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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ly Space/Knowledge : 감각과 지식 사이에 있는 것들


지난 32일부터 25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감각과 지식 사이 Otherly Space/Knowledge>는 아시아문화전당 창제작 스튜디오 23, 문화창조원 로비, 볼트 공간 등에서 진행된 전시로, 미디어테크놀로지의 개입이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의식으로 확장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을 다루었다. 데이터 세계와 동시다발적으로 연동되는 지금, 예술은 감각과 지식 사이의 또 다른, 3의 공간을 어떻게 확장하고 있는가?





피어스 바르네크+매튜 비더만, <퍼스펙션>(2015)


가장 처음 만나는 작품은 사운드와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피어서 바르네크와 1990년부터 다양한 매체와 사회환경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 매튜 비더만의 작품이다. 어두운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진동이 느껴지는 낮은 소리가 들리고 3개의 가벽에는 시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필자는 전시 제목처럼 작품을 감상하고자 캡션이나 글을 먼저 읽지 않고 전시를 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한참 영상을 보다가 마침내 발견한 것은, 스크린 공간이 내가 서 있는 물리적 공간과 연동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움직이면 스크린 속 영상이 나를 따라 움직이며 원근감이 변한다는 것이다. 관람객의 위칫값을 영상에 실시간으로 투사하는 인터렉션 작업이 이것이 처음이겠냐 만은, 3개의 가벽에 만들어지는 가상 공간과 내가 서 있는 물리적 공간이 얽히는 경험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경험은 전시 관람을 시작하는 순간의 내 감각과 지식 체계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같은 맥락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와 다이토 마나베의 <센싱 스트림-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2014)는 거대한 스크린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전자파를 감지하고 이를 시각화한 작업이다. 전시장에 있는 센서는 (스마트폰, WIFI, 라디오 등에서 발생하는) 80MHz-5.2Hz 사이의 전파를 수집하고 스크린에 투사한다.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것 말고도 도쿄나 후쿠시마 같은 다른 지역의 전자파도 수신한다. 관람객은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조정하고 변화하는 영상과 소리를 감각한다. 작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히며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문경원+전준호, <자유의 마을>(2017)


눈에 보지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은 전자파뿐만은 아니다. 문경원 전준호 작가는 분단이라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다큐멘터리 형식의 두 스크린이 마주 보고 있는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자유의 마을>(2017)의 배경은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 마을 대성동이다. 대성동은 행정상으로는 파주시에 위치하지만, 출입과 내부 통제는 모두 법률적으로 유엔(UN)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을은 서울에서 한두 시간 거리에 있으나 시스템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기에/혹은 알려고 하지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처럼 여겨진다. 두 작가는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기 전, 과거로부터 마을의 기원을 추적한다. 시스템 밖의 감각은 가능한가? 안다는 것(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두 작가는 자유의 마을을 빗대어 이렇게 질문한다.


매튜 비더만+마르코 펠리한, <우린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경각심과 지성을 갖춘 시민사회 건립에 대해>(2016~)

<이니셔티브 API>(2014~)


창제작 스튜디오 2에서는 매튜 비더만과 마르코 펠리한이 협력한 두 작품 <우린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경각심과 지성을 갖춘 시민사회 건립에 대해><이니셔티브 API>를 만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탐구한다. 첫 번째 작품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Eisenhower)1961년 퇴임 연설을 연구하고 정부의 사찰 행위와 정보통신시설의 악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번째 작품은 두 작가가 함께 2008년 설립한 API를 통해 북극의 자치권을 향상할 수 있는 기술을 소개한다. 이 두 작품은 개인 안에서 발생하는 감각이 아니라 사회와 기술 발전의 변화로 발생하는 '사회적 감각'에 더 집중했다.

