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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3월 성곡미술관은 독일국제교류처와 괴테인스티튜트와 함께 독일현대 사진전을 열었다. 여기서 많은 작가와 작품을 선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 사진의 스펙트럼을 가늠해 보기에 충분해 보인다. 전통적인 스트레이트 인물사진(알브레흐트 푹스Albrecht Fuchs), 사진을 이용한 혼합설치(클라우스 괴디케Claus Goedicke), 일상적 풍경사진(카린 가이거Karin Geiger), 21세기 아시아판 인물학(니콜라 마이츠너Nicola Meitzner), 아카이브에서 사용되는 사진형식의 작업(페터 필러Peter Piller) 등, 현대미술에서 사진이 어떻게 현상하는지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진의 짧은 역사를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presentation/representation>라는 제목도 이에 호응한다. ‘제시와 재현’은 현대미술이라면 한 발짝 안 걸칠 수가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거의 마법 같은 용어다.


2. 사실 전시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국제교류전의 형태처럼 보이는데, 뚜렷한 주제를 내세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시의 평가가 박해진 것은 아니다. 갤러리가 소개하는 것처럼, 이들은 3세대 사진작가 볼 수 있다. 베허부부가 1세대라면, 구르스키가 2세대고, 다음에 이들이 올 것이다. 약간은 무리가 따르지만 각각의 세대를 다음과 같이 구별해 보자. 첫 번째가 사회적 인상학을 독특하게 확장 계승한 ‘스트레이트 포토’라면, 두 번째는 인간의 손에서 해방된 기계적 시선의 ‘하이퍼리얼 포토’일 것이다. ‘현실’과 ‘현실-이상’의 차이라고 간주하면 정확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서 소개한 3세대 사진들의 특징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공통의 기반이 있을까. 앞서 다양한 사진형식을 엿볼 수 있다면 말했지만, 뒤집어 말하면 작품들의 소재와 형식을 샅샅이 살펴봐도 공통점이 딱히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시가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전시 이상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오늘날 사진이란 무엇인가. 물론, 전시를 기획할 때 이 정도까지 생각했을 가능성은 적다.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진작가를 추려서 대표작을 엄선한 성격일 테니까. 하지만 작업 하나하나가 던지는 내용과 무관하게 전시전체가 환기하는 성격은 또 다른 문제다.



3. 원래 사진은 찍는 것이었다. 사진은 회화와 비슷하게 무엇인가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make’와 ‘take’의 간격은 보기보다 상당했다. 이 간격을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은 바르트였다. 그는 ‘푼크툼’이란 개념을 통해서 사진에서 읽히지 않는 무엇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의 손과 마음을 통해서 가공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남기는 자국이었다. 전자가 인공(의도)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명백히 자연(사물)의 영토였다. 후자에 주목한 사람들은 바르트를 넘어서 퍼스의 지표index 개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퍼스는 기호를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인공적인 관습에 따르는 상징, 유사성에 기초하는 도상, 실재의 흔적이 기록하는 지표. 상징과 도상은 익히 알려진 기호였지만, 세 번째 지표는 그렇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미지의 세계에서 ‘현상’하지 못한 기호였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인간의 손길이란 상징적 감가상각이 부재하는 예술이란 개념적 형용모순일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사진은 이 형용모순에 미지의 이미지영역을 단번에 열어놓았던 셈이다. (뒤샹이 현대미술의 처음이자 끝인 것도 사진의 이러한 성격을 초기에 포착해 작업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커다란 유리: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 발가벗겨진 신부>(1923)에서 그는 ‘시간’을 작업에 작동시킴으로써, 지표의 특성을 사진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디지털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텍스트와 이미지 등 모든 것을 빨아들였던 디지털은 사진까지 흡수했다. 사진이 사진으로서 기능하던 지위는 이로써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회화처럼 ‘make’의 대상이 되었다.



4.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 동안 대립했던 사진과 회화가 (텍스트와 더불어) 사이 좋게 화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렇게 볼 만한 근거도 존재한다. 회화의 제작성, 사진의 실재성, 프로그램의 텍스트성이 골고루 존재하기에 그렇다. 앞서 이 전시가 스펙트럼이 넓다고 설명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과 같다. 확실히 사진은 사진의 매체특정성을 빠르게 상실해 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진을 생각하는 태도, 사진을 제작하고 수용하는 감각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사진에서 저옛날 증거의 권위를 찾지 않는다. 즉석 사진을 찍는 동시에 회화처럼 편집 제작하여 실시간으로 반응을 주고 받는다. 여기서 ‘그것’은 회화기도 하고 대화기도 하고 기타 등등 온갖 매체의 기능을 다 수행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진에서 오늘날 위협받는 것은 증거의 권위, 즉 매체의 본성이라고.



6. 하지만 달리 볼 만한 구석도 존재한다. 오늘날 매체의 지형이 단순히 여러 매체가 종합(혼합)되면서, 기존 매체의 개념과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었지만, 어떻게 보면 문제를 협소하게 잡은 것일지 모른다. 사진과 영화가 등장하면서 불거졌던 예술의 본성과 관련된 논쟁에서 일찍이 벤야민이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즉 예술(매체)의 본성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보다 그것의 역사성을 전제하고, (달라졌다면) 달라진 매체의 방향과 성격을 진단해 보는 시각이 필요한 게 아닐까. 크라우스나 마노비치 같은 이론가들이 ‘이후의 매체post-media’를 논의하는 것은 이유가 확실하게 있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다. 매체 특정성을 넘어서 매체 일반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는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독일 현대사진전>은 현대미술의 역사를 짧게 쓴 동시에 사진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줌으로써, 사진이 이후의 매체를 가늠할 리트머스 용지역할을 암시적으로 드러낸 셈이리라. 


글. 김상우 (앨리스온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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