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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아트와 이미지의 문제 II _김연주(예술학)_column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10. 1.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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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연주(예술학)


2.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사진, 광고, 영화, 텔레비전 등의 등장은 대중들을 시각적 소비에 탐닉하도록 만들었다. 오직 이미지만이 중요해졌으며, 모든 것은 보는 것이 되었다. 조지 트라우(G. Trow)에 따르면 개인은 2억 개의 눈금 위의 한 점이 되었다. 이자 필립스, 「이미지의 세계: 시각예술과 미디어 문화」, 한인선 역,『21세기 문화 미리 보기』, 이영철, 백한울 편역, 시각과 언어, 1996, p. 200.
이와 같은 현상을 클림프(D. Crimp)는 1977년 <그림(Pictures)>이라는 전시 도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어느 때보다도 유례없이 우리의 경험은 그림,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과 영화를 통한 그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직접적인 체험은 그림 다음으로 취급되어 쇠퇴하기 시작하고 점점 더 사소하게 여겨질 것이다. 한때 그림이 현실을 해석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제 그림은 현실을 강탈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림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읽어버린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림이 자발적인 의미화 구조(signifying structure)가 되고 있는지를 규정하기 위한 명령이 되고 있다. 위의 책, p. 207.
이와 같은 이미지의 폭발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관류하고 있는 반플라톤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플라톤(Plato)은 이 세계에서 진짜로 존재하는 것과 덜 존재하는 것으로 나누고 진짜로 존재하는 것을 실재(reality)라고 부른다. 실재는 현상을 넘어서는 본체의 세계이며,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현상이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와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구분하였는데, 그에게 이미지는 감각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실재가 아닌 허구이며,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역, 한길사, 1999, pp. 405-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