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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몽타주> 展을 관람하기 위해 사당역 근처에서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을 찾았다. 흥미로웠던 전시 제목 못지 않게 남서울분관과의 첫 만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건물에 대한 서울시립미술관의 설명을 인용해 본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 주재 벨기에 영사관이었고 원래 위치는 한옥 밀집 지역인 회현동이었지만 1905년 준공된 이후 재개발 사업으로 198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 복원되었고 이후 2004년 9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1900년대 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물은 외부뿐만 아니라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내부 공간 역시 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이 전시는 미술관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무료였기 때문에 티켓 부스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시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돈을 내지 않았다는 도취감과 전시장 입구의 육중한 철제문이 주는 무게감과 촉감 그리고 기존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전시장과 너무나도 친절한 전시장 스탭들이 주는 낯섦 등은 서로 뒤섞여 마치도 초현실주의 꼴라주처럼 느껴졌다. 전시 자체를 보기도 전에 나는 이미 ‘감각의 몽타주’를 경험했다. 더불어 영화의 몽타주 이론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 선구자였던 에이젠슈타인(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 1898 – 1948) 감독이 토목공학을 수학했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이 기인한 몽타주는 한층 더해졌다.

대부분의 현대미술 전시가 주로 작품의 주제나 출발점이 되는 소재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거나 혹은 작가의 유형학적 분류(국적, 성별, 나이, 지리적 범주 등)로 기획되곤 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형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내용과 형식으로 구분해서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형식은 그 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다른 표현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몽타주라는 형식은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 거기에 시각적 리듬과 심리적 감동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언어이다. <감각의 몽타주> 展은 영화 몽타주의 특성을 고찰해보고, 미술의 영역에서 이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전시의 목적으로 밝혔다.

안정주_breaking to bits_4채널 비디오, 2.1채널 사운드_ 2007

몽타주라는 작품의 구성 방식, 즉 형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몽타주의 태생이다. 몽타주를 위시하여 영화적인 것(The Cinematic)들이 일방적으로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아니다. 영화가 분절된 시간의 파편을 중첩(혹은 충돌)시켜 운동-이미지라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 것은 이미 몽타주 이전에 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매체의 본질이었다. 더불어 이 구성 양식은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미술, 철학, 과학 등 사회의 각각의 분야에서 논의되고 실험되어왔었다. 영화는 미분화된 개별성을 통일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대의 노력이자 충돌을 통해 기존의 시공간을 해체하려는 실험의 산물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러시아 구성주의와 큐비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1896 - 1954) 역시 다다이즘과 미래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결국 ‘몽타주’라는 어법의 탄생은 영화적 매체에서 결정되지만, 이 태도와 형식은 동시대에 미술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존재했었다. 이 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화적 의미의 몽타주를 직접적으로 대입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며, 전형적인 의미의 ‘시네마틱(The Cinematic)’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몽타주’라는 것은 이미지 조합, 충돌 그리고 배치라는 구성 방식과 이를 통해 의미가 적극적으로 구성된다는 태도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몽타주’는 전시 작품들에게서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태도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창작행위 혹은 형식에 의해 의미가 구성된다는 태도이다. 이는 의미는 예술가에 의해 그리고 이미지들간의 상호 관계에 의해 창조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정확히 영화의 몽타주적 태도와 동일한 것으로 사실주의 미학의 반대편에 있다. (영화에서는 바쟁(Andr Bazin, 1918 – 1958) 이 주창한 이 사실주의 미학은 의미는 이미 이미지에 내재하고 있다고 보는 태도로 편집보다는 롱테이크 롱샷(long take long shot), 딮 포커스(deep focus) 등의 촬영 방식이 강조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이미 사실주의 미학이나 전통적인 재현의 개념에서 자유롭다. 개별 예술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시공간 그리고 세계관은 작가의 섬세한 의도와 형식 그리고 매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제 개인은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작품은 세계의 반영(reflection)을 넘어 삶의 창조(recreation)의 영역으로 격상되었다.

권여현_Oedipus and sphinx_사진위에 유화_92x120cm_2006

두 번째는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인 혼종성이다. 몽타주라는 영화적 용어가 미술계에서 재조망 되게 된 중요한 계기는 바로 뉴미디어(New Media)의 등장이었다. 뉴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하나의 시공간 내에 이질적인 것들을 쉽게 덧붙이고 생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다의 꼴라주와 영화의 몽타주 등은 뉴미디어에 넘어오면서 더욱 간편하게 이용된다. 이러한 뉴미디어적 특성과 다다의 정신은 현대미술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선형적이지 않는 시공간, 이미지의 조합과 다른 현실인 가상현실 등 혼종성은 지금의 현재를 대변하는 단어이다. 혼종성은 기존의 절대적인 하나를 붕괴시키고 역사적인 시간을 평면화시키며 존재의 단일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와 같이 몽타주의 은유는 구성주의라는 모더니즘 태도와 혼종성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에 의미하면서 두 가지 운동은 상호 충돌한다. 혼종성은 분산의 충동으로 작동하며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로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 역시 동시에 존재한다.

권여현의 <Oedipus and sphinx>은 이질적인 매체를 사용하지만 하나의 주제와 화면으로 수렴한다. 김아영의 <독살된 스파이 미스터리 2006. 11. 1>과 전채강의 <오늘날의 사건 사고: 난파와 인파>는 각각 꼴라주 기법을 이용하면서 개별을 통해서 전체를 재조합하고 있다. 강영민의 작업에서도 파편화된 개별 요소들은 각각 구성과 해체의 운동을 반복하고 있다. 4개의 스크린으로 시선을 분할한 안정주의 <Breaking to Bits>는 사운드(비트)라는 중심축 위에 병렬 지어 놓여있다. 여러 채집된 화면을 하나의 화면에 중첩시켜 시점을 분할한 오영석의 <드라마 변주>와 시선의 방향성을 분산시키는 홍남기의 거대한 3채널 작업인 <Mr. Hong>은 생리적인 몽타주로 수렴이 강제된다. 마치 몽타주가 철학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은 일시적으로 합쳐지는 운동이 강제되며 이를 통해 의미는 생성된다. 서동욱의 회화와 영상 작품은 매체간의 서사 전달 방식의 파열을 이용하지만 결국 내러티브에 간헐적으로 수렴된다. 박준범의 <The Occupation>에서도 오영석의 <애욕전선>에서도 그리고 노재운의 <3 Stand in>에서도 파열과 충돌은 보는 이의 생리적, 심리적 몽타주를 통해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곤 한다. 

난다_딴스! 딴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9

이렇듯 분산의 충동과 수렴의 욕망은 상호 작용하고 있다.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묶으려는 주체의 심리적 혹은 생리적 작용은 해체되고 전체를 무너뜨리는 욕망과 함께하고 있다. 마치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 핵분열과 핵융합처럼 충돌과 융합은 창조적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몽타주의 은유일 것이다.

글. 성용희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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