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미디어아트 전시

[기획리뷰] 제4회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Dual Reality를 위한 하나의 Realit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12. 1. 06:00

The 4th Seoul International Media Art Biennale
Media_City Seoul 2006 “Dual Reality”




Dual Reality를 위한 하나의 Reality


서울 국제 미디어 비엔날레가 개최된 지 벌써 1달여간의 시간이 흘렀다. 개최될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도 이제 다소 정돈되고 차분해져서 주말에는 관람객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필자 또한 오픈하는 날부터 몇 차례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러 체크하지 못한 작품은 없는지 둘러보곤 했는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비엔날레라는 형식이 주는 압도감과 거대함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개입되는 매체 예술이 적절하게 스며들어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19개국 81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제 4회 서울 국제 미디어 비엔날레는 이러한 난점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형식에 관한 주제인가, 내용에 관한 주제인가?

전시의 구성과 작품 소개에 앞서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에 관하여 생각해보기로 하자. 제 4회 서울 국제 미디어 비엔날레의 주제는 'Dual Reality'이다. Dual Reality는 ‘가상’ 세계의 존재적 성격을 ‘실제’와 반영적 관계에 놓여있는 하나의 대립 항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 항은 이분법적 체계에 의한 반대편에 놓여있는 개념으로서가 아닌, 겹쳐있되 하나는 아닌 하나이지만 서로 얽혀있어 단일체계로 읽혀지기 힘든 개념이다. 즉, 두 가지 세계는 밀접하게 점착(粘着)되어 있는 셈이다. 이번 제 4회 서울 국제 미디어 비엔날레는 이러한 가상과 실제 라는 두 개의 세상을 ‘현실’이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층위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선택은 새로운 가상성이 확대되어 가는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상과 내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오히려 그 적절성을 따져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형식에 관한 주제인가?, 내용에 관한 주제인가? 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질문으로 주제에 관한 접근을 시도해보자.
위의 질문은 뉴 미디어의 형식 자체가 내용을 규정한다는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논지에서부터 비롯된다. 새로운 미디어들은 태생적으로 그 자체의 형식으로서 내용상의 맥락을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Dual Reality'의 경우, 분명 형식과 내용이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매체 예술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제기는 어쩌면 우문(愚問)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주제로 사용되기 위한 Dual Reality는 그만큼 신중을 요하게 된다. 즉, Dual Reality라는 주제는 작품의 형식적인 면에서 이미 전제되기 때문에 작업이 보여주는 실제적인 내용에서 그러한 고민들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자기만족에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 이번 미디어 비엔날레의 전개상황을 그 연결점에 유의하며 지켜보아야 한다.

서울국제미디어비엔날레 전시장 스케치




두 개의 리얼리티는 진정 조우하고 충돌하는가?

두 개의 리얼리티의 조우와 충돌에 관한 전시의 첫 번째 부분은 가상과 실제가 뒤섞이고 대치하는 상황들에 관한 다양한 접근들이 시도되는 공간이다. 전시 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고 와타나베의 <얼굴 (‘초상’)> 연작은 현대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의 복제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같은 얼굴 이미지들의 나열인 것처럼 보이는 이 이미지들은 실제로는 미세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마치 하나의 이상적인 미의 기준으로 회귀하려는 우리네의 모습을 담은 듯 서로는 닮아있다. 그러나 미세하지만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들의 나열은 ‘같은 얼굴(초상)’ 이라는 가상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얼굴들이라는 실제성을 보여준다. 린 허쉬만의 <신시아 증권 시세 표시기>의 경우, 이러한 가상과 실제의 연결점은 확대된다. 미국 내의 주가 정보와 연동되는 이미지들은 실제적인 주가 정보를 가상의 데이터로 가상의 데이터는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로 표출된다. 물리적 현실 세계의 정보들로 출발한 숫자적 데이터는 결국 다양한 가상적 이미지들로 코드 변환 되어 관람객들에게 시각화된다. 이러한 가상과 현실의 만남은 국내 작가인 변지훈의 작업 <바람>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변지훈은 서울과 부산이라는 대한민국의 두 개의 상징적 도시를 자연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바람’으로 매개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스크린 상의 바람에 흣날리는 천 이미지는 멀리 떨어진 부산의 바람을 상징한다. 관람객들은 서울로 대표되는 도시 공간 속에서 부산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을 상상하며 실제적이지 않은 가상의 바람을 체험하게 된다. (image1, 2, 3)
이러한 작업들 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진정 두 개의 리얼리티는 조우하였는가? 아니 충돌하고 있는가?  전시장 입구에 씌여진 선언적인 제목에서 필자는 이미 새로운 충격의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가상과 실제, 두 개의 리얼리티가 조우하고 충돌하는 순간은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이 아니다. 레비(pierre levy)가 언급한 존재의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의 ‘가상’과 ‘현실’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에서 보여지는 가상과 실제의 순간들이 중첩되는 장면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모습들로 나타난다. 전시는 그렇게 혼재되어 있는 일상 속의 순간들을 차분하게 보여주며 우리네 생활 속으로 어느새 파고들어와 있는 가상의 순간들을 상기시키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즉,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이미 새로워져 있는 우리의 현실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리얼리티의 경험과 유희, 그리고 경쟁?

