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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예술의 미학적 논점:상호작용part II _김진엽(홍익대 교수, 미학)_column

알 수 없는 사용자 2005. 4. 1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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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엽 (홍대 예술학과 교수, 미학)


3.

        위와 같은 사례들을 참고하였을 때,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감상에서 육체의 참여가 증가된다는 점이다.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조이스틱을 조작하거나 터치 스크린을 만지는 형태로부터 손을 흔들거나 몸을 움직이는 형태를 거쳐 자전거를 타거나 바벨을 밀고 당기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육체적 참여가 감상에서 이루어진다. 예전의 경우에, 미술관의 작품에 놓인 대표적인 수식어는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이었다. 감상자들은 몸동작은 물론이거니와 말소리, 심지어는 숨소리조차 줄이며 작품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에서는 작품을 만지거나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행위가 감상을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두 번째 특징은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감상자와 다른 감상자 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작품과 감상자의 상호작용은 첫 번째의 특징이나 세 번째 특징에서도 쉽게 드러나므로, 여기서는 감상자와 다른 감상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보자. 제프리 쇼의 <The Distributed Legible City>에서는 여러 감상자들이 자전거를 타며 스크린 상에서 만나고 스피커 폰을 통해 대화한다. Sommerer Mignonneau의 작품에서 감상자들은 손짓과 몸짓 등을 통해 함께 생명체를 만들거나 또는 각자 생명체를 만들어 상호 경쟁시킨다. 그리고 Levin <Remark & Hidden Worlds>에서는 감상자들이 음성언어 를 3차원적으로 변환시킨 이미지를 통해 서로 대화한다.

        세 번째 특징은 감상자가 작품의 생성과 전개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대부분은 감상자가 일정한 작용을 가함으로써 작품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작된 작품도 감상자의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 경우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The Legible City> <Place- Ruhr>와 같은 Jeffrey Shaw의 작품들에서, 감상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탐사하는 지역의 순서나 경로가 상이하게 전개된다. Sommerer Mignonneau의 작품에서도, 감상자가 어떤 몸짓, 손짓, 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유기체가 성장하는 모습의 전개가 달라진다. Hershman <Lorna>에서도 감상자가 여성의 어떤 신체 부위를 만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이러한 현상은 Dove Levin의 작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양민하의 작품에서도 웹상에서 마우스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작품의 전개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경우에는 작품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참여에 따라 상이하게 변한다. 그리고, 모든 감상자에게 동일한 하나의 완성된 작품 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감상자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예전의 전통적 작품의 경우에는 대체로 하나의 판본(version)으로 존재하는 작품이 감상자를 감동시키며 감상자의 심리적 변화를 낳았다면,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경우에는 작품이 감상자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감상자가 작품을 물리적으로 변화시키며 다양한 판본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작품의 물리적 변화는 다시 감상자의 심리적 변화에 영향을 끼치고, 그 심리적 변화는 다시 작품의 물리적 변화에 영향을 끼치며, 상호작용의 순환을 형성한다.13)  

