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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리뷰]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알바노토(alva noto)' 공연 II : 당신이 생각하는 노이즈 사운드는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2. 22. 15:50

이번 기획리뷰는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알바노토" 공연을 관람하신 분들이, 평소에 생각했던 혹은 이 공연을 통해 경험한 노이즈 사운드에 대한 여러 단상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노이즈 사운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이긴 하지만 항상 귀에 거슬리는 소리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아트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는데요, 알바노토의 공연을 통해 노이즈에 대한 저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저 말고도 공연을 관람하신 분들 중에서 저처럼 자신이 생각하고 노이즈 사운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화했을 듯 한데요. 앨리스온 독자분들도 이 글을 통해  평소에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노이즈 사운드에 대해서 잠시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0^ 

1.  노이즈와 사운드(뮤직)가 과연 어울리는 단어 조합일까? 노이즈는 말 그대로 불협화음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유쾌하지 못하게 만드는 소리일 뿐이다. 사운드나 뮤직이라는 단어와 나란히 쓰여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2.  노이즈는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과 듣고자 하는 사람에 따라 그것은 사운드(뮤직)가 될 수 있다. 말 그대로 노이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주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그 소리는 사운드(뮤직)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이즈를 소음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음악이라고 감상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듣는다면 그 것은 사운드(뮤직)이 될 수 있다.

3.  사실 이 공연을 보기 전에 알바노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노이즈 사운드 역시 나의 관심 밖이었기에 공연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역시나 공연 전반부, 중반부 내내 어리둥절하고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공연 후반부로 가서야 비로소 연주자와 청중들의 분위기에 어느 정도 동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노이즈에서 패턴이 들리고 그것이 사운드가 되었다. 노이즈도 패턴을 가지면 소음이 아니고 음악이 된다.

4.  나의 머릿속에서 노이즈와 사운드가 조합이 되는 순간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첫날 공연은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5.  노이즈 사운드를 계속해서 들으면 정신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글.김창원

Why Noise? 

Alva noto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 전자음악은 대부분의 이들에겐 너무 먼 외계인의 신호다. 초기 현대음악인 쉔베르그의 음악만 들려주어도 많은 이들은 크게 당황할 것이다. 실예로, 작곡과 친구의 졸업연주회에 가서 함께 간 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음악회장의 예의상 아주 조용한 귓속말로)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지? 틀린거 아니지?”란 것이었다. 그렇다면 col lengo battuto(꼴레뇨 바뚜또)- 현대음악에서 흔히 쓰이 바이올린 주법. 활대를 가지고 현을 때리라는 의미-로 시작되어 지금의 노이즈까지 이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음악사적 시대적 배경에 관한 것은 아주 많은 책들이 나와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책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연락을 달라. 그리고 나는 다소 B급스러운 ,이러 시대적배경과는 무관한 2000년대에 작곡을 공부하며 느낀점을 쓰고 싶다. 그 이유? It’s a neeeew sound!! 다양한 펄스들과 싸인웨이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그 소리들은 완전히 새롭다.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피아노로부터 시작된 몇 백년 된 악기들의 소리로부터 새로운 자유를 작곡가들은 맛보게 된 셈이다. 기존의 소리(악기를 이용한)들 이용한 음악이 어떠한 원본에 대한 복제와 같다면 이것은 원본이 없다. 복제도 없다. 기존의 음계에서 벗어나 오직 펄스들과 싸인웨이브들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차원의 소리이다. 소리가 이끌어내는 새로운 청각적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alva noto음악처 핑크노이즈에 가깝던, 그 정도가 덜(?)하던 작곡가들이 노이즈에 끌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해보면,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소리는 ‘노이즈’에 가깝지않은가? 새롭거나, 당황스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단지, 이제 ‘인식’되는 것 뿐이다. 

글. 오한나

알바 노토의 'unitxt' 앨범은 꽤 즐겨 들어오던 것이라 기대가 되었지만, 공연장에서 어떻게 들릴지에 대해선 좀 의심스러웠다. 'unitxt'에 등장하는 노이즈들은 대개 컴퓨터와 관련된 것들이라 보통 좁은 공간 혹은 헤드폰을 통해 경험되곤 하는데, 고로 덩치가 있는 공간에선 소리의 컨텍스트를 잃게 되고, 특히 전문 공연장의 감상용 환경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하는 점 때문이었다. 어쨌든 공연을 보았다.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했고,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비주얼이 감탄스러웠는데, 음향과 시간적으로 동기화되었을 뿐 아니라, 신호 오류로 인한(혹은 그런것 처럼 보이는)'비주얼 노이즈' 였다는 점에서도 훌륭했다. 하지만 앨범과는 달리 '잘한다' 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긴 어려웠는데, 이유는 역시 음향 환경의 차이 때문인 듯 하다. 

