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Designing Sound Sculpture,김병호 개인전_exhibition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15. 16:48

미디어아티스트 김병호는 판타지를 디자인한다. 그에게 판타지는 인간의 욕망임과 동시에 인간 컨트롤에 의한 것이다. 생명을 지닌 일체의 것들 속에 판타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그는 인간의 욕망을 부단히 각색, 조정, 배합한다. 따라서 욕망이 강렬할수록 판타지는 정교하게 레디메이드화되어 상품의 분위기를 유발하게 된다. 김병호의 작품은 욕망의 재현이 아니라 결과다. 

욕망하되 컨트롤할 수 있다는 그의 시각은 미디어를 다루는 과정에도 그대로 흡수된다. 디지털시대에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사고의 일부를 이끈다. 우리의 사고가 컴퓨터프로그래밍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김병호는, 미디어는 인간의 도구며 따라서 전적으로 인간의 컨트롤 하에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런 도구적 관점에서는 미디어이미지가 물질을 전제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강철에 우레탄고무를 입혀 가열한 상태를 노출시킨 <Assembling for Eternity 1>(2008), <Assembling for Eternity 2>(2008)는 비(非)물질적인 관념을 유기적인 형태의 물질덩어리로 추상화한 작품으로, 철저히 물성에 기반하는 그의 작업스타일을 반영한다. 영상이미지의 주된 속성이 비(非)물질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가 영상작업에 주력하지 않는 까닭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에게 물성은 미디어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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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Assembling for Eternity 1, SIZE: 34x34x48 (cm), MEDIUM: urethane rubber on stainless st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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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Assembling for Eternity 2, SIZE: 24x35x47(cm), MEDIUM: urethane rubber on stainless steel

하이테크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시대에 김병호의 관점은 다소 고루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할 점은, 과거에 미니멀아트가 물성에 천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빛 등의 비(非)물성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병호 역시 물성을 파고들어가 비(非)물성을 혼재시킨다는 사실이다. <Silent Pollen - sowing>(2007), <Silent Pollen - gathering>(2007)에 등장하는 사운드는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동일한 듯 다른 이 두 작품은 기존 ‘Flowers’ 시리즈의 연장으로, 꽃가루에서 잉태되는 생명의 순환구조를 조형화하고 그 과정을 무정형의 사운드로 은유한 작품이다. 선반(旋盤) 작업을 통해 수십 개의 알루미늄이 꽃가루관 형태로 연마되어 있고, 각 관의 입구에는 꽃가루를 상징하는 수십 개의 마이크로스피커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꽃가루관을 지탱하는 원형판 속에는 와이어링 보드 및 DTMF 발생기가 장착되어 이에 따라 임의의 사운드가 발생하게 된다. 이때 사운드는 마주한 오브제에서 동시에 발현되지만 청각의 시각화를 거치는 통감각적 연상작용은 서로 다르다. 마치 수술과 암술의 결합을 상징하듯 한쪽 <sowing>에서는 무언가를 발산하는 뉘앙스의 사운드가, 맞은편 <gathering>에서는 수렴하는 뉘앙스의 사운드가 얽혀 전체적으로 무언가 주고 받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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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Silent Pollen – sowing, Silent Pollen – gathering SIZE: 225(width)x60(height)x43(depth)cm, MEDIUM: aluminium, microspeaker, DTMF generator

이처럼, 고집스러우리만치 오브제의 물성과 조형성에 천착하는 김병호의 작품이 적확하게 미디어작업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사운드의 조력이 크다. 조형언어는 공간을 점유하며 시간 속에서 지속되지만, 청각언어는 공간을 점유하지도 또 시간 속에 남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발현되는 순간에만 존재할 뿐, 궁극에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김병호는 이런 청각언어, 즉 사운드를 통해 비(非)물질성을 획득한다. 적어도 현재까지 그의 작업에서 사운드는 미디어아트의 속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요인 중 하나며, <Assembled Fantasy>(2008)는 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오브제 작업이다. 총 무게가 60여kg에 달할 정도로 육중한 이 작품의 둥근 몸통에는 23kg의 납이 내장되어 몸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기다란 원형 관(管) 형태 속에 스피커, 파워앰프, 오실레이터 및 멀티모드필터 모듈 등의 3단 구조가 디자인되어 컴퓨터보드 프로세싱에 따라 작동한다. 사운드를 변환하는 앞 3마디(멀티모드필터 부분)와 소리를 생산하는 뒤의 3마디(오실레이터 부분)를 각 마디 별로 조율해서 다양한 진폭의 사운드를 생성할 수 있으며, 더불어 약 3인치 크기의 스피커가 중, 저, 고음을 두루 연출하도록 모델링되어 있다. 이 작품은 특히 관람자의 직접적인 사운드 퍼포먼스를 요한다는 점에서 그의 여타 작품들에 비해 인터랙티브 속성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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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Assembled Fantasy, SIZE:111(width)x25(height)x32(depth)cm MEDIUM: steel, aluminium, stainless steel, speaker, power amplifier, oscillator & multi mode filter module

그런데 미디어아트의 본질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강조하는 김병호 작품에서의 인터랙션은 그리 용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테크놀로지 기반의 미디어는 본래 폭력적인 속성을 지녀서 약간의 힘만 가해도 그 임팩트가 위압적일 수 있다. 가령 모더니즘시대에 미래주의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계음을 비롯한 온갖 소음을 기술혁신에 상응하는 진정한 음악으로 간주하고 이의 적극적인 향유를 유도했다. 그 결과로 현대음악의 지평이 확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청각 형식을 강요하는 역작용도 초래했다. 김병호가 오브제의 조형성 못지 않게 사운드의 조율과정을 놓치지 않는 것도 이런 견지와 맞닿는다. 앞서 언급한 <Silent Pollen sowing, gathering> 시리즈는 관람자가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서는 사운드를 쉽게 지각하지 못할 만큼 음량효과를 극도로 절제했으며, <Assembled Fantasy>도 듣는 이를 놀라게 할 정도의 굉음이 가능하지만 이 역시 연출자(관람자)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수용자로 하여금 시각이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하는 반면 청각은 직접적으로 침투함으로써 효과가 더 강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의 미덕인 인터랙티브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과 노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인터랙션을 촉발하기 위한 시스템이 오히려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하는 등, 하이-인터랙티브 작품일수록 조작성의 딜레마에 갇히기 쉽다. 급진적인 미디어이론가 볼츠(N. Boltz)는 수동적인 수용미디어를 능동적인 참여미디어로 대체하리라는 전망은 이상주의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꼬집으면서, 이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미디어 트레이닝에 달려있다고 규정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점에서 김병호는 즉각적이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대신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택했다. 그리고 은폐된 강제를 걸러낸, 자율적이고 유연한 피드백을 시도한다. 그가 고수하는 오브제의 조형성은 사운드 같은 비(非)물성의 즉각적인 인터랙션에 다소 더딘 관람자를 배려한 장치다. 그에게 미디어는 도구며, 새로운 조형언어를 모색하는 것은 도구를 개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김병호의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전혜현(예술학.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