        네번째 특징은 시간성의 증가와 서사성의 중시가 점차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에서는 작품과 감상자의 상호작용에 따라 작품이 전개되고 진행되므로 일정한 시간성을 지니게 된다. 일정한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작품 형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라는 형식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서사성이 필요하다. , 어느 정도의 내용적 줄거리가 필요하다.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태동기에는 디지탈 기술의 신기함과 놀라움만으로도 시간성을 충족시킬 수 있지 만, 감상자들은 점차 기술적으로만 충족되는 시간성에 식상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시간예술이 그러하듯이 서사적 내용이 여러 모로 실험되고 개발될 가능성이 높다. Toni Dove <Artificial Changelings> <Spectropia>에서 이러한 경향의 단초가 이미 발견되고 있다. Dove의 작품의 경우에는 감상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다양한 서사적 내용의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서사적 내용에도 상호작용성이 개입할 경우 하이퍼 텍스트적 서사적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 창작자는 더 많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따라서,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경우에 창작자는 예술가+디지탈 공학도+인문학도를 겸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요구가 무리라면 세 분야의 또는 다양한 분야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의 위와 같은 특징들은 상당 부분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육체에 대한 강조를 넘어서 열광의 징후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첫 번째 특징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연관을 헤아릴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인 감상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도 자아에 대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견해와 연관하여 살펴볼 수 있다.  모더니즘이 개인의 독립된 고유한 자아를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른 자아들과의 연관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하는 사회적 자아를 강조한다. 자아를 감상자로 대체할 경우, 감상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왜 포스트모더니즘적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감상자가 작품의 생성과 전개에 기여한다는 세 번째 특징도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연관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특징인 시간성의 증가와 서사성의 중시도 모더니즘이 공간예술로서의 미술의 고유함과 형식적 요소를 강조했다는 점과 대비된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이 지닌 특징들은 자체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기보다는 여타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도 잠재 또는 돌출되어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미니멀 아트의 경우에도 위의 특징들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14)  그리고 디지탈 예술을 뒤샹 류의 다다, 행위 예술, 해프닝, 비디오 아트 등의 발전선상 에서 파악하며 한 무리로 묶는 경우가 있는데,15) 이러한 묶음의 바탕에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이 공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넓게는 디지탈 예술, 좁게는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계보의 전개선상에 있는,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적 특징을 가장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절정에 근접해 있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들을 지니는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은 새로운 예술현상으로서 어떤 의의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하나의 주류적 현상이나 사조에 더하여 나름의 의의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인가?  현상에 대한 열광에서 벗어나 던지는 이러한 질문은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 자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미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기 전에, 다음 장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과 대비되는 모더니즘 예술의 의의와 가치를 먼저 살펴보자.

 

4.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미학적 용어는 미적 무관심성(aesthetic disinterestedness) 또는 미적 관조(aesthetic contemplation)였다.

        미적 무관심성은 영국 근대의 경험론자들을 거쳐 칸트에 의해 확립된 용어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 주관적 상태의 특징들 중 하나가 무관심성이라는 것이 이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베르사이유 궁전을 바라보 고 있다고 가정하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매우 허기진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본능적 관심에 휩싸여 베르사이유 궁전의 아름다 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바라보는 우리의 주관적 상태가 윤리적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백성의 고혈을 그처럼 무용한 것에 낭비하는 왕후들의 허영”에 분노를 느끼지 아름다움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16)  그 밖에도, 우리의 주관적 상태가 경제적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베르사이유 궁전 덕분으로 생기는 프랑스의 관광 수입에 부러움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베르사이유 궁전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두고 우리의 주관적 상태가 어떤 관심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베르사이유 궁전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낄 때의 우리의 주관적 상태는 정치적, 윤리적, 경제적, 본능적 관심 등 일체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무관심성의 상태라는 것이다.17)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미적 무관심성을 계승하여 미적 관조라는 용어를 체계화시킨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미적 관조는 상당히 높은 위치를 점유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 세상의 본질을 의지(will)라고 본다. 의지는 스스로를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맹목적 충동(blind impulse)”이다.18)  의지는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못하고 현상 세계 속에서 인과율을 통해 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의 각 개체에게 표상된다. , 의지는 자신의 맹목적 충동을 현상 세계의 각 개체 속에서 인과율을 통해 만족시킨다.19)  그러나 인과율을 통한 만족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일 뿐이다.20)  하나의 충동이 만족되면 곧 새로운 충동이 생긴다. 충동은 끝없이 계속된다.  맹목적 충동의 주체인 의지는 “회전하는 수레바퀴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밑 빠진 독에 끝없이 물을 퍼 넣는 것과 같은” 영원한 갈망이다.21)  따라서, 맹목적 충동을 인과율을 통해 만족시키려 할 경우 우리는 맹목적 충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결핍과 괴로움에 시달린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맹목적 충동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들 중의 하나가 미적 관조이다. 미적 관조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22)  하나는 대상을 인과율에서 벗어나 대상 그 자체로 보게끔 한다. 과학적 관찰이나 수학적 추론이 대상을 인과율 을 통해 파악하는 일이라면, 미적 관조는 인과율을 통해 표상되기 이전의 대상을 직관하는 일이다.23)  , 미적 관조는 대상의 이데아를 직관케 한다. 다른 하나는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를 인과율에서 벗어나게끔 해준다. 미적 관조를 통해 주체는 주체 자신 의 관심, 충동, 목적을 포기하고 순수한 직관적 주체가 된다.24)