  

이상원+하르셰 아그라왈 <비행하는 팬터그래프>(2016)


문화창조원 내 볼트(Vault) 공간에서도 6/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는 좀더 기술 매체를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비행하는 팬터그래프>는 드론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작품이다. 관람객은 책상에 놓인 펜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면 컴퓨터가 이 움직임을 인식하고, 드론으로 전달한다. 드론은 그 움직임을 바탕으로 벽면에 관람객의 그림을 따라 그린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는 시도를 보여주고 했다. 로렌 매카시와 카일 맥도날드의 설치 작품인 <사회적인 영혼>타인의 소셜 미디어 속에서 표류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관람객은 작품 입구에 있는 터치패드에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입력하고 모니터와 거울로 가득 채워진 방으로 입장한다. 방에 입장하면 자신이 쓴 트윗들이 재생되고, 알고리즘이 자신의 트위터 기록을 기반으로 어울리는 SNS 계정을 찾아 소개해준다. 그 계정과 연락을 할지 말지는 관람객이 선택하면 된다

이 두 작업은 물리 세계와 가상 세계에서의 나/주체를 확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필자는 두 작품을 모두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비행하는 팬터그래프>는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는 안전상의 이유로 작품이 구동되지 않았고, <사회적인 영혼>은 알 수 없는 오류로 멈춘 상태였다. 이러한 문제는 인터렉티브 작품이 가지는 일반적인 한계일 수 있으나, 기술 매체의 오류는 명료한 지식 체계 밖, 제 3의 공간으로 이끄는 가능성을 내포한다(물론 이 두 작품에서 그러한 가능성이 잘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작동하지 않는 <사회적인 영혼>의 거울 속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무르며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분명 작품을 제대로 본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를 경험했을 것이다 ).


카일 맥도날드+조나스 존게한, <군중 완벽하게 묘사하기(Exhausting a Crowd)>(2015)


카일 맥도날드와 조나스 존게한의 <군중 완벽하게 묘사하기(Exhausting a Crowd)>는 영국의 런던, 버밍엄, 네덜란드 로테르담, 위트레흐트 그리고 광주의 공공장소에서 12시간 동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이 일상을 관찰하고 쓴 소설(An Attempt at Exhausting a Place in Paris)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페렉도 인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버스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같이 일상적이고 주목할 것 없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기록한다. 이 작품에서도 12시간 동안 작가가 촬영한 영상을 관람객이 보고 영상 속 상황을 적고 태그를 붙일 수 있다. 작가의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각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광주 www.exhaustingacrowd.com/gwangju

런던 www.exhaustingacrowd.com/london


작가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력으로 완벽한 감시체계의 자동화가 가능한지 탐구하고자 했다. 인공지능의 이미지 인식은 날로 성능이 좋아지고 있다. 2015년 인공지능 이미지 인식 대회인 IMAGENET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정답율(%)를 뛰어넘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치안 강화라는 명목으로 인공지능 CCTV가 국민을 감시하고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상황을 묘사하려는 인공지능과 달리 <군중 완벽하게 묘사하기>에서는 영상을 실제 그 상황의 맥락과는 다른 묘사들이 인물에 붙여지는 상황이 끊임없이 발견된다. 여기에는 관람객의 개입 혹은 상상력이 상황을 묘사하려는 기계적 행위를 방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다는 것, 즉 지식은 자연에서 얻은 감각을 인식하고 데이터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전자파처럼, 기존의 방식으로는 감각되지 않는 영역을 마주하게 된다. 본 전시의 감독인 아베 카즈나오는 디지털 영역에서는 자연계에 나타나는 자연적 상호 연결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감각과 지각, 의식, 인식이 완전하게 닫힌 지식이 아니라 틈 사이에 존재하는 “OTHERLY SPACE”가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피어스 바르네크과 매튜 비더만의 <퍼스펙션>처럼, 직관적으로 감각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오는 작품도 있는가 한편 글/지식의 도움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리뷰를 적기 위해 다시 전시 소개 글을 읽어도 내가 느꼈던, 감각과 지식 사이의 무너짐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뻔한 결론이지만, 감각은 언어 밖에 있다.



글. 최선주 [앨리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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