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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TV, 살아있는 인간들의 사육제, 텔레비전과 동물원, 올리비에 라작_book review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7. 6. 15:50


이 책은 동물원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에서는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또는 상업적 목적으로 식민지의 여러 인종들을 전시하였던 동물원에 주목한다. 저자가 보기에 근대 동물원은 현실을 이동(tele)하여 재현(presence)하는 대규모 가상 세계 기획이다. 동물원 안에는 관람객들의 몰입을 위해서, 현실에 가깝게 모사한 (또는 아예 이식한) 새로운 원시 세계가 건조된다. 그 가상 세계 안의 원주민들은 - 마치 우리에 갇힌 호랑이가 야생의 호랑이를 연기하듯 - 자신의 고향에서 행동처럼 자연스러운 삶을 연극처럼 살았다. 이렇게 동물원은 살아있는 리얼리티 쇼 공간이었다.

우리가 낭만적으로 상상하는 동물원과 달리, 19세기와 20세기, 제국의 시대의 동물원은 단지 ‘동물’들을 사육하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와 자본이 볼거리를 이용해 식민의 논리와 환상을 보급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처음 지하철을 준공했을 때, 공장을 중심점으로 하여 한 쪽에는 노동자의 거주지를 다른 한쪽은 동물원과 놀이공원을 계획하였다. 자본과 권력은 도시를 구성하면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관리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 철저하게 ‘배치’하였다. 동물원의 역할은 노동자의 여가를 소비하는 표면적 공간을 넘어, 산업 제국주의의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서의 기능이었다.

스펙타클의 등장은 텔레비전의 발명으로부터 시작 된 것은 아니다. 주체를 구경꾼으로 만들어 시각적으로 ‘보는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경험. 그래서 쾌락과 만족을 자극하는 ‘볼 수 있는 주체의 탄생’은 영화관, 박람회, 백화점, 동물원 등 근대 소비 공간의 구경거리를 기획하며 이루어졌다. 바네사 슈와르츠(Vanessa R. Schwartz)의 ‘구경꾼의 탄생’(2006, 마티)에서 보듯, 대중은 감시에 대한 욕망과 관음의 욕망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관람객은 모순된 욕망의 존재이다. 오히려 텔레비전 기술의 발명은 보이는 주체를 만들었다. 동물원의 원주민이 약한 육체였다면, 텔레비전의 스타는 ‘보이는 것으로’ 권력을 갖는 강한 주체(celebrity, 스타)가 되었다. “리얼리티 TV”의 유행은 스타 중심에서 일반인으로 환원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이 책은 텔레비전에 관한 책이다. (만약 동물원과 제국 식민주의가 더욱 흥미롭다면, ‘동물원의 탄생’(지호, 2003)을 권한다.) 책의 2부 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재의 ‘리얼리티 TV'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제 리얼리티 쇼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어쩌면 방송의 윤리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예컨대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현실성이라는 언어로 생생한 사실성을 나타낸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이러한 찬사를 리얼리티 TV가 허구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리얼리티 TV에 대한 비판의 입장은 상투적이거나 단순한 수준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생활 침해와 같은 윤리적 접근, 관음증/노출증의 정신분석학적 접근 모두 리얼리티 TV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오히려 모호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저질 상업 방송이라는 취향에 의한 평가가 대중들에게는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 책의 저자, 프랑스 철학자 올리비에 라작(Olivier Razac)은 현재 ‘리얼리티 TV'라는 현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분석해내는 것은 19세기의 동물원과 21세기의 리얼리티 TV의 유사성을 통해 보는/보이는 주체들의 일관된 구조이다. 예컨대 리얼리티 TV의 무대는 카메라의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 표준화된 환경을 조성한다. 등장하는 일반인이라는 인물들은 카메라를 든 사나이들에게 ‘포획’되고 ‘조련’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연출은 미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기획자에 의해 ‘자기 역할’이 규정된다. 일반인은 표본이자 사례이기에, 일반적 사고를 대의한다고 가정한다. 리얼리티 TV의 나온 무명인들은 화면에 노출되면서, 부여된 삶과 자신의 삶을 통합하여, 새로운 스펙타클을 창출해낸다. 이는 예전 동물원과 유사한 방식인 것이다.

관객 역시 리얼리티 TV가 만드는 스펙타클 현실에 간접적으로나마 가담하게 된다. TV에 나오는 일반인은 관객에게는 좋든 싫든 대타자(The others)로 설정된다. TV에 나오는 일반인을 동일화하여 따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인은 하나의 척도로서 제기된다는 것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그 일반인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제시된 일반인을 하나의 표본으로서 삼고, 관객들은 자신들만의 분류체계를 설정해서, 자신과 비교를 통해 유형화시키고 공감하거나 차이점을 지적한다. 리얼리티 TV에 감정이입을 못하는 비판적 주체도 단지 불평하는 주체가 될 뿐이고,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 리얼리티 TV가 설정한 가상의 세계 안에서 복잡한 방식으로 길들여지게 된다. 텔레비전이라는 가상 속에 리얼리티 현실 논리가 결합하게 되면, 끊임없이 가상과 현실은 불일치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매트릭스 같은 세상에 사는 것처럼 출연자나 시청자 모두 현실을 의심하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가 빅브라더의 세상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통해 저자는 새로운 윤리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사례의 모델로 드는 것은 흥미롭게도 그리스의 견유철학자(Cynics), ‘쿨가이’ 디오게네스(Diogenes)이다. 견유주의란 동물적 방식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야성적 성향들을 습득함으로써 반사회적 생활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어떠한 사회도 자연스러운 ‘자연’은 아니다. 결국 만들어진 상태에서, 이들이 사회에서 사는 것은 동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질서에 적응하는 것도 아니라, 그 가운데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과 위반행위를 내면화하고 체득하는 것. 자유로운 생활방식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 장, ‘전시의 윤리적 기준’이다. 전시 연출이라는 행위는 보편적으로도 다른 장르와 비슷하게 보여주는 것의 조작이다. 이러한 조작적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존엄성’dignitas이다. 리얼리티 TV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동일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저자는 리얼리티 TV가 인간의 존엄성을 길들인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존엄성을 장치화하여, 마치 출연자들의 존엄성을 TV가 부여할 수 있는 연출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윤리적 전시란, “존엄성을 존중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모든 존엄성을 거부하는 스펙타클”(p.205)이다. 모방될 수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미디어의 스펙타클 길들이기의 고리를 끊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주목받는 최근 이슈는 생명권력(biopower), 생명정치학(biopolitics)이다. 푸코(Foucalt) 이후 아감벤(Agamben)까지 감시와 처벌을 위해 기획된 사회 체제에 구속된 개인 주체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도시 문화 속에서 ‘도시인’의 삶을 연기할 수 밖에 없는 카니즘에서 자신이 어떠한 입장을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가상과 현실 구분을 희석하며 연출되는 섬뜩한 일상을 통해 개별 인간을 감추어진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생명에 대해 존중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고민은 다시 ‘생’의 문제인 것이다. 올리비에 라작은 동물원과 리얼리티 TV 등을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고민하게 해준다.


글. 양기민. 기술미학연구회. neomimesi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