        이렇듯, 미적 관조는 대상과 주체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을 통해, 대상과 주체 모두가 맹목적 충동을 일시적이고 표면적으로 만족시키려는 인과율에서 벗어나 대상은 대상의 이데아로, 주체는 순수한 주체로 변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상의 이데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우리의 주체는 대상의 이데아를 비추는 거울이 되며, 대상과 주체의 구분은 사라진다.25) 

        지금까지 살펴본 칸트의 미적 무관심성이나 쇼펜하우어의 미적 관조는 근대의 미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근대의 예술 현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형식주의, 추상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 등 모더니즘 예술의 주요한 징표들은 미적 무관심성이나 미적 관조라는 철학적 논의에 대한 예술적 화답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이나 충동을 환기시키는 내용보다는 그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형식에 대한 강조, 유의미한 형식을 강조하는 추상 예술, 다른 영역에 종속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 예술 자신을 위한 예술 등, 이른바 모더니즘 예술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현상들의 저변에는 미적 무관심성이나 미적 관조라는 미학적 논점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적 무관심성이나 미적 관조가 지니는 의의나 가치는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적 관조나 미적 무관심성은 서양 근대 문화의 소산이다. 서양 근대의 중심에는 합리성이 놓여있다. 26)  각 사회의 영역이 합리화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인과율에 바탕을 둔 과학적 합리성과 효율성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합리성은 과학 및 경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 곳곳에 깊숙이 침투하여, 서양 근대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합리성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세상을 계몽시켰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세상을 “지독히 계산된 수단-목적의 합리성”이라는 얼룩으로 황폐화시켰다.27)  세상을 계산된 용도와 기능에 따라 재단하려는 폭압적 실용주의가 확산된다. 그러한 폭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 때, 미적 관조나 미적 무관심성이라는 근대 미학의 개념은 그러한 탈출의 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계산으로부터 벗어난 관조와, 이익으로부터 벗어난 무관심성은 근대적 합리화의 부정적 측면을 치유하는 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관조와 무관심성에 근거한 미와 예술은 자유로이 유희하는 미적 왕국의 건립과 예술을 위한 예술의 구축을 통해 우리에게 휴식과 해방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 쇼펜하우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니체의 말을 일부 빌리자면, 인과율과 효율성 이라는 숨막히는 이 세상의 “진리로 인해 절멸치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필요로 한다.28)  따라서, 미적 관조와 무관심성은 미와 예술을 “가치 없이 무용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 가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격상시킨다.29)

 

5.

 

        이제, 3장 후반부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미적 무관심성이나 미적 관조에 기반한 모더니즘 예술이 위에서 언급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을 지닌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은 어떤 의의와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상호작용성이 미적 무관심성이나 미적 관조를 대체할만한 어떤 의의와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인과율과 효율성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타인, 사회, 세상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우리의 삶을 긴장과 분투로 몰아간다.  근대의 미적 왕국은 그러한 긴장과 분투로부터의 해방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미적 왕국의 맹주였던 예술마저 우리를 상호작용의 긴장과 분투로 오늘날 몰아넣는다면, 우리는 평안과 안식의 중요한 공간을 박탈당하는 셈이 된다. 실제로, 디지탈 예술의 전시 공간은 더 이상 관조의 공간이 아닌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인 경우가 많다. 마우스나 조이스틱을 조작하기 위해 길게 선 줄,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작품을 찾기 위한 눈치 작전, 센서 앞에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몸동작, 때론 고장난 센서 앞에서의 허망한 몸짓, 만져서는 안되는 상호작용적 작품의 일부를 만져 듣게 되는 관리인으로부터의 따가운 경고, 아이들과의 경쟁, 디지탈 장치의 조작에 대한 두려움, 화면의 눈부심, 삼차원적 동영상이 유발하는 어지러움, 소음 등등. 평안과 안식을 박탈하는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디지탈 예술의 상호작용성이 옹호되려면, 발전적 제안들을 통해 새로운 의의와 가치를 구현해 낼 필요가 있다. 발전적 제안의 한 가지를 미적 무관심성이나 미적 관조를 비판하면서 상호작용성을 중시하였던 존 듀이를 통해 모색해 보자.

