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티스트 김병호는 판타지를 디자인한다. 그에게 판타지는 인간의 욕망임과 동시에 인간 컨트롤에 의한 것이다. 생명을 지닌 일체의 것들 속에 판타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그는 인간의 욕망을 부단히 각색, 조정, 배합한다. 따라서 욕망이 강렬할수록 판타지는 정교하게 레디메이드화되어 상품의 분위기를 유발하게 된다. 김병호의 작품은 욕망의 재현이 아니라 결과다.
욕망하되 컨트롤할 수 있다는 그의 시각은 미디어를 다루는 과정에도 그대로 흡수된다. 디지털시대에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사고의 일부를 이끈다. 우리의 사고가 컴퓨터프로그래밍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김병호는, 미디어는 인간의 도구며 따라서 전적으로 인간의 컨트롤 하에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런 도구적 관점에서는 미디어이미지가 물질을 전제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강철에 우레탄고무를 입혀 가열한 상태를 노출시킨 <Assembling for Eternity 1>(2008), <Assembling for Eternity 2>(2008)는 비(非)물질적인 관념을 유기적인 형태의 물질덩어리로 추상화한 작품으로, 철저히 물성에 기반하는 그의 작업스타일을 반영한다. 영상이미지의 주된 속성이 비(非)물질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가 영상작업에 주력하지 않는 까닭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에게 물성은 미디어의 원천이다.
TITLE: Assembling for Eternity 1, SIZE: 34x34x48 (cm), MEDIUM: urethane rubber on stainless steel
TITLE: Assembling for Eternity 2, SIZE: 24x35x47(cm), MEDIUM: urethane rubber on stainless steel
TITLE: Silent Pollen – sowing, Silent Pollen – gathering SIZE: 225(width)x60(height)x43(depth)cm, MEDIUM: aluminium, microspeaker, DTMF generator
TITLE: Assembled Fantasy, SIZE:111(width)x25(height)x32(depth)cm MEDIUM: steel, aluminium, stainless steel, speaker, power amplifier, oscillator & multi mode filter module
미디어아트의 미덕인 인터랙티브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과 노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인터랙션을 촉발하기 위한 시스템이 오히려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하는 등, 하이-인터랙티브 작품일수록 조작성의 딜레마에 갇히기 쉽다. 급진적인 미디어이론가 볼츠(N. Boltz)는 수동적인 수용미디어를 능동적인 참여미디어로 대체하리라는 전망은 이상주의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꼬집으면서, 이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미디어 트레이닝에 달려있다고 규정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점에서 김병호는 즉각적이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대신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택했다. 그리고 은폐된 강제를 걸러낸, 자율적이고 유연한 피드백을 시도한다. 그가 고수하는 오브제의 조형성은 사운드 같은 비(非)물성의 즉각적인 인터랙션에 다소 더딘 관람자를 배려한 장치다. 그에게 미디어는 도구며, 새로운 조형언어를 모색하는 것은 도구를 개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김병호의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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