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
북서울 미술관 (S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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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을 본적이 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화려한 복고풍의 셔츠와 나팔바지, 통굽을 신은 그녀는 차 위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살짝 뒤로 기대어 긴 다리를 곱게 뻗은, 앳되면서 빛나는 그녀의 웃음에 나는 금방 사랑에 빠졌다. 짙은 스모키 화장 뒤 그녀의 맨 얼굴이, 가려지지 않은 눈빛이 궁금했다. 지난 8월 10일, 북서울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 전시에 들렸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생기있다 못해 도발적인 눈빛을 한, 통넓은 나팔바지 입고 금방이라도 사진에서 뛰쳐 나올 것 같은 역동성을 가진 한 여성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시절 내가 보았던 흑백 사진 속의 그녀가 겹쳐졌다.
전시장에 진열된 사진 속의 여성은 김추자, 한국 60년대와 7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
가수다. 당시 “섹스 심볼” 로 불리웠던 김추자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군사화된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정부는 종종 김추자의 노래를 천박하고
퇴폐적이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김추자 아카이브> 에는 그녀의
사진 외에 앨범, 공연 포스터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한 포스터는 그녀를 “청춘의
상징,” “율동의 슈퍼스타”로 소개한다. 사진 속 김추자는 한 손은 허리에 다른 한 손은 목
뒤에 살포시 올리고 살짝 허리를 틀어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웃음 짓고 있다. 로우앵글을
사용해 찍은 포스터 사진은 그녀의 둔부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며 성적인 이미지를
자아낸다. <무인도> 앨범 표지에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소리지르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곱슬곱슬하게 부푼 그녀의 검은 머리와 함께 사진은 몽확적이면서도
카타르시스적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것 같은 몸, 고양이처럼 묘하게 도전적인 눈빛,
그리고 깨질것 같이 예민하지만 금방이라도 걸쭉히 만져질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는
무정부주의자적 자유와 저항의 표식이 된다. 디바답다. 그런데 무엇이 디바를 만드는가?
Figure 2. <김추자 아카이브>
한 비디오 아카이브에는 김추자의 콘서트 공연이 틀어져 있다. 무음의 흑백 영상 속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춤추는 몸이다. 허리를 불규칙한 리듬으로 자유롭게 흔들며 발을 구른다.
관객을응시하지않고살짝눈을감은채앞옆으로움직이는무릎과즉흥적으로가볍게
움직이는 팔은 흡사 약간 술에 취한 듯한 춤사위다. 관객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적인 미소가
아닌 자연스레 떠오르는 미소를 머금고, 관능적이 아닌 감각적인,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춤이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주체성이 우선시된 그녀의 춤은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관음증적 시선에 균열을 일으킨다.
김추자의 젠더 포퍼먼스는 디바의 “전복적인 여성성”을 연상시킨다. 1그녀의
디오니시안적인 무대 자아, 예측할 수 없는 운율의 움직임과 개성은 주체/타인, 남성/여성,
이성/신체의 구분을 잠시 잊게 하며 관객과 공연자 자신을 연결시킨다. 관객은 자신이
공연자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신체화된 그녀의 기억을 마주한다. 마치 오래전의
주술사가 그러하듯, 그녀의 샤머니즘적인 공연은 디바에 대한 찬미로 송환된다. 무대는
하나의 의식이 된다. 그녀의 무대는 기술의 찬사를 넘어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과, 강인함,
말해지지 않는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2
<아시아 디바: 진심을 그대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시대를 표방하던 화려한 스펙타클로의 김추자는 사실 서구남성 중심의 한국근대사에서 소외되고 망각된 소수자를 대변한다.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미국, 유럽의 작가들이 참여한 전시는 전통회화, 미디어 예술, 기록영화, 녹화된 공연물, 설치, 사진, 아카이브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역사적으로 타자화된 아시아 여성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고자했다. 가수, 남장여장 배우, 무용수, 주술사, 성노동자들의 신체에는 후기식민지적 기억과 서구식 근대화의 폭력이 각인되어있다. 한 비디오 아카이브에서 김추자는 코러스 여성 두명과 노래하고 있다. 다리가 드러나는 달라붙는 검은 치마에 부풀려진 머리, 한껏 신나는 양 앞뒤로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그녀는 20 년대 원시주의를 풍미했던 흑인 무용수 죠세핀 베이커를 연상케 한다. 공연을 지켜보는 한 무리의 미국 군인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갈채를 보낸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여가수를 넘어 한국적 음악과 저항성을 담은 주체로 칭송받던 디바는 식민지적 시선을 가진 주체에게는 불과 “이국적”인 아시아 여성의 몸이라는 볼거리로 환원된다. 2
급격한 산업화와 후기식민주의의 영향으로 아시아권의 여성 공연자들은 세 가지 이상의 벽을 마주한다. 여성으로서 타자화된 주체, 몸을 쓰는 공연자로서 천시받고 대상화되는 신체,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적 환상이 투영된 이국적 객체로서의 아시아인이 그것이다. 이와같이 계급화, 구조화, 민족화, 젠더화된 관념은 그녀들의 몸의 가시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화려한 볼거리로 만든다. 서구근대화를 지향하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순응할때, 오리엔탈리즘의 환상을 채워줄때 이들은 뮤즈가 되었고, 자신의 주체성과 욕망을 표방할때에는 소외되었다. 김추자의 전성기를 끝낸 소주병 테러 사건은 주체성을 공적인 자리에 드러내는 여성을 처벌하는 가부장적 시나리오를 대변한다.