        듀이에 따르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 우리는 세상을 경험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상을 경험한다고 할 때, 그 경험은 이미 주어져 있고 결정되어 있는 세상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세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세상을 부단히 재구성해나간다.  경험이란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부분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얻은 결과물이다.30)  상호작용이 “외적 방해”나 “내적 무기력”으로 인해 분열과 충돌을 낳을 경우, 유기체와 세상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이 때의 경험은 “산만”하고 “분산”된 경험이다.31)  이러한 산만하고 분산된 경험이 오래 지속될 경우 유기체는 근근히 생존하거나 또는 죽는다.  그런 간극을 메우며 상호작용이 통일을 이루어낼 때 유기체는 발전하고 성장한다. 이 때에 얻게 되는 경험은 산만하고 분산된 경험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에 가깝다.32)  그렇다면, 하나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첫째, 하나의 경험 속에서는 그 경험을 구성하는 연속적인 부분들이 이음새나 간극 없이 하나의 전체 속으로 흘러들어야 한다. 둘째, 하나의 경험 속에서는 그 경험을 구성하는 연속적인 부분들 각각의 자기 정체성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33)  위의 두 가지 조건을 결합시켜 보면, 하나의 경험이 산출되기 위해서는 경험의 각 부분들이 그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 원만하게 전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점이 도출된다. 하나의 경험이 산출되기 위해서는 부분들은 전체 속에 녹아들고 전체는 부분들의 개성을 침해하지 않는 상태를 이루어 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때 경험은 극치를 이루어내며 완성된다. 극치를 이루어낸 완성된 경험이 바로 하나의 경험 이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경험하는 대상의 가장 통합적인 성질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한다.34)  듀이는 이러한 하나의 경험을 미적 경험이라고 간주한다. 다소 신비적인 듯한 이러한 경험은 앞서 언급했듯 현실적인 산만함과 분산 때문에 일상적인 삶 속에 서는 구현되기가 어렵고, 예술 작품 속에서 가장 잘 구현될 수가 있다. 예술 작품 속에서, 상이한 행동들, 사건들 등은 그 자신들의 고유한 특징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전체적 통일성 속으로 용해되고 융합됨으로써 하나의 경험, 즉 미적 경험을 산출시킨다.  그렇지만, 미적 경험은 종결된 경험이 아니다. 유기체 및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상호작용이 일어나며, 따라서 새로운 긴장 과 충돌이 빚어지며, 또 새로운 통일이 추구된다. 부단한 변화를 통해 끝없는 긴장과 충돌이 이어지는 세상에도 미적 경험은 없지만, 고정된 통일을 통해 끝없는 화평이 이어지는 세상에도 미적 경험은 없다.35)

        모더니즘이 예술을 세상으로부터 절연시켜 신성화하였다면, 듀이는 예술을 세속화시켰다. 그러나, 듀이에게서, 예술의 세속화가 예술이 세상의 질서에 편입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듀이는 예술을 세상에 보내 세상을 미화시키려 하였다. 듀이에게도 과학적 인과율과 자본주의적 효율성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억압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대한 관조나 무관심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세상의 황폐화를 방기할 뿐이다. 세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활개 칠수록, 세상은 아름다움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듀이의 미학은 구원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경험하며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적 경험은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파편화되고 단절되는 일상의 수많은 경험들은 이 세상 속에서 미적 경험으로 재구성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술은 미적 경험의 이상적 구현체이다. 따라서, “왜 램프나 집은 예술적 대상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예술적 대상이어서는 안 되는가”36) 라는 푸코의
미학은 듀이 속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더욱 넓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듀이의 이러한 미학은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이 지닐 수 있는 의의와 가치에 대하여 시사점을 준다.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은 그 어떤 예술보다 듀이의 미학을 잘 구현해 낼 수 있다. 먼저, 서사성에 바탕을 두어, 우리가 세상과 조우하는 다양한 상황 을 연출할 수 있다. 감상자는 연출된 상황에 정신적 참여뿐만 아니라 육체적 참여를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여러 경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긴장과 화해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경험을 나름대로 지향해 나간다. 서사성, 육체의 참여, 상호작용성 등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감상자는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을 통해 듀이가 말한 식의 미적 경험을 그 어떤 종류의 예술작품보다 더 생생하게 얻게 될 수 있다.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은 현실의 삶에서 달성해 나가야 하는 하나의 경험, 즉 미적 경험을 미리 연습하고 실험해보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 속에서의 그러한 연습과 실험은 현실의 삶에서 실제로 미적 경험을 성취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6.