앨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어떤 신경질 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악기의 음색만 노이즈(사실 덜 정제된 전자음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들로 바뀐, 일반적인 일렉트로닉 댄스 시퀀스들의 나열처럼 들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공연 전체가 의심스러워졌다. 노이즈를 일반 악기 그것도 전자악기와 자리만 바꿔치기 한다면 그것은 노이즈 음악인가 노이즈의 텍스처를 차용한 '그냥' 음악인가? 완벽하게 컨트롤 된 노이즈를 노이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 비주얼 노이즈 처럼 보이는, 쿨해 보이는 비주얼은 무엇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공연은 노이즈를 컨트롤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교훈을 남기고 끝났다.
                                                                                                                                             
          글. 정세현  

첫 번째는 이런 류의 퍼포먼스를 할 공연장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어렸을 때는 바그너(천재 중에 천재에요.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발표를 할 공연장의 건축까지 함께 했죠.)와 제나키스(워낙에 그리스의 건축가인데 전자음악가로 뒤늦게 돌린 사람이에요. 브뤼셀의 필립스전시관을 설계했어요. 여기에서는 바레즈가 "Poem Electronics를 발표했죠.) 가 자신의 작품을 위한 공연장을 건축한 것을 보면서 '뭘 그렇게 유난스럽게..' 라고 생각했는데, low freq.를 키워서 생기는 엄청난 진동 때문에 조명기가 흔들리면서 생기는 소리를(뒷좌석보다 앞좌석에서 더 심하게 들리더라구요)들으면서 더욱 절실히 느꼈어요.  무엇보다 45분간의 "경험", 소리로 샤워하는 그런 체험을 정말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깊은 고민, 그리고 스피커 배치(difussion)를 제대로 해야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음악가는 음악과 프로그래밍 뿐만이 아니라 음향학과 음향심리학, 건축학 등등...까지 공부해야 진정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거에요.
예를 들어 천장을 구로 만들고 마치 sphere의 안에 우리가 들어가있는 것처럼 360도로 프로젝터를 쏘든, 아님 조금 더 기술이 발전된 형태로 비주얼을 보여준다면 또 다른 공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이런 류의 발언은 비단 공연장 뿐만이 아니라 미디어아트계에서도 소소하게 나오고 있지요? 전통적인 미술관이 아닌 가상박물관, 대안미술관의 형태가 필요하다는 생각은요..이번 공연을 보면서 이런 부분을 더욱 느꼈어요. (참! 알바노토가 한성대에서 워크샵을 했었어요. 저희과 오빠들이 갔었는데요 신기하게도, , 음악적인 부분보다는 이런 공간을 구축하는 부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네요.)

 두 번째는 상반되는 두 개의 소재의 조합이에요. 노이즈와 화성감, 갑자기 튀어나오는 뜬금없는 section(그것도 매 section마다 그런 식으로 과감하게 전환되더군요..) 이런 다른 것들에서 오는 이질감이 첫째 날에는 유치하다고만 느껴졌었는데 둘째 날에는 이런 급격한 변화에서 오는 당혹감이 이 사람의 색깔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요소가 갑자기 뜬금없이 큰 사운드로 "팍"하고 튕겨져 나오는 당혹감은 아마추어 같다는 느낌이 들게끔했어요.

세 번째는 "독일 노이즈 사운드의 거장"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사람이지만 음악에서의 전통적인 요소인 리듬과 화성, 음(pitch)를 의도적으로 적절하게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첫째 날의 공연은 처음보다 뒤로 갈수록 흥미로와졌다면, 둘째 날은 처음에는 확실히 몰입이 되고 재미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집중이 잘 안되었는데 이유는 잘은 모르겠어요. 다만 첫째 날은 노이즈의 음향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면, 둘째 날은 리듬(그것도 복잡하지 않은 4박자 계통)이 주가 되어서 더 대중적으로 들렸던 것 같아요.

네 번째는 둘째 날 공연의 주제 "unitxt"..중간에 불어로 숫자를 세더군요. 그나마 우리나라니까 이질감있게 들릴수도 있었겠지만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이 텍스트를 그대로 내보내진 않겠죠? 노이즈를 소재로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숫자를 읽어주어 놀랐어요. 마치 분유먹는 아이에게 갑자기 이유식이라며 딱딱한 당근을 주는 느낌? (아, 그러고 보니 이런 뜬금없는 행위들이 알바노토의 취향? 의도라는 것으로 정리가 되네요.) 만약 저라면 아예 불어로 숫자 읽는 것을 다 드러내기보다는 노이즈를 효과적으로 썼던 것처럼, 언어도 해체했다가 점차 드러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취향이 다른거니깐요..하지만 분명 노이즈(완전히 분해된 모든 주파수 영역대의 사운드)를 주소재로 음악을 만드는데 텍스트는 그냥 날 것이어서 오는 이질감이 있었어요.