사회구조적으로 이미 소외된 집단은 그 가시성이 증대된다 하여 그들이 가진 목소리와
영향력이 주체적인 방식으로 증대되는 것이 아니다. 3디바라는 용어는 공적인 자리에
전시된 여성의 예술적인 능력의 인정한다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
디바의 매혹적인 능력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4디바라는 용어가 여성화되어
타자로 위치될때, 그녀의 무대는 연극적인 볼거리로 미화된다. 디바는 문화적 망각제가
되어 화려함과 매혹이라는 단어와 병치된다. 인생이 하나의 퍼포먼스라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디바라는 서사구조에서 잊혀지는 것은 무대 위 자아가
아닌 맨 얼굴의 한 여성, 무대 위 모습이 아닌 무대 뒤 그녀의 주름진 삶이다.
전시장을 나오며 나는 참여 작가들이 디바를 통해 본, 그래서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은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물었다. 나는 그 진심이 <김추자 아카이브>에서 본 마네킹과 닮았다 생각했다. 무대 위 화려한 삶을 재현하듯 반짝이는 의상에 다채로운 조명과 소품으로 한껏 장식된 마네킹에서 내가 본 것은 공허함과 외로움이었다. 나는 문득 그녀들이 정말로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뮤즈도 몬스터도 바라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디바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글의 초반에 언급된 것은 우리 어머니의 사진이다. 어머니는 김추자와 같은 시기
국내외에서 저명한 가수 및 무용수로 활동하셨다. 삼십대에 접어들때까지 나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젊은 시절 해외 공연이나 무대 뒤 삶에 대해 여쭈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는
진실을 알기 두려웠는지 모른다. 나는 어머니의 맨 얼굴을, 진심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몇년 전 노래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김추자의 “눈이 내리네”를
부르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울었다. 상처를 감춘 눈과 미소, 동그란 어깨와 나이든 작은 몸,
3
깊고 강인하지만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에서 본 것은 한 여성의 삶이었다. 치열하고
소리없지만 충분히 저항적이었던, 한때 모두의 디바였지만 지금은 잊혀진, 나의 디바.
4
디바성은 초월성으로 정의된다. 관객과의 소통이건 예술적인 재능이건 일상의 한계를
넘는 지점이 누군가를 디바로 명명되게끔 한다. 5그러나 디바는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이나
매력적인 외모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디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번 눈의 마주침으로, 스치는 손끝으로 우리는 간혹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진다.
그녀/그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사람은 나의 디바가 된다. 신체화된 경험은
어리석은 언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설명할 이유도, 진심도, 진실도 요구하지 않는다.
기억은 수행적이다. 서로가 서로의 눈빛에서 눈빛으로, 목소리에서 목소리로, 몸에서
몸으로 이야기할때에 기억은 전달되고 말해지지 않아 남아있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아주 잠시 서로가 서로가 되는 찰나의 순간에, 벗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
모두의 디바가 된다.
글. 오주연 (교수, 샌디에고 주립대학교)
* 본 리뷰는 영문/한글로 동시에 작성되었습니다.
- Rosa Linda Fregoso, “Lupe Velez: Queen of the B's,” From Bananas to Buttocks: The Latina Body in Popular Film and Culture, edited by Myra Mendible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7), 51-56. [본문으로]
- Terri Francis, “Embodied Fictions, Melancholy Migrations: Josephine Baker's Cinematic Celebrity,” Modern Fiction Studies 51.4 (2005), 829. [본문으로]
- Peggy Phelan, Unmarked: The Politics of Performance (London: Routledge, 1993). 가시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If representational visibility is equal to power, then an almost-naked young white woman should be running Western culture” (10). [본문으로]
- Claudine Raynaud, “Foil, Fiction, and Phantasm: ‘Josephine Baker’ in Princess Tam Tam.” The Scholar and Feminist Online 6.1-6.2 (2007-2008), 16. [본문으로]
- Frances R. Aparicio and Wilson A. Valentín-Escobar. “Memorializing La Lupe and Lavoe: Singing Vulgarity, Transnationalism, and Gender,” Centro Journal 16.2 (2004): 78-1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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