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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톨로지교 종교 집회가 있다면 흡사 사운드 아트 공연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삐익- 삑 거리는 전자음, 출처불명 소음 덩어리는 외계인과의 교신음 같고 사운드 아티스트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감상자들은 집회에 모인 신도들과 비슷해 보인다. 사람들은 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이 소리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해석할까? 기회가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이거 왜 들으러 왔어요?”


사운드 아트, 예술감상의 두 가지 태도


예술 감상자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감정의 고양이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속 붓 터치와 조화로운 색감을 보는 감상자는 직관적으로 변화하는 심적 고양을 느낀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나 팝음악을 감상하면서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감성을 느끼는 데 굳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둘째는 의미 찾기다. 작품이 직관적으로 감상자의 심리를 고양시키는 요소는 약한 반면에 작품에 깃든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는 것이 주요하다. 마르셀 뒤샹의 <샘>의 변기를 보면서 대부분의 감상자들은 심리적 변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변기를 보면서 심리적 고양을 느낀다면 매일 아침 화장실 변기 앞에서 설레는 감정을 주체 못할 것 아닌가? 우리가 전시장에서 <샘>을 감상하는 이유는 공산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주장이 예술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 보다, 그 안에 있는 의미를 감상하는 것이며 때로 그것이 골치 아프게 한다. 그렇다면 사운드아트를 감상하는 관객의 감상 태도는 위 두 가지 중 무엇일까?


                                 <사운드 아트 감상, 심리적 고양인가? 의미찾기인가?>


청각은 시각과 달리 인간의 심리를 직접 고양한다. 가사도 없고 시각적 요소도 없는 단순 드럼 비트를 들으면서도 절로 발 박자를 맞추는 것이 우리다. 청각은 우리 몸을 저절로 움직여 줄만큼 감정적으로 예민하다. 사운드 아트는 바로 이러한 청각을 매개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운드 아트 연주에서 이러한 심적 고양을 경험하지 못한다. 멜로디와 박자는 불규칙적이고 듣기 좋은 음악적 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대개의 사운드 아트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운드 코드를 지양하기 때문이다. 사운드 아트 관객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의미 찾기라는 두 번째 태도로 사운드 아트를 감상하게 될 것이다. ‘뭐지 이건?’ 이라는 불편한 마음의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게임은 시작된다. 


‘뭐지 이건’ 이라는 물음은 마치 선생님이 설명하는 문제를 풀려는 학생처럼 관객을 만든다. 하지만 의미 찾기는 쉽지 않다. 애초에 의미 찾기가 힘든 이유는 관객과 아티스트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는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관객의 언어 체계와 호환이 불가하다. 관객은 아티스트의 언어를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이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무지한 스승의 가르침


19세기 초 프랑스의 조제프 자코토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친다. 문제는 자코토가 네덜란드어를 모르고 네덜란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코토는 기초 문법도 알려주지 않은 채, 프랑수아 드 페놀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 소설을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두 가지 번역본을 학생들에게 건네준다. 학생들은 두 개의 책을 비교하며 문법을 깨달았고 놀랍게도 학생들의 프랑스어는 작가수준에 이르게 된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생이 학생에게 지식전달자의 역할을 하기 보다,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지식 독려자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자코토는 학생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비교 대입하면서 지식을 확장하도록 했다. 앎의 프로세스를 구축하여 지식습득을 독려한 것이다. 하지만 아티스트와 관객 사이에는 스승이 학생에게 내리는 문제의 정답이 없다. 아티스트는 그저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고 이 작품의 의미는 이것이라고 강요도, 틀렸다고도 하지 않는다. 작품의 의미부여는 관객의 몫이다. 여기서 관객은 의미부여의 개연성과 논리적 그럴싸함을 놓고 고심한다. 예를 들어, 쨍그랑 그릇이 깨지는 사운드를 들었을 때, 관객은 그 소리를 ‘깨짐’이라는 1차원적 의미로 먼저 받아들인다. 관객이 골몰하는 것은 2차원적 의미다. 버림 받은 여자의 아픔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인생의 끝자락을 표현한 것인가? 그런데 이게 말이 되기는 한 건지 알 수 없다. 특히 사운드 아트는 관객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양이 매우 한정되어 있어서 의미부여의 논리적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전문 예술가나 비평가가 아니고서야 단지 일상을 살아가는 관객들이 끌어낼 수 있는 정보는 한정 되어 있다. 관객은 이 실타래를 풀고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


구경꾼이자 능동적 해석가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 중 하나는 학생의 지능을 교사에게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책과 묶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알던 것을 통해서 모르는 것의 의미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선생은 자신이 칠판에 적은 문법규칙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책들을 서로 비교하며 모르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학생이 잘 아는 네덜란드어를 통해서 모르는 프랑스어를 알아내는 것이다. 관객은 아티스트와 관계에서 모르는 아티스트의 언어를 통해서 앎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 때문에 힘들어진다. 따라서, 관객은 아티스트의 패러다임에 종속된 수동적 관객으로 전락하게 되는 바보가 된다. 해방은 관객 스스로 작품과 결합했을 때 만들어 지는 사건을 체험하면서 시작된다. 


불규칙적인 전자음 퍼포먼스를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소리 자체의 의미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의 감각이 반응하는 의미는 우리 속에 축적된다. 그 의미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감각은 이 사건을 기억한다. 공연장에서 나온 관객은 일상 속에서 이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일상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잘 아는 것이다. 이 속에서 공연장에서 겪은 그 때의 사건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관객을 가리켜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라고 말한다. 적은 정보의 사운드 아트 공연은 관객의 몰입 보다 거리를 만들고 이 거리감은 동시에 일상을 마주하는 수많은 강렬한 순간들에 대한 깨달음의 단초가 된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관으로 확장된다.


사운드 아트, 헵타포드의 언어


테드 창의 SF 단편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아티스트의 언어와 관객 사이의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헵타포드라는 외계인과 영상교신 할 수 있는 체경이라는 거울이 지구에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언어학자 루이즈는 체경을 통해 헵타포드와 통신하면서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해석한다. 루이즈는 이들의 언어가 인과적인 인간의 언어와 달리 동시적 체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루이즈는 과거-현재-미래의 인과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사고체계를 습득하게 된다. 즉, 루이즈는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사운드 아트가 외계인의 언어라면?>


외계인의 언어를 번역하는 루이즈가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얻게 된 것처럼, 아티스트의 언어를 번역하는 관객은 또 다른 세계관을 목격한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변화한 회화는 실제 세계가 놓친, 사실 우리들이 놓친 순간들을 인식하게 한다. 사운드 아트의 소리를 헵타포드의 언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통해 이 세계에서 놓치고 있는 순간들을 체험한다. 사운드 아트는 물리세계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소리의 현상들을 들려주기도 한다. 우리는 사운드 아트를 만난 그 사건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일상 속에서 그 의미를 다시 번역하고 있다. 사운드 아트는 또 다른 의미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다. 



글.임태환(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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