전체적으로는 한 가지의 아이디어를 집요하게 이끌고 나가는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첫째 날은 퍼포먼스가 너무 일찍 끝나서 20분 지났나? 하면서 시계를 보니 45분이나 지나갔더라구요.. 그만큼 몰입을 하고 볼 수 있게끔 하는 관객 흡입력이 강한 작가였어요. 또한 사운드도 그렇고 영상도 아이디어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었어요. 또한 평면적으로 영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layer가 다양하게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Low frequency를 많이 사용했는데, 전혀 소리가 깨지지 않고 퀄리티를 가지고 있었고, 관객을 강력하게 흡입하는 부분들과 곡의 말미에는 미세 단위 입자만 남아서 리버브를 엄청 많이 주면서 끝나는 것도 센스 있었구요.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들리는 이야기로는(off the record입니다.) "오디오비주얼"의 유명인사인 알바노토가 영상은 본인이 직접 만들지 않는다고 하네요. 이 점이 모두를 놀라게 했었어요. 결국, DJ들이 Djing하는 것처럼 여러가지의 소리를 버퍼에 넣고 플레이 하는 식으로 작업을 하나봐요.. 의외였어요. 공연의 퀄리티를 위해서는 안전하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노이즈 음악의 역사를 쓴다는 사람인데 좀 아쉽더라구요.

                                                                                                                                                       글. 조은희

도시에서 살아가는 일상에는 기계가 내뱉는 노이즈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모든 사람들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밤낮으로 무언가를 듣게 되고, 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본질적으로 음악도 소리도 아닌, 의미로부터 생성된 디지털정보를 마주하게 된다. 프로그래밍 된 언어에서 발생하는 규칙과 불규칙의 사운드, 무언가를 재현하거나 표상하는 소리가 아닌 무의미한 소리의 움직임은 영상과 텍스트의 정보 과잉적 혼돈 속에서 모든 소리를 음악화하는 반항적인 놀이인지도 모른다. 디지털 숫자서열로 해체되고 다시 재배치되는 일상의 소리는 의식하지 않을 법한 여러 가지 기계의 알고리즘 구성을 표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통제된 고도의 창조행위이자 ‘소리와 음악의 경계에 대한 반발’이 아닐까. 

                                                                                                                                                        글. 손지은

이번 알바노토 공연은 소리의 신호와 영상신호를 연결하여 표현하는 부분에서 나름 신선했습니다. 하나의 소리신호가 하나의 화면으로 나타내어지고 그 소리신호가 복합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영상또한 각각의 영상신호가 복합적으로 등장하여 파레트 위에 물감을 섞는듯 다양한 색채감을 주는점에서 인상깊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노이즈 사운드에대해 많은것을 알지 못해서인지 노이즈 사운드의 한계점을 느꼈습니다. 물론 노이즈 사운드는 그것을 하나의 음악소재로 본다는 것만으로도 혁명적이지만 다양한 쓰임에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형식과 리듬 그리고 음색의 변화 이외에도 더 다양한 음악적 색채를 만들수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봅니다.

                                                                                                                                                      글. 정유민

익숙치 않은 것을 감각, 경험하는 일에서 우리는 낯섦 혹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이 '거리감'으로부터 감각의 확장 가능성을 또한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 즉 가청주파수 대역은 한정적이다. 즉, 우리가 듣는 소리는 음파의 진동으로부터 생성된 파동의 일부이다. 이 중에서도 일상의 우리는 적절한 음량, 잘 조율된 음색에 보다 귀 기울이게 된다. 주변의 무수한 소음들로부터 명확한 대상을 가진 소리,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는 소리를 분별해내도록 훈련된 우리의 '귀'는 그만큼 보수적인 감각기관이다. 미지와 미혹의 대상에 대해서는 지극히 취약하다.

그러나 노이즈 사운드, 노이즈 뮤직은 '소음'에서 출발한다. , 듣기 싫은 소리, 무의미한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말하자면 우리의 ‘청각적 아킬레스건- 이 바야흐로 청취, 감상의 대상이 된다. 낯선 청각적, 음악적 요소들의 등장에 우리(의 귀)는 긴장하게 되고, 동시에 무엇이든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 과정이 노이즈 사운드/뮤직의 감상의 첫 단계일 것이다. 아티스트의 연주가 소리 요소들을 조합하고 배치하는 실험적 과정이라면, 미지와 미혹의 대상이 형태를 찾게 되는 것은 리스너의 심상에서부터이다. 때문에 능동적인 참여를 배제하고서는 이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노이즈 사운드/뮤직이 진정 노이즈, 즉 소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이 청취의 능동성에서 가늠될 것이다.

                                                                                                                                                    글. 김태연 

* 정성껏 자신의 생각을 보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