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란 때론 우리가 전혀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던 존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마크 커츠의 『소리를 잡아라』또한, 앎의 이러한 속성을 체감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앎의 대상은 소리의 존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음성 매체들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 기술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뤄진 이론적 도해의 풍경을 선보인다. ‘녹음의 사회문화사’라고 요약할 수 있는 본 책에서 저자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며, 기술과 이용자 간의 상호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녹음이 단순히 소리를 담는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녹음은 소리를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소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하나의 예술적 산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포노그래프 효과’라고 소개된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축음기의 출현, 디스크와 예술가들의 생산 양식 변화, DJ 배틀이 가져다준 문화적 변혁, 디지털 샘플링 예술이 갖고 있는 정치와 윤리 , 사이버 공간에서의 음악 감상이 몰고 온 감각과 자본, 윤리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녹음을 통해 음악가들은 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린 ‘담긴 소리’를 자유롭게 들으면서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녹음을 통해 소리는 진정 ‘사물’이 된 것이다. 소리가 사물이 되는 순간, 소리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과 윤리의 만남을 도모한다. 그것은 자본의 매개적 기능 때문이다. 물론 공연에서 직접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는 것은 감각 - 자본 - 윤리의 관계가 비교적 투명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입증하지만, 녹음을 통해 소리를 저장할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서, mp3는 공개되어 있는 ‘어둠 시장’의 교환물로서 이는 곧 청각의 권리가 양심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한 것이 본 책의 8장 : 사이버 공간에서 음악 감상하기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갈등 구도를 진부하게 느낄 수 있는 현대 문화인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귀한 소리는, 축음기가 출현하면서 나타난 가정 내 생활 방식의 변화,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유명 음악가들이 레코드 길이에 맞춰 자신의 곡 분량을 정하고 작곡했던 이야기, 오늘날 대중음악 생산자들이 샘플링을 통해 이미 존재했던 과거의 ‘음- 조각’들을 변용, 접합하는 데서 부딪히는 윤리적 논란들일 것이다.
녹음이 가능해진 것이 신기한 시대를 지나, 우리는 이러한 신기함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져 준 앎의 코스를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지금 내가 글을 쓰며 듣고 있는 권순헌 연주의 <슈만 :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와 팻보이 슬림(Fatboy slim)의 <Praise you>를 어떻게 ‘연달아’ 들을 수 있었을까라는 ‘천진난만한(?) 감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1) (물론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 감탄의 세기가 기립박수를 칠 정도는 아니다.^^ 암튼, 이 책이 던진 ‘녹음’이란 개념은 예술을 통해 묶인 우리들의 지식과 감성에 어떤 일깨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책 제목 그대로 소리가 인간의 그물망 안에 들어옴으로써, 소리가 직조해내는 그물망의 색과 형태는 보다 다채로워 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채로움 속에서, 소리의 사물화가 건네는 변혁의 기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감성의 분할을 요청한다. 우린 이 요청에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이미 반응하고 있으며, 그 반응의 민감함을 보다 잘 인식하는 세계의 예술가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창조적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생각난다. 상우가 담고 있던 그 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