전시의 두 번째 부분인 ‘리얼리티의 확장: 경험과 유희의 확산’ 은 우리 생활 속에 침투된 가상과 실제의 혼재된 순간에 대한 가벼운 접근을 보여준다. 전시의 첫 번째 부분이 다소 선언적인 의미로 출발했다면, 2층으로 공간을 옮기며 시작된 전시의 두 번째 부분은 보다 친근하게 우리 생활 속 확장의 순간으로 인도한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현실에 관한 감탄과 경외의 순간을 넘어 그것이 익숙해지는 상황에서의 경험과 유희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첼테란과 제프만의 <살아있는 형상 : 원격 키네틱스>는 이러한 전시의 두 번째 부분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새로운 리얼리티로서의 가상성은 우리들에게 그 명칭만큼 낯설지 않다. 작가는 관람객들에게 피크닉에 온 손님이 된 기분을 선사하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생활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박지수와 ICU의 <돌아다니는 마음-지금 이곳에/언제나 어디서나> 역시, 새롭고 신기한 네트워크의 속성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생활 속에서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특히 국내에서는) 이용하고 있는 모바일 폰의 메시지를 통해 새로운 의미 발견의 순간을 보여준다.





앞서의 작품들이 새로운 기술적 상황에 대한 안내자의 기능을 수행했다면, 아다드 하나의 <쿠바 스틸(리메이크)>는 이미지와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마치 다색판화의 일부처럼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병치 혼합된 장면들은 새로운 시 공간의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는 마치 실제의 시간과 공간을 가상의 세계 속에 하나로 모아놓고 그것을 바꿔치기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실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마치, 가상과 실제에서 비롯된 이미지들로 유희하듯 그러한 상황으로 관람객들을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경험하고 유희하는 차원의 리얼리티의 한계를 드러내는 역할 또한 동시에 수행한다.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작업 속에서 관람객들이 그것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전시는 경험되고 유희되는 리얼리티의 순간들을 넘어 전시의 마지막 부분인 ‘경쟁적 리얼리티: 새로운 관계항 맺기’ 로 이어진다.






‘경쟁적 리얼리티: 새로운 관계항 맺기’ 로 명명된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미디어아트 전시의 마지막 파트가 늘 그러하듯, 새로운 전망과 의미 발생을 보여주는 대목으로서 제시된다. 경쟁적 리얼리티라는 제목은 조우하고 충돌하여 혼재되어 있는 리얼리티들이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경쟁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을 통해 리얼리티들의 다양한 현상들을 경험한 관객들은 그들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찾아 전시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모니터 디스플레이 장치 속 존 제라드의 <일년에 한 번 미소짓는 초상화(메리)>는 ‘실시간 3D 영상’ 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진보를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모니터를 돌려보며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돌아가는 화면 속 인물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새로운 기술은 평면적 이미지를 3차원적 가상 환경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연이어 보여지는 악셀로흐의 <모호한 시그날스케이프>는 보다 근본적인 우리 몸의 움직임에 기초한 작업으로서 소개된다. 관람객들은 자신들의 눈의 움직임을 통해 가상적인 환경을 창조하게 되고, 그러한 환경은 가시화되어 새롭게 보여진다. 그렇게 그려진 정말 제목대로의 모호한 풍경은 결국 관람객들에 의해 창조된 것인데, 가상과 실제라는 두 가지 리얼리티의 연결점으로 인간의 상호작용이 제시되는 셈이다. 한편, 노만클라인과 로즈마리카멜라, 안드레아즈크레이츠키 3인의 <피를 흘리며: 로스앤젤레스의 지나간 모습들, 1920~1986>은 미디어작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와 같은 이 작품은 가상의 인물을 작품 속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작업을 마주하는 관람객들을 그 인물 속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관람객은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의 역사를 꼴라주하고 있는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자연스럽게 그들의 역사와 생활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지는 위와 같은 다양한 시도들은 각각 새로운 환경과 기술에 관한 접근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도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려던 경쟁적 리얼리티에 관한 진지한 접근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앞서 리얼리티를 경험하고 유희하는 순간들에서 연결된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관계들을 제시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전시의 입구부터 소개되었던 가상과 실제라는 두 개의 리얼리티의 중첩된 상황은 경쟁적 상황으로, 더욱 치열한 새로운 매체 환경에 대한 전망으로는 이어지질 않는다. 새롭게 제시되어야 할 기술적 진보에 의한 또 하나의 리얼리티는 종적을 감추고 유희와 경험으로 체험되는 예술만이 남은 것이다. 결국, 이번 미디어비엔날레가 제시한 이중의 리얼리티는 하나의 리얼리티로 귀결되는데, 그러한 미디어비엔날레의 시도가 두 세계를 의도적으로 나누어 연결시킨다는 느낌으로 전달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관람객들을 이번 비엔날레의 초입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두 개의 리얼리티에 관한 보다 진지한 접근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제 4회 서울 국제 미디어비엔날레는 두 개의 리얼리티라는 모호한 현상을 해석하고 관찰하는데에는 분명 성공한 듯하다. 또한 매체 예술을 비엔날레라는 거대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친화력있게 소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충실한 현상에 대한 성찰에도 불구하고 보다 진화하는 예술의 모습에 대한 전망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실재가 되기 위한 시도를 거듭하는 ‘가상’과 가상화 되어가는 ‘실재’, 두 개의 리얼리티는 서로를 바탕으로 때로는 닮아가기를, 때로는 구별 지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결국 두 개의 리얼리티는 서로를 잉태하며, 성장시키고, 종결짓는 시작과 끝의 영원한 반복으로 귀결된다. 2년 후의 미디어 비엔날레에서 지금의 시도가 새로운 리얼리티를 잉태하는 근원적 힘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글. 유원준(앨리스온 디렉터 postmaster@aliceon.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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