 

        지금까지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을 시각예술의 영역을 중심으로 살펴본 후, 그 예술이 지닌 특징과 가치에 대하여 모색해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모색은 가능한 하나의 모색일 뿐 다양한 모색이 가능하다. 특히, 새로운 매체에 걸 맞는 새로운 이론을 마련하여 모색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디지탈 예술을 담을 새로운 이론이 마련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디지탈 예술의 미래를 생산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낡은 부대로 감싸진 이 논문은 디지탈 예술에 대한 아날로그적 비가(悲歌) 또는 연가(^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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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Aesthetic Issue of Digital Art: Interactivity

Jinyup Kim

 

        The aim of this paper is to survey the interactivity of digital art.  Famous interactive digital artists are Jeffrey Shaw, Christa Sommerer & Laurent Mignonneau, Lynn Hershman, Toni Dove, Golan Levin, Minha Yang, Kwangjun Ahn, and so on.  The main features of the interactive digital art are the bodily participation of the spectator, the interactivity of the spectator with other spectators as well as with the work, the influence of the spectator upon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the work, the increase of the temporal, and the importance of the narrativity.  These mains features are also those of postmodernism.  While the worth of modernism can be found in the aesthetics of Kant and Schopenhauer, the worth of interactive digital art can be mentioned with the aesthetics of John Dewey.

 

key word: digital art, interactivity, postmodernism, Dewey

 

 


1) 이 논문은 2002학년도 홍익대학교 교내연구비에 의하여 지원되었음.



13) 상호작용적 디지탈 예술 작품을 제작할 경우, 작가는 감상자의 역할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14) 김진엽, “미니멀리즘” (미학 32, 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15) 이러한 경우를 드러내는 책으로는 프랑크 포빼르, 전자시대의 예술, 박숙영 역 (서울: 예경, 1999) Michael Rush, New Media in Late 20th-Century Art (London: Thames & Hudson, 1999)를 들 수 있다.

 

16)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이석윤 역 (서울: 박영사, 1984), p. 59.

 

17) Ibid., pp. 58-67.

 

18)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곽복록 역 (서울: 을유문화사, 1994), p. 45.  논의를 위해서 앞의 한글 번역판 및 영문 번역판인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tr. E. F. J. Payne (New York: Dover, 1969)를 참조하였다.

 

19) 쇼펜하우어의 인과율은 과학적 인과율, 수학적 인과율, 논리적 인과율, 행위적 인과율이라는 네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과율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그의 On the Fourthfold Root of the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tr. E. F. J. Payne (Chicago: Open Court, 1974)를 참조하기 바란다.  아울러, Brayan Magee, 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pp. 29-31도 도움이 된다.

 

20)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p. 254.

 

21) Ibid., p. 255.

 

22) Ibid., p. 254.

 

23) Ibid., p. 243.

 

24) Ibid., p. 243.

 

25) Ibid., p. 235.  이와 연관하여, 쇼펜하우어는 바이런의 시, 우파니샤드의 잠언, 그리고 햄릿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Ibid., p. 238 p. 267)

 

“산, 파도, 하늘도 나의 일부가 아닐까?

또한 내 영혼의 일부가 아닐까?

내가 그들의 일부이듯이.

 

“이들 모든 피조물은 모두 나인 것이다.  그리고 나 말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의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금도 내색이 없고,

운명의 신이 희롱하거나 은혜를 주거나

다같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26)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8), p. 16.

 

27) 리처드 슈스터만, 프라그마티스트 미학, 김광명, 김진엽 공역 (서울: 예전사, 2002), p. 11.

 

28) Friedrich Nietzsche, The Will to Power, tr. W.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New York: Vintage, 1968), p. 435. 

 

29) 슈스터만, 프라그마티스트 미학, p. 11.

 

30) John Dewey, Art as Experience (Carbondale: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1989), p. 50.

 

31) Ibid., p. 42.

 

32) Ibid., p. 19-20.

 

33) 첫째, 둘째에 대해서는 Ibid., p. 43을 참고하기 바란다.

 

34) 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Thomas Alexander, John Dewey's Theory of Art, Experience and Nature: The Horizons of Feeling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7), pp. 187-213을 참고하기 바란다.

 

35) John Dewey, Art as Experience, pp. 22-23.

 

36) Michel Foucault, Michel Foucault: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ed. P. Rainbow (London: Penguin, 1997), p.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