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디지털시대의 군중, 관객의 고독한 방백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3. 25. 23:29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잘 빚은 비스크인형처럼, 말갛고 깨끗하지만 창백한 낯빛의 인물들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망막에는 하나같이 네모난 빛덩어리가 어려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모니터 화면이다. 그들은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헤매고 있거나, 인기 드라마,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거나, 그 외에도 다른 목적으로 화면 속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이 담겨 있는 상자를 열었을 때처럼, 화면이 내뿜는 빛은 그들의 얼굴을 밝게 비춘다. 이 빛은 얼굴 표면 뿐 아니라, 머리속에도 밝은 ‘지식’의 세례를 내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작가는 인공적인 빛 속에서 일상을 꾸려가는 창백한 현대인의 은유인 것처럼도 보이는 이 작업들을, 그들이 실제 바라보고 있던 화면과 동일한 크기의 사진으로 제작하여 전시장에 설치하였다. 이러한 장치를 통하여 작가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물을 또 다시 사진이미지 속에 담는 중층구조를 만듦으로써 이미지과 실체의 미묘하고 난해한 경계에 대해 1차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면, 그 곳에는 108명의 관객이 줄지어 앉아있는 3면의 스크린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무대가 보인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자는 그 무대 위에 올라선 채 영상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스크린 속 관객 가운데 한두명, 또는 세명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이야기한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한다기보다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중이다. 간간히 그들의 이야기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상대방의 이야기에 응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복잡하게 얽히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설전을 벌이는 것도 같다. 하지만 실은 각자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에서 늘어놓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편집, 재구성된 것이다. 관객이면서 동시에 배우로서, 화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인물들 뒤쪽으로는 일군의 관객이 도열하여 앉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동일한 타이밍에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관객=배우의 이야기에 함께 귀 기울이기도 하고, 먼 곳 어딘가를 함께 바라보기도 하고, 함께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동일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동일한 경험을 하고, 그에 대해 동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 이들도 사실은 작가가 한명 한명을 따로 촬영한 뒤 편집, 구성하여 관객으로 연출한 것이다. 스크린 속의 그들은 다른 시공간속에서 다른 상황에 리액션하고 있던 와중 인위적으로 차출되어, 가상적으로 모인 관객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기술적 통제 속에서 한 자리에 모여 앉은 관람자로 가시화된다. 서로 분절된 조각들이 하나의 시공간속에 합성되어 들어오면서 일종의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관객은 군중의 다양한 행동양태 가운데 ‘관중행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무엇인가를 관람하기 위해 특정 장소에 의도적으로 모인 이들의 행동방식은 대개 사회적 관습에 기반하여 규정되어 있다. 연극이 끝나면 박수를 치고 환호하거나, 관람 중에는 떠들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등이 규정된 행동양식이다. 이 가상의 관객들은 작가의 합성, 편집이라는 행위를 통해 행동을 강력하게 조율, 통제받는다. 이 상황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판옵티콘 작동가능성을 암시한다.



관객의 합성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속에서의 군중, 대중의 양상에 대한 상징적 장치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믿게 할 만한 장치로서 합성은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놓여 있던 인물들을 ‘이미지’로 병치시켜버린다. 108명의 관객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과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통제 속에 행동을 규제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관객의 존재양태는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물리적 광장에 나서서, 물리적으로 인접한 거리에서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고 행동하는 이들만이 군중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 지리적 접근성은 어려울지라도 오늘의 사회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뮌의 이번 작품이 이전에 군중에 대하여 다루던 작업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디지털미디어시대에 군중의 확연히 달라진 존재방식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실체와 환영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관객은 연극이라는 상황 속에서 수동적 객체다. 대개 ‘방백’은 그와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배우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다. 다만, 무대바깥에 있는 관객들하고만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연극적 장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방백을 하는 이는 다름 아닌 관객=배우다. 이 방백을 통하여 관객은 극의 주체로 나서는 듯하다. 그런데 실제 이 작품에서 관객=배우와 함께 스크린 속에 존재하는 관객들은 이 방백을 들을 수 없다. 그들이 관객=배우와 함께 극을 이끌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상의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관객=배우의 방백은 이 작품을 감상하러 온 관객(이자 스크린 앞에 설치된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만이 들을 수 있다. 스크린 속에서 설정된 관객=배우와 관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애초에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관객=배우의 방백이 전달되는 곳은, 완전한 외부다.



이 작업이 가지고 있는 장치 가운데 또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관객의 방백 내용이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미술품을 창작하는 ‘작가’라고 상정하고 여러 질문에 대하여 작가로서 답변하고 있다. 그들은, 가짜이지만, 진짜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진짜의 상황을 상상하여 꾸며낸다. 그 순간, 관객은 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것이므로, 결국 무대는 허구적 공간, 가상현실이다.

어떤 작업을 하고 어떤 자세를 견지하는 작가인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 이외에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지, 미술품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정도에 대한 고민,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만족도 등, 작가라면 한 번 쯤 생각해보고 논의해보았을 법한 문제들을 작가를 가장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매우 그럴 듯하다. 결국, 작가라는 이들이 인간 이외의 특별한 ‘종’이 아닌 다음에야,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일들 역시 보편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도 같다.

이번 작업의 ‘반전’은 미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로서 가능한 고민들, 나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유사한 고민과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확인 의 과정속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미술인들은, 그들이 ‘가짜 작가’라는 사실을 안 순간 대개의 경우 당황한다. ‘비미술인’의 입을 통해 한 사회에 퍼져 있는 ‘작가’에 대한 허상과 실체를 탐구해본 이 장치가 도달하는 곳은 결국, 미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이미지와 그 실체 사이에는 별 간극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기막힌 결론은 아닐까.

실제, 동일한 시공간에 공존하는 존재들 간에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존재하는 방백은, 결국, 소통의 기제가 누구를 향해, 어디를 향해 작용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작업 속에서, 고독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방백을 던지고 있는 이는 결국, 관객이 아니라 작가 자신인 것이며, 작가는 그 존재상황의 부조리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통의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글. 김지연 (가나아트센터 전시팀장, edge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