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NOW JUMP! 그림자를 넘어, 고정과 정체를 넘어_exhibition review

aliceon 2008. 11. 20. 20:53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한국에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미술계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할 그는 거장이다. 그의 작품세계 뿐 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의 활동 역시 그가 위대한 작가임을 인정케 해주며 그 후광의 조도를 더더욱 높여준다. 플럭서스적인 그의 행동과 가치관은 사회와 대중들에게 '기행'이라는 모습으로 다가왔고 전문가들의 인정과 그런 인상적인 접점을 통해 이해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지도는 폭넓고 강하게 각인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이름이 붙은 기관. 이곳은 그 출생부터가 백남준 본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백남준 스스로가 소망하던 공간이었고 스스로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칭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프로젝트였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백남준은 그의 사후에도 백남준 아트 센터에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안타깝게도 유족과 문화재단 간의 유작에 대한 집행권 문제로 인한 분쟁은 또 다른 방법으로 그의 존재를 사회에 강하게 어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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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하에서 '백남준 아트 센터'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또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인가. 그 시도는 이 공간이 내 놓은 첫 행사 'NOW JUMP'에서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행사의 이름 NOW JUMP는 백남준 고인 스스로가 이솝 우화의 로도스 섬 이야기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한껏 뻐겨댄다. 그는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적에 자신의 키의 몇 배를 넘게 뛰어오르곤 했다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한번 뛰어 봐라!" NOW JUMP는 이솝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또한 단지 멈추어 있는, 관념뿐이 아닌,  '실행'이라는 실천과 나아감을 표명하는 '행위'임을 표방하고 있다. 행사는 '그'라는 거인의 이름에 짓눌려지지 않고 스스로의 이름 JUMP 답게 유작의 나열 너머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즉 JUMP는 백남준이라는 존재 스스로의 거대한 그림자로부터의 도약과 탈출로, 그가 추구했던 '한계와 기존관념'으로부터의 탈출과 저항으로, 또한 물리적 힘에 대한 벗어남의 모습으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고 이 전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와 그 목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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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ion 3가 위치한 신갈 고등학교 체육관. 상상했던 것보다 방대한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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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ion 3 전시장 내부 모습.

NOW JUMP는 총 5개의 station을 포괄하는 거대 행사로 구성되었다. station 1은 백남준 스스로의 작업과 동시대 그와 친분을 가졌던 친구들, 동료들, 그와 연관이 있는 여러 작가들에 관한 기록과 작품들로 구성되어 그의 자취를 보여준다. station 2의 경우 하나의 now로서 백남준이 행했던 여러 행위예술들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퍼포먼스와 공연의 모습들을 관객들에게 직접 건내고 있다. 시각예술과 공연의 미묘한 경계들이라 표현한 기획의도에서 드러나듯 고정성을 넘어 작업을 전달하고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안타깝게 본인은 시간을 놓쳐 이 부분을 건너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치되어 있던 작업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러한 모습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백남준 아트 센터 근처의 신갈 고등학교와 지인 아트센터에서 진행되는 station 3에서는 단지 백남준 혹은 미디어 아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장르와 맥락의 작품들이 선보여진다. 기획의도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하면서 백남준으로부터 시작한 여정이 미래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맥락을 지닌다고 설명하고 있다. station 4와 5는 백남준 아트센터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워크샵과 심포지엄, 저널로 구성되며 또한 고 백남준이 강조했던 새로운 싹, 젊은 예술가 개인 혹은 그룹을 발굴해 예술상을 수여한다는 계획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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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ion 1 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TV정원>일 것이다. 장방형의 전시공간을 메우고 있는 난데없는 숲. 그리고 울창한 식물 가운데 스스로 빛을 내며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TV수상기들. 장소와 동떨어진 녹색의 과도한 향연과 그런 강렬함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3채널의 영상들. 빌 비올라가 학생시절 어시스턴트로서 설치하며 서정적으로 회고했던 그 때의 정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화합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대립하는 듯한 자연과 인공. 그는 대중매체의 대명사이자 대중매체 자체였던 TV를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했다.

아트센터 2층에서 전개되는 station 2의 작업들 역시 그 무게감과 감정의 강도가 그에 못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했던 경험을 제공했던 것은 료지 이케다의 <스펙트라 II>였다. 시각을 제한함으로써 얼마나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시각적 표현과 음향, 그리고 감상자 스스로의 신체와 행동을 통해 얼마나 강렬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멋진 작업이었고 멋진 경험이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직접 체험하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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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벨츠의 <베이컨의 미완성>로 들뢰즈에 의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회화작가로 재발견된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 작업들을 영상작업으로 다시금 읽어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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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던 하위도 판 더르 베르버의 작품 <넘버나인, 내가 지구 반대 방향으로 돌았던 날>. 그는 정확한 북극점에 위치해 제목 그래로 24시간동안 지구의 반대 방향으로 도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6초에 한번씩 촬영해 총 9분의 영상을 만들었다. 총 14,400컷의 촬영, 그리고 9분으로의 응축. 배경에서 들려오는 피아노곡. 어느하나 의미를 강렬히 해주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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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데장주의 <아이들 놀이>. 아이들을 통해 미술사에 기록된 거장들의 작업을 다시 읽어낸 것으로 아이들을 통해 놀이로서 읽히고 표현되는 미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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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웠던 점은 백남준의 이름 아래 스스로 얽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선의 배치나 선택되어 보여진 작업들 모두 백남준에 한정되거나 혹은 백남준의 의미에 눈에 띄게 고정되어 있지 않은, 마치 낯선 미로 속을 배회하고 있는 느낌이 들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의 거대함에 눌리지 않으려는 우려와 고정된 의미 없이 부유하며 사회 혹은 그 시간의 맥락에 의해 변화하는 의미를 지닌 현대 미술의 양태를 보여주고, 가볍지않게 준비된 자료의 라인과 도우미들을 통해  작품에 대한 '전망'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런 유도는 말 그대로 부유하다 끝날 수 있다는 불안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새롭고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가지 우려되는 점은 이렇게 야심차고 희망찬 미래와 거대 계획을 유지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과 뚝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점이다. 이것은 비단 센터 스스로의 문제 뿐 만 아니라 센터를 접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과 사회 스스로에게 던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설립 이전부터 지자체들간의 갈등, 설계와 공모중 벌어진 번복과 재수렴, 기관이름을 둘러싼 갈등 등 여러가지 문제로 시끄러웠고 지금도 관련 단체들간의 목소리로 혼란스럽다고 하는 데다가 몇몇 언론에서는 경제성의 문제를 걸고 넘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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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문제는 미리걱정으로 넘겨버리고, 단지 전시장으로서의 공간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결과물과 새로운 시각이 부딪치며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3일 장터처럼 시끄럽고 활기차기까지 한 예술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제된 미술관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항상 'NOW'로서의 최접경의 장소가,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까지 주목할 수 있는 덩치 큰  공적인 장소가 존재했으면 하는 것은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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