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완전한 조작이 만든어낸 실제를 보라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3. 2. 00:31


‘예술은 실제를 인식하는 막강한 방법이고, 이 단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은 실제를 인식하는 기술이다.’ - 빌렘 플루서 1)

푸른 수의를 입은 한 청년이 서대문 형무소의 찬 바닥에 웅크려 앉아 무엇인가를 써나간다. 벌래도 아닌 것이 로봇도 아닌 것이,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운 기계는 청년이 새겨놓은 글자들을 뒤쫓으며 위협한다. 청년은 진지하게 내면의 소리를 써내려간다. 펜을 쥔 손에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곧 악필로 변해버릴 그런 글씨는 집중력과 끈기로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혼자놀기>라는 퍼포먼스 작품을 통해 진기종이란 작가를 만났던 처음 모습이자 첫 기억이다. 몇 년이 흘러 진기종은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번에는 진기종이라는 작가의 ‘스타일’을 만날 수 있었다.


스타일.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미디어아트 작가에 대한 갈증은 크다. 작가의 손 맛이 묻어나지 않는 미디어 아트 작품에서 남다른 스타일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별다르지 않은 장비와 소프트웨어는 종종 비슷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미디어 아트 작가의 스타일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듯 하다. 작가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작품의 스타일을 만든다. 작가의 관심은 주변의 일상에서부터 전세계적인 거사에 이르는 다양한 이야기에 접근하게 만들고, 포착한 소재를 매체를 통해 비추고 담아내는 과정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기획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진기종의 작품은 바로 작가의 관심이 작품의 구조로 이어지고, 스타일로 완성된 경우일 것이다. 진기종은 세상의 많은 사건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과정에서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비춰진 세계를 실제로 받아들이는 상황에 주목한다. 흔히 우리는 매체를 통해 세상을 보는데, 매체는 현실을 왜곡시키고 조작하는 장치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 매체는 어떤 판단의 개입이나 필터를 없이 맨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여과장치이다. 따라서 진기종의 작품에서 매체가 드리워놓은 왜곡의 덫을 의심하고 거둬드릴 것을 요청하는 장치이다. 그의 전 작품<세계시체지도(2003>에서 작가는 관객들로 하여금 시체로 구성된 세계지도 위를 추적하는 라인트레이스(line tracer)에 의해 조명되고 확대된 이미지를 통해 실체를 발견하도록 한다. 관객들은 라인트레이서가 비추는 파편적인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전체의 이미지를 인식하게 되는데, 여기서 라인트레이서는 실체를 보게 하는 장치인 동시에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이미지를 곧바로 현실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어기제로 기능을 한다.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과 보여주는 과정이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전지적인 제3자의 위치에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관객의 각성을 이끌어내는 진기종 작품의 구조와 스타일은 라인트레이서를 등장시킨 작업에서 <On-Air>연작으로 이어진다. 그의 전작이 ‘보는 것’, 즉 지각의 오류가 곧 세계에 대한 인식의 오류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면, <On-air>연작에서는 텔레비전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왜곡된 이미지로 압도당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텔레비전은 수없이 많은 사실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매체학자 빌렘 플루서는 텔레비전의 사용은 이 도구의 바탕에 깔려있는 설계에 역행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재미있는 비유를 드는데, 우리가 벽에 못을 박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기 위해서 망치를 사용한다면, 이 망치는 그렇게 사용될 때 매우 잘 기능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설계는 ‘윤리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망치를 설계한 의도 속에는 머리를 때리는 것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날 텔레비전의 사용은 이 연장의 기능적인 오용이 아니라, ‘윤리적’ 오용이다. 텔레비전은 그 메시지를 받는 수용자가 특정한 태도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며, 주관적인 메시지와 태도모델을 전달한다. 그런 측면에서 모든 프로그램은 본질적으로 광고이다. 특히 텔레비전은 자기 자신과 저기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사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직접적인 중재(매체)라고 믿도록 하며, 따라서 광고가 수용자에게 흔히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진기종의 작품은 완전한 조작을 통해 바로 이러한 텔레비전 시스템의 왜곡을 역설한다. 벽체 너머에서 완벽한 사실로 비춰지고 있는 사건들은 마치 어느 엉뚱한 발명가가 자신의 공작소에서 뚝딱거려 만들어놓은 미니어처의 세계, 곧 가짜 사실들이다.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다룬 <YTN 뉴스>, 미국의 바그다드 폭격을 상황을 보도하는 <알자지라Aljazeera 뉴스>, <디스커버리 채널>,<벤츠 광고>, <화면조정시간> 등은 그것이 가짜 사실이던 진짜 사실이던간에 그것에 텔레비전 방송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예들로서 선택한 것들이다. 진기종은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대상과 보여주는 과정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압도하는 이미지 세계를 의심하고 실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것을 요청하는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완벽한 조작은 세상을 전달하는 매체의 불투명성을 밝히는 역설적인 구조인 것이다. 완전한 조작은 오히려 실제를 보도록 하는 장치이며, 왜곡과 조작의 시스템을 파악하도록 한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조작과 위선을 비판하는 많은 작업들 속에 수공적이면서도 위트가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진기종이 우리에게 어떤 또 다른 충격과 각성의 계기를 던져줄지 기대하게 된다.



1) 빌렘 플루서,『피상성 예찬』,「텔레비전의 현상학을 위하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p.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