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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스토리텔링_이인화 외_황금가지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10. 09:20

2003년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책<디지털 스토리텔링>은 개별적인 영역에서 디지털 매체에 대해 연구해왔던 학자들이 이론적 합의의 필요성을 느끼고 2003년 대한민국 디지털 스토리텔링 학회를 창설하면서 그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디지털시대가 필요로 하는 스토리텔링의 개념을 설명함과 동시에 각각의 디지털매체가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활용해 왔고 또한 이 과정 속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발생했는지 기록하면서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1995년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제1회 디지털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이 개최된 이래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디지털 기술이 가능하게 한 인터랙티브(Interactive, 상호 작용성)에 집중되어 진행되어왔다. 서구의 연구자들은 과거 원시공동체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상호간 의견을 주고받는 인터랙티브를 통해 조직 운영에 필요한 합의를 이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공동체가 거대해지고 계급의 분화가 진행되면서 효율성이란 명목아래 상명하달(上命下達)의 명령체계가 수립되자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인터랙티브는 퇴색하게 된다. 그렇게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인터넷과 휴대용 통신기기 같은 디지털기술의 발달이 이런 잊혀졌던 인터랙티브를 다시금 부활시키자 연구진들은 그것의 기능에 환호하게 된다. 페스티벌의 로고를 캠프파이어로 정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의 학자들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확장과 매체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인터랙티브는 디지털 기술의 전부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지나치게 커뮤니케이션만을 강조하는 행위는 스토리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할 수 있어 그들 내에서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편집위원장인 이인화 교수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사람마다 견해가 달라 혼란스런 대답이 교차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디지털매체에 스토리를 집어넣으면 상호 작용성 때문에 자동적으로 재미가 생겨나고 감정이입과 몰입이 일어난다는 터무니없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 영역에서는 아직 어떤 것들이 지루하고 한심한 스토리이며 어떤 것이 스토리 밸류를 갖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인지에 대한 연구가 미비하다.” “우리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의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고 지금까지 나타난 다양한 실례를 통해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의 창작원리를 논의하고자 한다.” 라고 무르익지 않은 용어에 관한 오해의 배제와 함께 매체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왜곡될 위험에 처한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본질을 정립하고자 하는 출간 취지를 설명했다. 이후 간행된 책들의 제목이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디지털 에듀테인먼트 스토리텔링>,<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인 것처럼 한국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자들은 서구의 맹목적인 인터랙티브 추종을 경계하고 쇄신을 목표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다.


언뜻 생각해볼 때 이런 시각의 견지는 서구보다 10년 가까이 출발이 늦은 후발주자로서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03년의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많이 보급된 나라였으며 3200만 명의 휴대용 통신기기 가입자를 확보한 디지털 강국이었다. 2003년 당시 MMO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Game, 다중 접속 온라인게임)인 리니지(Lineage)의 실질 유저 수는 250만 명으로서 서구 최대 MMOG였던 에버퀘스트(Everquest)의 유저 수가 2005년에 이르러서야 150만 명에 이른 것과 비교해 본다면 2003년의 대한민국이 디지털 분야에서 타국에 비해 얼마나 진보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연구하는 이들은 표본의 수집에 있어 서구사회가 획득하지 못한 현상들을 관찰, 기록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듯 풍부한 자료와 배경을 바탕으로 씌여진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인터랙티브와 같은 디지털시대의 기술적 특징 외에도 시대의 발전에 따라 진화해온 스토리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디지털 매체의 특성에 맞는 스토리텔링을 탐구하고자 한다.


 1부 'What is digital storytelling' 에서는 이인화(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론) 고욱, 이정엽(디지털스토리텔링의 역사와 장르)의 글이 실려 스토리의 본질과 함께 서구에서 진행 중이던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와 반목되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개념을 설명한다. 책의 첫 장에 위치한 ‘스토리텔링 창작 론’같은 경우 의미를 가진 내용으로서 ‘스토리(Story)’의 본질과 이를 전달하는 담화로서 ‘텔링(Telling)’의 개념을 정리한다. 그리고 구비 전승되던 구술문학에서 문자의 발명으로 시작된 기록문학으로의 전환, 이후 영화와 결합하여 영상문학으로 계속된 진화를 거듭한 스토리텔링이 디지털시대를 맞아 연대기 순이며 횡(橫)적이고 선형적(線形的)이었던 기존의 구조에서 탈피하여 공간(空間) 중심적인 종(縱)적이고 비선형(非線型)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저자가 이런 공간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구현되는 장소로써 게임을 언급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역사와 장르’에서는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역사와 함께 스토리의 원형(原型)모티프(Motif)들이 디지털시대에 어떻게 구현되어야 효과적일지 탐구하고 연구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2부 ‘Entertainment storytelling’과 3부 ‘Information storytelling’ 에서는 컴퓨터 게임, 애니메이션, 디지털 영화, 브랜드 아이덴티티, 웹 뮤지엄 스토리텔링 같은 각각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에서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활용되었고 어떤 문제점들을 드러냈으며 또한 어떤 해결책들이 필요한지를 제시하고 있다.


책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대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디지털 시대를 맞아 스토리텔링의 생존법 정도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 실정에만 어울리는 가설이 아니며 디지털기술을 통해 빠르게 통합되어 가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이론이기도 하다. 2009년 현재 서구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시장은 책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예견했듯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같은 MMOG를 통해 스토리 중심으로 빠르게 개편되고 있다. 그리고 캐롤린 핸들러 밀러(Carolyn Handler Miller) 같은 서구의 연구가들 또한 인터랙티브에 대한 맹신에서 탈피하여 스토리텔링 중심의 콘텐츠 개발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발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6년이나 지났지만 이 책의 내용은 2009년 현재에도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책<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시대착오적이지 않고 활용 가능한 입문서로서 도움이 될 것이다.


  http://digital-story.net 디지털 스토리텔링 학회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역대 컨퍼런스 자료들을 참조할 수 있다.

 

글. 윤창호(영화 시나리오 작가, 전직 디지털 스토리텔링 학회 팀장, fureka@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