못된 섹션에 배치된 듯한 작가도 있다.


 전시 전체를 살펴 본 결과,  전시가 이렇게 이루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체를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시 기획이 필요하였다. ‘대규모’이되 나름 참신한 새로운 기획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전시가 뭐가 있었는지 검토하다 보니, ‘사진전’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대규모’ 사진전이라는 ‘모양새’가 나오는 기획의 골자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최초의 대규모 사진전을 열기로 결정했으니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이금방 거론되었을 것이다. 혹시 몰라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기도 했을 터이고. 그러다 보니, 최초의 대규모 사진전에 빠지면 안 될 ‘중요 사진작가들’의 ‘리스트’가 나왔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점에 봉착하고 만다. 이 작가들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리스트’에 포함된‘중요 사진작가들’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 하나의 기획으로 묶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명덕에서부터 성능경, 노순택에서부터 니키 리까지 포함되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어떻게 아우를 것인가! 그 결과 마치 ‘현대미술과 사진’이라는 미술사 서적에서 나올 법만 네 가지의 클래식한 챕터들이 준비되었다. 비연출 사진에서 연출 사진으로의 변화를 통해 사진이 현대 미술에 수렴된다는 주제의 전시 기획이 완성된 것이다. 전시 기획의 초안은 그럴 듯해 보였지만, 문제는 앞에서 계속해서 지적한 내용대로, 수렴되지 않는 작가들을 억지로 집어넣음으로써 전체적으로 엉성한 기획물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은 미술관의 ‘기획 전시’가 아니라 박물관의 ‘유물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89년 이후 사진을 매체로 다룬 유명 작가들을 총집합시킨 유물전. 그런데 그 유물전이라는 것이 고려 시대 청자가 조선 시대의 백자 섹션에서 전시되고, 조선 시대 화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중국식 상상화로 소개되는 식의 유물전이다. 자체적으로 좋은 전시를 기획할 수 없다면, 능력 있는 기획자에게 외주라도 주어야 할 것이다. 민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정부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기획은 왜 ‘잘 하는 민간’에 외주를 안 주나 모르겠다. 이것은 너무 자조적인 푸념이고,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실패를 계기로 ‘사진 전문 큐레이터’를 확충해야만 한다. 달랑 한 명 뽑아놓고 온갖 일 다 시키다가 과로사하거나 사퇴할까봐 걱정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사진 작품 소장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번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아니라 작가의 개인 소장품이었다. 즉,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89년 이후 약 삼십년간 한국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혀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능경을 비롯한 1980년대 전위예술 작가들이나 민중미술 작가들 일부의 작품만이 미술관에 컬렉션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작품들이 컬렉션되어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가족>에서 소개된 사진 컬렉션의 수준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전시가 끝난 후, 과연 이 작품들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품으로 구입하였을까? 이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되지 않는다면, 1989년 이후의 ‘한국 현대미술과 사진’을 십 년 혹은 백 년 후에 다시 조망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은 분명 아쉬움이 가득한 전시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진을 주제로 처음 기획한 대규모 전시라는 점에서 분명히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이 전시의 결과물이 한국 미술계에서 얼마나 사진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광범위하게 쏟아진 비판들 때문에 새로운 사진전을 기획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이번 전시를 타산지석 삼아 다음 번에는 반드시 내실 있는 사진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되기를 기대해 본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글. 정현목 (홍익대 사진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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